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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조각 Jun 15. 2023

고까운 글밥

글로 먹고사는 일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남자가 이 연필 한 자루로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게 얼마나 고달픈 일인지 아냐?"


 나름 서울대를 나왔다던 작가가 한껏 거들먹거리면서 말했다. 그의 손에는 날카롭게 깎은 연필 한 자루가 뱅글뱅글 굴러가고 있었다.


    "누가 보면 아내분은 집에서 놀고먹는 줄로만 알겠어요. 아내 분도 일하시지 않아요?"


 나는 예의와 경멸의 스펙트럼이 있다면 최대한 경멸에 가까운 콧방귀를 뀌면서 물어봤다.


     "너는 애가 싸가지가 없어......"


 일단 싹수없다는 소리를 꿍얼대는 걸 보니 이 말싸움의 승자는 나인 것 같다. 승자는 패자에 대한 예우를 지켜 입을 다물기로 한다. 아직 공격할 거리는 많다. 그가 룸사롱을 다니다 뇌출혈로 몇 년 누워있을 때 아내가 간병을 했다던가, 집에 큰돈이 필요할 때마다 잘 나가는 형제들에게 기댄다거나, 그의 아내가 알뜰살뜰 아끼는 동안 그는 취미용 자전거에 몇천만 원을 턱턱 쓴다던가 하는 일들....... 그의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것은 말싸움에서 사용할 예리한 무기가 된다. 그럼에도 입을 다물어주는 것은 피를 볼 때까지 싸워봤자 내가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고, 원래 쥐도 너무 궁지에 몰면 되려 고양이를 물기 때문이다.


 저 작가는 뭘 그렇게 억울한 게 많아서 그놈의 '고달픈 가장 레퍼토리'를 읊어대는지 모르겠다. 겨우 입시하는 학생 몇 명 가르치는 걸로 1년에 몇 달 벌고, 가끔 원고 작업하는 걸로 푼돈이나 만지면서 말이다. 정작 성실하게 직장을 다니며 살림을 꾸리는 건 그의 아내라는 걸 알고 있다. '고달픈 가장'이라 인정받으려면 줄줄이 딸린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고 성질머리에 안 맞는 일도 꾸역꾸역 해야 하는 법이다. 이렇게 성실하게 일하는 남자들만 추려내서 국가가 '고달픈 가장' 훈장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자격도 없으면서 '가장이라는 피해의식'에 절어 사는 한심한 남자들에게 정신 차리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소위 '예술한다는 사람' 치고 성실하게 작업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 작가는 꼴에 카페를 운영했고 거기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하거나,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뛰어난 작곡 실력을 가지고 있거나 그럴싸한 그림을 그려낸다고 해도 작품이 인품을 증명하지는 않았다. 작품과 창작자는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동시에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그들은 우화 '개미와 베짱이'에 나오는 베짱이처럼 하루의 대부분을 예술을 하는 게 아니라 예술이 무엇이냐로 이러쿵저러쿵 떠들면서 보냈다. 그들 사이에 진한 커피가 놓여 있을 때는 정부의 예술가 지원 정책이나 어떤 작가의 작품이 가장 비싸게 팔렸느냐를 주제로 떠들었다. 그들 사이에 독한 술이 놓여 있을 때는 어김없이 예술가로 먹고사는 어려움에 '고달픈 가장' 레퍼토리가 뒤따랐다. 아, 남자 작가들만 있을 때는 역시나 여자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그 짓거리를 보고는 예술가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생긴지도 모른다. 그럴싸하게 그려놓은 작품들도 영 허접한 쓰레기로 보이기 시작했다. 초등학생도 그릴 법한 작품을 두고는 입바른 소리만 주절대는 예술가들이 사기꾼이나 다름없었다. 인간 존재의 본질이 어쩌니, 현대사회의 고독이 어쩌니. 미술관을 갈 때마다 읽어보는 팸플릿에는 온갖 현학적인 미사여구가 가득했다. 작품 설명을 읽고 작품을 보면 뭔 정체 모를 금속 덩어리들을 드문드문 배치해 놓고는 끝이었다. 이것저것 쓰레기를 모아 놓고 뜬구름 잡는 소리를 주절대는 것이 현대 미술인가?


 정직한 일. 차라리 30년간 택시 운전을 했다는 기사님이나 조선소에서 정년퇴직까지 일했다는 분들이 더 존경스러웠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운전으로 자식 둘을 대학 보내고 결혼시켰다는 분이나 조선소에서 철근을 자르는 일을 하다가 귀가 잘 들린다는 할아버지가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 논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와 한 무리에 섞여야 한다면 예술이란 이름으로 사기나 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투박한 손으로 정직한 일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섞이고 싶다. 어디에 속하건 무리 지어 다니는 걸 제일 혐오하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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