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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조각 Jun 04. 2021

브런치 글 100편 써 보고 느낀점

챌린지는 아닌데 하고 보니 챌린지인 느낌

    첫 글 <나를 선택한 고양이>를 올린 날이 4월 19일, 그날부터 총 46일간 하루에 2~3편씩 글을 썼다. 그동안 구독자가 55명이 되었고 내 글의 조회수도 11만 회가 넘었다. (구독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100일 동안 마늘과 쑥을 먹고 곰이 사람이 되었다는 설화를 듣고 자라서 일까? 100이라는 숫자는 왠지 완성, 끝맺음, 마무리 같은 의미를 준다. 아이들도 태어난 지 100일이 되면 축하를 받고 연인들은 사귄 지 100일이 되는 날을 기념한다. 무슨 합리적인 이유가 있지는 않지만, 한국인에게 100이라는 숫자는 크든 작든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도 100번째 글을 올릴 때는 왠지 신경이 쓰였다. 뭔가 한 챕터가 마무리되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브런치에 글 100편을 써보고 느낀 점을 정리해서 글을 써보려 한다. 이게 나의 101번째 글이다. 


■명상으로써의 글쓰기

     예전에 한창 명상을 할 때가 있었는데 나에게는 가만히 앉아 생각을 비우는 것이 꽤 괴로운 것이었다. 호흡을 느끼면서 머리를 비우라는데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발끝이 근질근질해 오는 것이다. 나에게는 불과 10분의 명상도 너무 괴롭게 느껴졌다. 아예 편한 자세로 명상을 하자며 눕기라도 하면 그대로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물론 그렇게 잠깐 잠들면 정말 꿀 같이 달콤한 잠을 잔다. 그 맛에 아침에 명상을 하는 게 좋았다. 새벽에 눈을 뜨더라도 명상하는 척하면서 다시 잠드는 명분이 되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 호흡명상을 하는 게 쉽지 않으니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린 것이 그림명상과 글쓰기 명상이다. 이런 것도 명상이라 할 수 있겠느냐만 어쨌든 내 기분과 내면을 관찰하는 수단으로 글을 쓰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좋은 책을 읽으면 글귀를 적어두기도 하고 문득 떠오른 생각을 노트에 옮겨두면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혼자만의 글을 쓰다가 인터넷 카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하는 게 별로 부담스럽지 않게 느껴졌기도 했고 더 이상 갇혀있지 않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익명성을 지키면서도 나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인터넷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렇게 인터넷 카페에 글을 쓰면서 70편을 넘어갈 때쯤 내 글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연재라는 생각은 안 했는데 사람들이 연재하는 글이라고 생각하고 다음 글을 기대하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누가 나의 외침에 응답을 해주는 것 같기도 했다. 산에서 나밖에 없는 줄 알고 "야호!" 소리를 질렀더니 반대편 산기슭에서 다른 사람의 외침이 들려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곳에 나 혼자 있는 건 아니구나. 이상하게도 늘 함께 있는 가족 친구들과도 채우지 못했던 고립감에서 벗어나게 해준건 얼굴 모르는 사람들의 댓글이었다.     


    100편을 썼다고 하면 주변에서 더 이상 소재가 떨어지지 않냐고 물을 때가 많은데, 쓰면 쓸수록 써야 할 글들이 늘어가는 것 같다. 이 만큼 많은 생각들이 복잡하게 머릿속에서 굴러 다니니 내가 매일 밤 잠을 못 자고 괴로웠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지금까지의 글들은 나 자신의 카타르시스를 위해서 쓴 글들이 많고 점점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쓰는 글로 성장해 가는 것 같다. 


■ 내 인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

    지난 생애를 반추하며 쓴 글들로 많은 해방감을 느끼면서 앞으로 가야 할 미래로 시선의 방향이 바뀌었다. 과거의 유령들을 다 성불시켜 주기라도 한 건지 이제는 나의 인생에서 발전해야 할 방향성이 어딘지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군다나 내가 쓴 글을 여러 번 읽으면서 내 정체성에 대해 정리가 되는 느낌이다. 나의 생각, 말, 글은 조금씩 다른 모습을 띄는데 생각이 말로 옮겨지고 다시 글로 옮겨지는 동안 여러 번 정제되기 때문인 것 같다. 


■나의 반쪽짜리 완벽주의

    매번 글을 발행하기 전에 여러 번 읽고 수정하는데도 막상 다시 읽어보면 잘못된 단어나 문장이 많다. 그럴 때는 모른 척하고 수정해서 다시 발행한다. 완벽주의라는 말은 완벽을 지향한다는 의미이지, 이미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인 대한민국에 자유는 반쪽 짜리이고 국민은 주인이 아니라 개돼지 취급받는 것과 비슷하다. '~주의'라는 말은 지금 현재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낭만주의는 낭만이 없는 시대에 계몽주의는 민중이 어리석을 때 태어나는 법이다.  


■역시 인생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제일 절절하게 느끼는 것이 '인생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진리이다. 나도 글을 쓰다 보면 내가 봐도 참 잘 썼다 싶은 글은 라이킷도 적고 조회수도 낮은데, 아무 생각 없이 가볍게 쓴 글의 조회수가 쑥쑥 올라간다. 


    내가 좋다고 내놓은 것은 막상 선택이 안되고, 보는 사람들이 각자 좋을 대로 선택하는 모양이다. 생각해보면 예술가들의 삶이 다 그렇다.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있어도 결국 많은 사람에게 선택된 작품과 스타일이 역사에 남는 것이다. 우리의 재능은 대체로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고 예술은 시대의 선택을 받는다. 무엇이 선택받을지 모른다. 그러니 예술가는 늘 겸허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자기가 잘나서 인정받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봐 준 것이다. 


■나의 작은 쉴 곳, 브런치 

    나는 늘 자신을 표현하면 살고 싶었다. 자유분방한 예술가가 되고 싶었고 사람들에게 내 감정과 생각을 마음껏 표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덕에 조용히 앉아서 공부하기를 강요받던 학창 시절에는 모난 돌처럼 얻어 맞고 살았고, 모두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숨기는 편이 유리한 사회생활에서도 늘 이방인 같이 살았다. 


    살면서 늘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 같아서 외로웠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한 번도 나 자신을 투명하게 보여준 적이 없다는 걸 알았다. 내가 나 자신을 타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드러내는 일에 서툴러서 누구도 날 제대로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늘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내가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는 수치심이다. 그래도 어느 순간부터는 소통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두려움과 수치심을 이겨냈다. 


수치심을 극복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모든 걸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세상에 나를 보여주기로 했다. 



첫 번째 글 <나를 선택한 고양이> 보러 가기 https://brunch.co.kr/@a010229289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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