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에세이]몰카범과퍼스트 펭귄
“저 사진 안 찍었어요.”
지하철을 타고 모임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제 앞에 앉아 있는 20대 남자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화가 나 보이는 여자에게 이같이 말했습니다. 후줄근한 옷차림에 어수룩해 보이는 남자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손으로 꽉 쥐며 “아니에요”라는 말만 연발했습니다. 핫팬츠라고 불리는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는 20대 초반의 여자는 스마트폰을 보자며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10초간 지켜보니, 여자가 화낸 이유는 몰카 때문이었습니다. 남자가 스마트폰으로 몰래 여자의 다리를 찍었고, 이를 눈치챈 여자가 화를 내고 있는 상황이었죠.
여자는 스마트폰을 보자고 했고, 남자는 ‘아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그들이 실랑이를 하고 있는 지하철 칸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두 사람을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랬죠. 남자를 추행범으로 몰아갔는데, 오해였다면 그가 얼마나 억울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스마트폰 몰카범으로 몰린 남자는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섣불리 나설 수가 없었죠. 반면에 그가 상습적으로 여성 다리를 찍고 다니는 추행범이라면 이 자리에서 잡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사진을 찍지 않았다면, 스마트폰을 보여주는 게 어떨까요?”
두 사람이 실랑이를 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입에서 ‘스마트폰을 보여주면 되는 게 아니냐’라는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건 제 입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하나둘 제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한 남자는 스마트폰을 보자고 그 남자를 잡았습니다. 또 다른 남자는 몰카범으로 지목된 자의 스마트폰을 낚아챘습니다. 이때 몰카범 남자는 “제발 핸드폰을 돌려달라”며 외쳤습니다.
몰카범의 스마트폰을 살피던 핫팬츠 여자(피해자)와 남자는 “이거 상습범이네”라며 경찰을 불러야겠다고 소리쳤습니다. 여자는 112를 누르고 통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역에서 내려 경찰을 기다리기로 결정을 했죠. 그때 몰카범 남자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안돼요. 한 번만 봐주세요”라고 애걸복걸했습니다. 여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 두 남자는 여전히 어리숙해 보이는 그를 데리고 여자와 함께 밖으로 나갔습니다.
지하철 문이 닫히고, 저는 무릎을 꿇은 채 남자들에게 제압된 몰카범을 바라봤습니다. 점점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에 생각이 많아졌죠. 저는 그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여성의 다리 사진을 찍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는 여자의 다리 사진을 보면서 쾌감을 즐기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그런 사진들을 이상한 커뮤니티 같은 곳에 올리며 자신의 우월감을 느끼는 남자일 수도 있겠죠.
제가 겪은 지하철 몰카범 사건을 돌이켜보면, ‘퍼스트 펭귄’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납니다. 퍼스트 펭귄은 불확실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용기를 내 먼저 도전함으로써 다른 이들에게도 참여의 동기를 유발하는 선발자를 뜻합니다. 제가 무심코 던졌던 말 한마디가 다른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어, 몰카범을 잡게 한 것이죠. 그 이후에 저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용기 있는 시민들이 몰카범을 제압했고, 증거를 찾았습니다.
퍼스트 펭귄은 남극 펭귄들이 사냥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드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펭귄 한 마리가 먼저 용기를 내 뛰어들면 무리가 따라서 바다로 들어간다는 데에서 유래됐습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남의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마음으로 나섰지만 좋지 않은 결과를 낼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오지랖이 넓다’, ‘나서는 것을 좋아하네’, ‘왜 하필 나서서...’ 등 주변 사람들에게 핀잔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처한다면 조그마한 용기라도 내서 나서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