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딘 세상에서 꽃의 마음을 지키는 법
칭찬의 기억
칭찬받을 일을 해야만 겨우 칭찬을 얻어내던 시절이 있었다. 특히 형제가 많은 집안에서 자라다 보면, 그 귀한 칭찬 한마디를 듣기 위해 남다른 노력이 필요했다. 내 기억의 저장소 한편에는 유독 선명하게 오래된 칭찬의 기억이 하나 있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근처에는 '꽃방식 예술원'이라는 곳이 있었다. 평범한 꽃집이라 부르기엔 규모가 꽤 컸고, 여러 층에 걸쳐 꽃들이 만발해 있던 그곳은 어린 내 눈에 비밀의 정원처럼 보였다. 어머니의 생신날, 나는 프리지어 한 다발을 사기 위해 그 예술원의 문을 열었다.
가게 안에는 이미 앞선 손님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 꽃 저 꽃을 툭툭 가리키며 무심하게 물었다. "이거 얼마예요? 저건 얼마예요?"
사춘기의 예민한 감수성을 가졌던 나는 그 광경이 왠지 불편했다. 꽃을 살아있는 생명이 아닌, 그저 가격표가 붙은 물건으로 대하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꽃이 가진 특별한 의미를 훼손하지 않고 물을 방법이 없을까 골똘히 고민했다.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꽃 값이...?"
나름대로 단어를 고르고 골라 내뱉은 한마디였다. 순간, 사장님이 환한 미소를 지으셨다. "학생은 참 말을 예쁘게 하는구나."
그날 사장님은 꽃 한 다발 사러 온 내 손에 꽃 바구니를 쥐여주셨고, 평소엔 공개하지 않던 위층의 꽃의 공간까지 구경시켜 주셨다. "언제든 꽃이 보고 싶으면 놀러 오렴"이라는 다정한 초대와 함께. 그날의 칭찬은 내 뇌리에 '말의 힘'을 각인시킨 결정적 사건이었다.
특히 전전두피질이 급격히 발달하던 사춘기 시절의 이 보상은 '아름다운 언어 사용 = 강력한 생존 보상'이라는 신경 경로를 내 뇌에 단단히 각인시켰다. 알버트 밴두라(Albert Bandura)가 말한 '자아 효능감'이 언어적 측면에서 극대화된 순간이었다
무딘 말들의 습격
칭찬은 반복된 행동을 낳는다고 했던가. 그날 이후 나는 단어 하나하나가 귀에 잘 들리는 사람이 되었다. '아' 다르고 '어' 다른 말의 모서리에 누군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며 말을 골라 썼다. 그래서인지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반가웠고, 반대로 말을 무디게 사용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마음이 쉽게 멍들었다.
세상은 친절한 말들로만 가득하지 않았다. 특히 가장 가까운 가족이 무딘 말을 내뱉을 때 상처의 깊이는 더 깊었다. "왜 저렇게 말을 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밤잠을 설치고, 때로는 증오하며 울기도 했다. 상대가 못 배워서 그런 거라 치부하며 외면하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한 동안 오래 나는 상처받았다. 하지만 결국 나는 '상처받기' 대신 '번역하기'를 택했다.
무용지물 속에 숨겨진 사랑의 원문
나의 남편은 꽃을 '무용지물'이라 부른다. "나는 꽃이 좋아."라고 말하면, 그는 "난 세상에서 꽃이 제일 쓸모없는 것 같아. 차라리 화분이 낫지."라고 대꾸한다.
문화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 T. Hall)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고맥락(High-context) 화자'와 '저맥락(Low-context) 화자'의 전형적인 충돌이다. 나는 꽃의 상징성과 관계의 함축적 의미를 중시하는 고맥락적 소통을 지향하지만, 남편은 메시지의 명시성과 실용적 사실을 우선시하는 저맥락적 소통을 한다.
저맥락 소통가인 남편에게 "꽃은 쓸모없다"는 말은 단순한 사실의 전달일 뿐이지만, 고맥락 소통가인 나에게 그 말은 내 정서에 대한 부정으로 번역되어 깊은 내상을 입히곤 했다.
재맥락화(Recontextualization): 나만의 다정한 번역기
예전의 나였다면 내 취향을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화를 냈겠지만, 이제 내 마음속 '말의 번역기'를 가동한다. 남편의 무딘 언어를 번역기에 넣어 재맥락 화하면 이런 문장이 출력된다.
[원문: 꽃은 무용지물이야] → [번역: 나는 꽃이 금방 시들어 사라지는 게 아쉬워. 오래도록 우리 곁에 살아있는 화분처럼, 기쁨도 길었으면 좋겠어.]
결국 소통의 본질은 원문(Text)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너머에 숨겨진 맥락(Context)을 읽어내는 힘에 있다.
그는 꽃이 싫은 게 아니라, 시듦의 허무함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 다른 언어를 쓰지만, 나는 이제 그의 투박한 원문 속에서 다정한 진심을 읽어낼 줄 안다. 고등학생 시절 꽃의 가치를 물었던 그때처럼, 이제는 사람의 말 뒤에 숨은 가치를 묻는 중이다.
「 」
"당신을 아프게 했던 그 사람의 무딘 말 한마디를,
당신만의 다정한 번역기에 넣는다면 어떤 '사랑의 원문'이 출력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