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착한 사람 아니에요, 나쁜 사람이에요."
새로운 센터로 발령받은 지 겨우 한 달. 서먹한 공기가 감도는 점심시간의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좁은 공간엔 팀장님과 나, 단둘뿐. 층수를 알리는 디지털 숫자가 느릿하게 '10... 9... 8...' 줄어드는 소리만 정적을 깨고 있었다. "팀장님, 오늘 점심 메뉴는..."이라고 운을 떼려던 찰나였다.
무겁게 내려앉은 정적 사이로 그녀가 나직하게 툭 던졌다.
"저 착한 사람 아니에요. 나쁜 사람이에요."
순간 내 뇌의 편도체가 요란하게 비상벨을 울렸다. '뭐지? 내가 뭘 잘못했나? 아니면 앞으로 나를 괴롭히겠다는 선포인가?' '나 성격 까칠하니 조심하라는 경고인가? 아니면 본인의 부족함을 미리 이야기하는 건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열릴 때까지 몇 초가 마치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식당으로 향하는 내내 내 마음속엔 '나쁜 사람'이라는 단어가 독한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이 한마디에 내 점심시간은 메뉴는 정해졌다.
'나쁜 사람'
오랜 업계 선배이자 은퇴를 앞둔 A와 식사 자리. 나이 어린 신입 사원이 빠릿빠릿하게 수저를 놓고 물을 채우는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으며 한마디 던진다.
" 요즘 젊은 사람 같지 않네"라는 선배의 말.
처음 가족끼리 여행을 기획했는데 그 여행이 시부모님, 친척과 함께 하는 단체여행으로 되어서
왜 그렇게 되었냐고 묻자 첫마디가
" 너도 별 수 없구나"라는 남편의 말.
명절에 아픈 고모할머님이 며느리 밥상을 챙기시는 것을 보고
"며느리 저렇게 길들이면 안 되는데" 시어머니의 말
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말
"저 착한 사람 아니에요. 나쁜 사람이에요."
[ 나의 편도체의 1차 반응]'뭐라는 거야 조심하라는 거야? 아니면 조심해 달란 이야기야?'
"너도 별 수 없구나"
[ 나의 편도체 1차 반응]'뭐지 잘못은 본인이 해놓고 나한테 프레임 씌우는 건가?'
" 요즘 젊은 사람 같지 않네"
[ 나의 편도체 1차 반응] ' 젊은 사람은 다 버릇없다는 건가'
"며느리 저렇게 길들이면 안 되는데"
[ 나의 편도체 1차 반응] ' 아 나도 길들이셨다는 건가 나도 길들이는 대상인가'
나는 가끔 일상 속 누군가가 내뱉은 한마디의 단어에 울컥 아니면 엥? 하는 반응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나의 뇌는 감정이 이성을 납치하는 상태인 아미그달라 하이재킹 (Amygdala Hijack)에 빠진다.
한국은 전형적인 고맥락(High-context) 사회다. 한국에서 '말'은 '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재미있는 실험이 하나 있다. 원숭이, 판다, 바나나 그림 중 관련 있는 두 개를 짝지으라고 하면 서양인은 '원숭이와 판다'를 고른다. 둘 다 '동물'이라는 공통 속성을 가졌기 때문이다(개별적 규칙 중시). 반면 동양인은 '원숭이와 바나나'를 짝짓는다. 원숭이가 바나나를 '먹는 관계'이기 때문이다(상호작용 중시).
이 차이는 뿌리 깊은 문화적 배경에서 온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와 독립성을 중시한 서양과 달리, 유교와 불교의 영향으로 변화와 조화를 우선시해 온 동양의 사고방식이 우리의 뇌 구조를 다르게 빚어낸 것이다.
이 '관계 중심적 사고'는 같은 문장도 다르게 처리한다.
서양의 사무실에서 "지금 18도네"라고 말하면 "응, 그렇네"라는 정보 수용으로 끝나지만, 한국의 거실에서 "좀 쌀쌀하지 않니?"라고 말하면 청자의 뇌는 풀가동된다. '보일러 온도를 더 올리자는 건가?' , '창문을 닫으라는 건가? ' 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적 뇌'는 타인의 의중을 읽는 능력이지만, 역설적으로 타인의 말에 더 쉽게 피로하게 만든다. 말 뒤에 숨겨진 거대한 맥락을 억지로 해석하려 들 때, 우리의 전전두엽은 과부하에 걸린다. 그리고 그 끝에는 대개 타인을 향한 분노나, 나를 향한 자책만이 찌꺼기처럼 남게 된다.
상대의 '개떡' 같은 말을 '찰떡' 같이 알아듣느라 내 뇌가 체해서 피로하다면, 이제는 '저맥락 소통'을 위한 인지적 방패를 세워야 한다. 전전두엽을 활성화해 상황을 '재맥락화'하는 기술이다.
여기서 중요한 전제가 있다. 무례한 말은 '상한 음식'과 같다.
상한 음식을 내놓은 것은 상대의 잘못이며, 그것을 먹고 체했을 때 “왜 내 위장은 이것도 소화하지 못할까?”라며 자책할 필요는 없다.
무조건적인 이해는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고 나에게만 인지적 노력을 강요하는 독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갈래의 길을 준비해야 한다.
1단계: 선을 넘는 말은 즉시 뱉는다 (외부 방어)
모든 말을 소화하려 애쓰지 마라. 상한 음식은 뱉어내는 게 상책이다.
즉각적 확인: "그 말씀은 제가 오해할 소지가 있네요. 어떤 뜻으로 하신 말씀인가요?"
명확한 거절: "그 표현은 제게 무례하게 들립니다. 삼가 주셨으면 좋겠어요."
물리적 거리두기: 반복적으로 독을 내뱉는 식탁(관계)이라면,
소화력을 키우기보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가장 건강한 대처다.
2단계 : 다만, 이미 내 몸속에 들어온 독소를 해독하고 나를 보호하기 위해라면(내부 방어)
첫째, '주어'를 나에서 상대로 바꾼다. "나를 공격한다"가 아니라 "저 사람은 지금 자신의 상태를 보고 중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쁜 사람이다"라는 팀장의 말은 나를 괴롭히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본인의 상태 보고일 뿐이다.
둘째, 체하는 단어에 '괄호'를 친다.
실전연습
[원문]"며느리 저렇게 '길들이면' 안 되는데."
[괄호 치기] "며느리 저렇게(몸도 아픈 고모가 챙겨주시는 게 안쓰러운데 표현이 서툰 내 상태) 면 안 되는데."
'길들이다'라는 단어는 무섭고 권위적이지만, 그 단어를 선택한 시어머니의 기저에는 '아픈 손윗사람에 대한 걱정'과 '서툰 표현력'이 섞여 있다. 단어의 사전적 의미에 매몰되지 않고 그 옆에 화자의 감정 상태를 메모하는 순간, 그 말은 나를 공격하는 무기가 아니라 그 사람의 투박한 '상태 보고서'가 된다.
셋째, 90%의 긍정적 의도 가설을 세워라. 비난이 10%라면 나머지 90%는 다른 의도일 것이라고 믿어보는 것이다. 뇌의 신경 가소성은 이 반복적인 해석 과정을 통해 평온한 경로를 새롭게 만들어낸다.
앞서 나를 얹히게 했던 말들은 이렇게 바뀐다.
팀장님의 "나 나쁜 사람이에요" → [소화 결과] " 나 때문에 감정 상할 수도 있어. 팀장이란 직책 때문에 그럴 때 조금 이해해 달라"라는 본인의 상태 보고.
남편의 "너도 별 수 없구나" → [소화 결과] 첫 가족 여행이 계획대로 되지 않은 아쉬움을 나에게 투정 부리는 서툰 감정 표현.
시어머니의 "길들이면 안 되는데" → [소화 결과] 아픈 고모가 애쓰는 게 안쓰러운 마음을 구세대 방식의 질서로 표현한 투박한 걱정.
물론 상대의 말을 일일이 분해하고 재조합하는 과정은 에너지가 쓰이는 일이다. "이걸 내가 왜 해야 해? 무리 아냐?"라는 생각이 들 기도 한다. 하지만 이 마음공부의 진짜 목적은 상대를 이해하거나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내 마음이 체하지 않게, 나를 위한 '소화제'를 스스로 처방하는 일이기도 하다.
성장, 올챙이의 심장을 가진 개구리
나는 누군가에겐 여전히 배움이 필요한 서툰 올챙이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서툶을 받아내야 하는 개구리이기도 하다. 이 이질적인 두 감각이 내 안에서 소란스럽게 충돌하지만, 나는 그 소동마저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아 묵묵히 소화해내고 싶다. 그렇게 나는 올챙이의 예민한 심장을 가진 채, 개구리의 넉넉한 소화력을 배워가는 중이다.
말 한마디에 울컥하는 올챙이 시절의 예민함은 타인의 마음을 읽는 귀한 안테나가 되기도 하지만 가끔 그 안테나에 내가 찔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횟수가 줄어들고 있다.
고맥락에서도 헤엄을 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의 맥락을 읽어내되, 그것을 내 영혼의 상처로 치환하지 않는 '건강한 거리두기'를 연습하는 것이다. 올챙이 시절의 뜨거운 감각을 간직한 채 냉철한 소화력을 키워가는 나는, 결코 고여있는 물속의 올챙이는 되지 않을 것임을 바란다.
「 」
"기억 속 당신을 체하게 했던 그 한마디 말, 이제 당신만의 '처방전(괄호)'을 지어 스스로에게 건네보는 건 어떨까요? 묵은 체기가 시원하게 내려갈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