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부터 국장은 '리더'로, 팀장은 '매니저'로 불리기 시작했다.
직함이 바뀌면 혁신이 온다던 그 수평적인 문화는 지금 우리 곁에 와 있을까?
한때 구글의 기업 문화를 소개하는 영상을 보며 "요즘은 저렇게 일하나 보다"라며
선망 어린 눈으로 바라봤지만, 정작 내가 발 딛고 선 현실은 여전히 어딘가 덜컹거린다.
과연 수평적 소통이란 무엇일까? 각 센터의 전략을 논의하는 회의가 열렸다.
정보 공유를 위한 수평적 장(場)이어야 했지만,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서로 윈윈(Win-Win)하면 좋지'라는 당위와 '어차피 말일이면 순위가 매겨질 텐데'라는
냉소가 충돌했기 때문이다. 내가 좋은 전략을 내놓아 다른 센터가 1등이 된다면,
그것은 나에게 이득인가 손해인가.
결국 시스템은 '비교'와 '순위'라는 견고한 수직의 잣대를 유지하면서,
우리에게는 수평적으로 소통하라는 모순된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내가 선뜻 입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비단 이런 시스템의 문제 만은 아니었다.
내 몸에 각인된 '교육의 기억'이 수평적 대화의 문턱을 더 높게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평생 '다르면 안 되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수평적 소통이란 각자의 다름이 부딪히며 새로운 답을 찾는 과정인데,
나는 대열에서 삐져나오면 안 되고 이탈해서도 안 된다는 통제 속에서 '다름'을 곧 '틀림'으로 배웠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부모님이 던져준 자유 앞에서
내가 느낀 것이 해방감이 아닌 혼란이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질문하는 법도, 내 목소리를 내는 법도 배운 적 없는 이에게
갑자기 떨어진 선택권은 존중 이라기 보다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던져 진 방치에 가까웠다.
이처럼 다름을 허용하지 않는 교육을 받은 우리가,
갑자기 수평적으로 소통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 전략은 '눈치 보기'뿐이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나이부터 묻고 서열을 정해야 비로소 안심하는 습성은,
다름을 견디지 못하는 우리 교육이 낳은 슬픈 자화상이다.
이 수직적 본능은 사무실 파티션 밖에서도 이어진다.
언니라는 호칭 하나로 식당에서의 역할부터 태도까지 서열화되는 '애엄마들의 모임' 이야기는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역할은 하지 않으면서 대우만 받으려는 '먼저 태어나 자' 들의 세계에서, 수평적 소통은 설 자리를 잃는다.
우리는 수평의 옷을 입고 있지만, 여전히 수직의 뼈대로 움직이고 있다.
수평적 소통은 단순히 호칭을 바꾸는 이벤트가 아니다.
내 안의 '비교'와 '서열'이라는 낡은 신경을 하나씩 끊어내고,
'나와 당신이 달라도 안전하다'는 감각을 회복해가는 고통스러운 재활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수직'의 명령이 내려오고 있다.
바야흐로 AI 시대.
이제는 '남들과는 다른', '창의적인', '공감 능력이 뛰어난' 인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존의 규칙을 깨고, 나만의 색깔을 내고, 로봇이 할 수 없는 영역을 개척하라고 부추긴다.
평생을 '삐져나오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고 자란 '뱁새'에게,
갑자기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수평적 소통부터 익히고,
나아가 창의적인 '황새'처럼 껑충껑충 뛰라니.
모니터 앞에 앉아 황새의 보폭을 흉내 내며
마우스를 클릭하고 타자를 치는 내 손가락은 땀이 난다.
아니 손목 터널 증후군이 온 몸으로 번질 지경이다.
수평이라는 단어의 무게조차 감당하지 못한 채,
다음 레벨의 혁신을 요구하며 벼랑 끝으로 미는 세상을 본다.
밀려오는 파도더러 천천히 오라고 할 수는 없다.
파도를 일으키는 보이지 않는 알고리즘과 거대 자본을 쥔 빅테크의 바람은
이미 견고했던 지형을 뒤흔들고 있으니까.
거대한 풍랑 속에서 파도를 막아서는 방파제가 될 수는 없다.
그저 살피지 못한 신경(Nerve)들을 하나씩 당기며 (tug),
파도의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테트라포드(Tetrapod)의 틈새를 살필 뿐이다.
구조물들이 파도의 위력을 잘게 쪼개어 해안선의 침식을 늦추듯.
갑작스러운 변화는 누구에게든 벅찬 일이다.
인간이었던 시절의 일상의 안녕감이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길 다만 바랄 뿐이다.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당신의 안녕감을 지탱해줄 테트라포드는 안녕한가요?
혹시 서로 부대끼는 다른 테트라포드 틈에 끼여,
당신도 모르는 새 조용히 마모되고 있지는 않은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