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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cgirl Sep 28. 2016

D10. 두 사람의 여행

Part1.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라틴 아메리카_멕시코




당장 도망치고 싶을 만큼 견딜 수 없는 도시의 삶은 아니었지만, 한동안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은 분명했다. 생각을 놓자 내 몸의 세포와 감각들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아침 귓가를 깨우는 새소리, 얼굴을 간지럽히는 바람, 눈을 뜨면 저 멀리 지평선 끝까지 이어지는 시선. 


파란 하늘, 노란 꽃. 차창 밖이 온통 내가 좋아하는 색으로 가득 차 있다. 


멕시코의 색채와 상냥함에 폭 빠져버린 나와 달리 내 옆에 앉아있는 사람은 긴장을 놓지 않는 모습이다. 버스에 오르기 전 경찰들이 일일이 짐을 수색하는 걸 봐서인지, 하도 버스에서 도난당한 여행기를 많이 보고 와서인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안 좋은 일들에 늘 대비하고 있는 것만 같다. 뭐, 서울에서도 항상 그랬던 사람이니까. 


"너랑 함께라서 좋은 거야. 여행이 즐겁긴 하지만 난 집에서도 혼자 이만큼 재밌게 놀 자신이 있어."


여행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짐을 꾸릴 수 있는 나란 사람과 여행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이 남자. 처음에는 저 말이 참 부담스러웠지만 이제는 그저 나와 함께라 좋다는 의미로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결국 이 길을 선택한 것은 각자이고 어느 누구도 서로에게 강요한 적 없으니까.


나중에 안 것이지만 나와 연애를 시작할 때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게임기를 파는 것이었다고 한다. 나에게 집중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이었다나. 지금도 소형 게임기를 들고 여행 중이지만, 하루 스물네 시간을 붙어있는 우리가 각자의 취향을 지키며 각자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좋은 도구이기에 나는 그의 취미가 좋다. 내가 찾는 소리에는 당장이라도 하던 게임을 멈추고 달려와주는 덕분에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다.


하지만 역시나 피자 한 판 시켜놓고 하루 종일 게임만 하라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할 이 사람을 둘러싼 풍경이 멕시코라는 사실이 신기해 자꾸 웃음이 터져 나온다. 우리 어쩌다 여기까지 함께 온 거지? 


우리가 함께 처음 여행한 곳은 중동이었다. 아프리카 여행 이후 정돈된 도시에서 찾을 수 없었던 새로움 그리고 그가 원하는 역사가 있는 곳을 테마로 고른 곳이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그리고 터키였다. 멋모르고 중동을 여행하기 가장 뜨겁고 힘들다는 한여름을 그곳에서 보냈다. 배낭여행이 처음이었던 그는 40여 일 만에 몸무게가 7킬로나 줄었다. 연애한 지 1년 남짓 되었던 시절이었다. 


내가 놀란 건 낯선 세상을 대하는 그의 자세였다. 나보다 냉소적일 줄 알았던 그는 나보다 유연했고 변화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몇 날 며칠을 붙어 있으면서 몸이 지치고 다 '그게 그것' 같은 순간이 와도 작은 것을 발견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 공감할 줄 아는 사람. 때로는 생각이 같지 않아도 상대방의 그것들을 인정해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그와의 여행이 좋았다.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다. 워낙에 감정표현이 적고 흥분하지 않는 그이기에 무얼 하든 그가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괜찮다. 그건 내가 하면 되니까. 크게 표현하지 않아도 그의 즐거움이 묻어나는 표정만으로 나 또한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 싸고 맛있는 맥주를 매일 밤 맘껏 마실 수 있다며 기뻐할 때의 그 표정, 버스에서 맛있는 과자와 탄산음료까지 준다며 놀라워하는 지금 그 표정 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기 치는 사람들과 싸우는 건 나고, 한걸음 떨어져 내 뒤에 서 있는 건 그이다. 이건 안 괜찮지만 어쩔 수 없는 것 같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저 이동을 위해 흘려보내던 시간들이 여행에선 풍경이 된다. 
옆에 앉은 이의 피부에 반사되는 햇살, 깜박이는 긴 눈썹, 
어깨를 타고 전해지는 심장 박동 또한 풍경의 일부다.

시간이 비교적 많다고 생각하니 무엇 하나 조급할 것이 없다.
다만, 사랑만큼은 남겨진 시간이 없는 것처럼 아끼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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