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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cgirl Sep 28. 2016

D20. 치유의 빛

Part1.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라틴 아메리카_멕시코


치유의 빛


멕시코 와하까(Oaxaca)에 머물며 스페인어를 배우기로 한 것은 탁월한 결정이었다.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있는 따꼬와 이름을 다 댈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한 음식들 때문만은 아니다. 입에 딱 맞는 살사와 칠리만큼이나 알록달록한 도시의 색채와 높은 건물이 없어 굳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마음껏 시야를 채울 수 있는 청명한 하늘, 바로 이것 때문이다. 파티오(안뜰)가 있는 콜로니얼풍 집은 언제나 하늘과 맞닿아 있고,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옥상 테라스에 오르면 뽀득뽀득 손빨래를 말려주는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온다. 매일 아침부터 점심때까지 수업을 들으러 오가는 것 말고는 별다른 일이 없는 단순한 생활이지만, 이 작지만 쉽게 누릴 수 없던 것들이 마음을 한가득 채워준다. 요즘 우리는 빛이 주는 기쁨, 색채의 중요성에 대해 매일 이야기하고 있다. 어디를 가나, 따께리아(따꼬파는 가게), 포장마차 한 구석에서조차 꽃을 발견하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이곳에서는 무엇이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멕시코 사람들이 유난히도 다정하고 유쾌한 것 또한 그 때문이 아닐까. 우리도 웃음이 늘었다.





역사가 깃든 성당 앞 드넓은 광장에는 매일 크고 작은 행사가 벌어지고 거리의 예술가들은 곳곳에서 작품을 만들어낸다. 어울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색들도 이들의 손을 거치면 아름다운 문양이 되고 강렬한 원색의 조합 또한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와하까를 역사와 예술과 미식의 도시라고 부른다. 어학원의 다른 친구들이 이곳의 음식이나 예술을 배우기 위해 와하까를 찾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괜히 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dia de muertos


원래도 풍부한 문화를 간직한 도시이지만 ‘죽은 자의 날(Día de los Muertos)’을 앞둔 지금의 와하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분주하다. 매년 11월 1일과 2일, 죽은 가족이나 친구들의 명복을 빌고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는 멕시코 전통 축제인 ‘죽은 자의 날’은 아즈텍의 오랜 전통이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름만 들어서는 왠지 어두울 것 같고 의미를 들어보면 엄숙해야 할 것 같지만 말 그대로 축제. 11월이 오기 한참 전부터 안 그래도 알록달록한 도시가 더 많은 꽃과 귀여운 소품들로 가득 채워진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오후의 거리에서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대체 어떤 축제가 될지 궁금하다. ‘죽음’과 이 명랑한 분위기가 쉽사리 연결되지 않는 것이다. 외국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적지 않게 보이는 호박 같은 소품들은 할로윈을 연상시키지만 단지 죽은 영혼이나 영혼을 놀리기 위해 가면을 쓰고 분장을 한 채 하루를 즐기는 할로윈과는 전혀 다른 멕시코만의 축제다.


집에는 먼저 떠난 가족을 위한 제단이 차려진다. 죽은 영혼이 찾아온다 생각하고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을 차려놓는 행위는 제사 문화가 있는 우리에게도 익숙하지만, 그 화려하고 유머 넘치는 상차림에서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많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메리골드 꽃(금잔화)과 과일로 오렌지빛을 가득 채우고 이 축제에 꼭 먹는 사람 얼굴이 들어간 ‘죽음의 빵’을 올린 후 초에 불을 붙이고 나면 영락없는 파티 상차림. 비뚤비뚤 콜라주 하듯 오려놓은 돌아가신 분들의 사진, 바로 옆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익살스러운 해골 장식의 조화로움은, 실례일지 모르나 귀엽기까지 하다. 홈스테이 주인아주머니가 제단에 우리의 이름이 적힌 해골을 올려놓고 선물이라 하는 걸 보면, 죽음이 끝이 아니라 더 크고 좋은 또 다른 존재의 순환으로 가는 길이라고 믿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거리에서는 사람들이 온갖 기발한 분장을 하고 모여 음악과 함께 행진을 하고, 아티스트들은 곳곳에서 멋진 작품을 선 보인다. 스페인어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골목에서 낯선 이의 초대로 전시회를 구경하고 또 인파에 섞여 함께 “loco! (미치자!)”를 외치며 열기에 함께 녹아들다 보면 금세 밤이 되어버리는 날들이 이어진다.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되는 10월 31일 밤, 자정이 가까워오면 사람들은 묘지로 향한다. 거리와는 또 다른 축제의 중요한 의식이 치러지는 자리다. 가족들이 모두 모여 무덤을 정리하고 비석을 닦고 먹을 것을 놓고 둘러앉아담소를 나누는 것은 우리의 성묘와 비슷해 보인다. 역시나 다른 점이 있다면 제단만큼이나 예쁘게 무덤을 장식하는 일. 캄캄한 한밤의 묘지가 고운 꽃과 수많은 초들로 빛나기 시작한다. 누군가의 무덤을 보고 ‘우와 정말 아름답다!’, ‘멋지다!’라고 외쳐본 적이 있었던가. 죽은 이가 그 자리에 함께 있다면 분명 웃고 있는 얼굴일 거라고 믿게 되는 풍경이다.


한밤의 묘지는 학교 다닐 때 극기훈련으로 등 떠밀려 억지로 다녀온 기억밖에 없는, 무섭고 음침한 공간이었다. 제사는 또 어떠한가. 제사를 지내본 경험은 많지 않지만, 티비에서 보고 이야기로 듣는 제사는 늘 엄숙하고 무거운 것이었다. 모두들 굳은 표정으로 예를 갖춰 의식을 치르는 것은 잠시, 그것을 위해 고생스럽게 음식을 준비하는 일에 몇 배의 시간을 쏟아야 하고 준비한 이들의 통증과 피로는 또 얼마나 오래 남는지. 죽은 이가 정말 곁에와 있다면 무엇을 바랄까. 나라면 어떨까. 생전에 사랑했던 사람들에 둘러싸여 웃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날이 지나도 즐거운 마음이 오래도록 간직되길 바라지 않을까. 자연스럽게 죽음을 상상하고 있는 나를 보며 놀란다. 지금껏 죽음은 언제나 두렵고, 그래서 외면하고 싶은 세상이었다.


아직까지 나에게 여행은 끝없이 새로움을 만나는 여정이다. 매번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는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짧은 이미지들이 있다. 보통은 내 머릿속의 이미지보다 눈 앞의 새로운 것에 관심을 두지만, 그 짧은 이미지에 집중해보면 내가 지금껏 살아온 세계를 만나고 내가 가진 상상력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바로 죽음이라는 것에서 내가 떠올린 어둡고 으시시한 이미지, 그리고 그와 정반대로 어두운 묘지라는 공간을 빛으로 수놓은 멕시코 사람들의 발랄함처럼 말이다.


‘죽은 자의 날.’ 이 직설적이고 직관적인 축제의 이름에서부터 죽음을 대면하는 멕시코 사람들의 태도가 드러난다. 이들은 죽음을 꺼내어 말하고 슬픔을 마주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떠나간 이를 그리는 마음이 어디 즐거울 수만 있겠는가. 그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누군가는 그저 말없이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그러다 어디선가 기타를 메고 딩가딩가 노래를 부르는 아저씨들이 나타나면 함께 노래를 부른다. 가끔 멕시코 사람들은 단지 노는 것을 좋아하고 축제를 즐기기에 그럴 수 있다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내가 만나온 멕시코 사람들은 결코 가볍기만 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이는 단지 좋기만 해서 추는 춤이 아니라, 슬픔을 승화시키기 위해 죽음 이후 이어질 세계를 즐거운 마음으로 상상하고 기쁜 마음으로 축복하는 그들만의 방식, 오랜 지혜일지도 모른다. 축제는 떠나보낸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함이지만 남겨진 이들의 마음을 더 많이 어루만져 주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날들이 반복되면 언젠가 맞닥들여야 할 우리의 죽음을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 준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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