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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icgirl Sep 28. 2016

D27. 이기적 여행자

Part1.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라틴 아메리카_멕시코


“올라! 여기 방 있어?” 

“응, 있어. 바로 들어갈 수 있게 정리해줄게. 여기 있는 차나 커피 맘껏 마시면서 기다려.” 


안개가 자욱한 새벽, 오들오들 떨며 찾아온 호스텔에선 해도 뜨기 전부터 염치없게 문을 두들기는 여행자들을 불편한 기색 하나 없이 따뜻하게 맞아준다. 방이 있어도 체크인 시간이 아니면 기다려야 하는 곳들과 달리 중남미의 호스텔들은 이렇게 아침부터 바로 방을 내어주거나 체크인 하자마자 포함되지 않은 그날 아침을 먹을 수 있게 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감격에 겨워 고맙다고 하면 ‘뭘 그런 당연한 걸 가지고 고마워하는 거야.’ 하는 쿨한 눈빛으로. 


해가 뜨길 기다려 소깔로(광장)로 향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코끝에 닿는 달콤한 향을 따라가 보니 코코아를 파는 가게다. 구불구불 산길을 달리는 야간 버스 안에서부터 속이 내내 울렁이던 참에 얼른 따끈한 코코아 한 잔을 사서 속을 데우기로 한다. 


헐! 한 모금을 넘기고 외마디를 외친다. 이거, 뭔데 이렇게 맛있지? 그러고 보니 카페가 유난히도 많은 동네다. 그냥 카페가 아니라 직접 커피콩을 로스팅하고 생카카오로 음료와 디저트를 만드는 곳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보통 ‘커피’ 하면 과테말라나 코스타리카 같은 다른 중미 나라들을 먼저 떠올리지만 멕시코는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커피를 많이 생산하는 나라. 그중에서도 과테말라와 국경이 맞닿은 이곳 멕시코 남부의 치아파스주(Chiapas)는 멕시코 커피 생산량의 60%를 담당할 만큼 커피가 주요 작물 중 하나이다. 생산량도 많지만 맛이 좋기로도 유명해서 스타벅스나 유럽의 큰 시장으로 수출되기도 한다. 카카오 재배는 아프리카로 많이 넘어가면서 점차 줄어드는 추세지만 여전히 멕시코에서 만드는 초콜릿은 멕시코 내에서 생산한 카카오를 주로 사용한다고 한다. 멕시코에서 두 번째로 많은 양의 카카오를 생산하는 치아파스에는 곳곳에 유기농 카카오 농장들이 남아있다. 가까이에서 가져온 신선한 커피콩과 카카오로 만든 음료와 디저트들이니 어디 맛이 없을 수가 있겠나.

달콤한 코코아로 몸을 녹이니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원주민들의 알록달록 전통 복장이 수공예품들과 어우러진 아기자기한 거리가 더욱 사랑스럽게 다가온다. 하늘은 이전 도시들보다 더 가까워져 손에 닿을 것만 같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서두를 필요 없다는 듯 한결 더 여유롭다. 마치 유럽의 어느 거리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세련된 빵집과 카페들이 분위기를 더한다. 먹음직스러운 빵과 카페라테를 한잔 사들고 햇살이 좋은 벤치를 찾아 앉는다. 


“No gracias.”

(No thanks, 괜찮아요.)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기념품을 내미는 원주민 여성을 향해 정중히 거절한다. 그러나 아기를 등에 업은 여성, 아직은 한참 학교를 다녀야 할 것 같은 나이의 아이들이 차례로 다가와 손을 벌린다. 노, 그라시아스. 노, 그라시아스. 시선을 상대의 눈에 오래 두지 못하고 다른 곳을 향해 돌리고 만다. 어여쁜 색감을 걷어내고 거리를 다시 바라보니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들어온다. 이 좋은 아침, 노천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은 외국인과 소수의 현지인뿐이다. 아름다운 도시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 속에 원주민의 자리는 없다.


멕시코는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빈곤율과 빈부격차 문제가 점차 심화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멕시코의 제일 남쪽에 위치한 와하까(Oaxaca), 게레로(Guerrero), 그리고 이곳 치아파스(Chiapas)를 포함한 3개의 주는 멕시코에서도 높은 빈곤율을 대표하는 지역으로 언급된다. 이 남부 3개 주의 빈곤율은 70%에 이른다 하고 하루 1.25달러 이하를 버는 극빈곤층은 멕시코 전체와 비교해 3배를 웃도는 수치다 (남부 3개 주는 28.7%, 멕시코 전체는 9.5%). 안타까운 점은 우리가 지나온 와하까나 이곳 치아파스나 원주민의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라는 것이다.


사실 와하까에 머무는 동안에는 와하까라는 도시가 속한 같은 이름의 와하까 주 경제가, 특히나 대다수의 원주민들의 삶이 그토록 어렵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와하까에서 우리에게 스페인어를 가르쳐주던 선생님도, 우리가 머물던 홈스테이 집주인도, 자주 드나들던 따께리아 사장님도, 거리에서 예술활동을 하며 우리의 손을 잡고 전시회장으로 이끌던 사람들도 모두 메스티소(Mestizo; 유럽인 혹은 백인과 과거 토착민의 혼혈을 일컫는 말이지만 오늘날 멕시코에서는 많이 사용되진 않는 용어다. 치아파스에서는 백인이나 메스티소들을 ‘Ladino’라 부른다) 아니면 백인이었다. 인프라가 집중된 중심도시 안에서 그 인프라에 닿을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보고 싶은 것들만 바라보고 도시의 이면, 도시 밖의 진짜 세상에 관심 갖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단지 우리가 거닐던 공간에 그들이  없었기에 알지 못했을 뿐, 수많은 원주민들과 같은 공간에 서보고 나서야 불편한 현실을 마주한다. 


산 크리스토발(San Cristobal de las Casas)은 도시가 작고 예쁜 데다 공기가 맑고 기후도 좋아서 살러 오거나 잠시 지내러 오는 외국인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여행자를 위한 카페, 음식점, 숙소가 필요한 만큼 도시는 더 활기차 졌지만 결국 이를 운영하는 사람들 또한 외국인 아니면 현지의 메스티소나 백인들이다. 


이곳을 여행하고 잠을 자고 물건을 사고 이곳에서 재배하는 커피를 마시고 음식을 사 먹어도 사람들의 삶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사실은 여행자를 무력감에 빠뜨린다. 빈곤은 국가와 도시의 정책, 정치의 부패, 교육, 인프라에 대한 접근성 등 복잡한 요인들과 맞닿아 있겠지만, 적어도 이 땅의 풍부한 자원이 만들어내는 결과가 이 땅에서 가장 오랜 시간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물음표로 돌아온다. 도시와 나라가 풍요로워져도 사람들 간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는 부조리함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월세를 지불할 능력이 있는 외지인, 혹은 유럽 사람은 당장이라도 와서 빵집을 열고 레스토랑을 열어 돈을 벌 수 있지만 그런 자본이 없는 원주민들은 매일 새벽같이 거리에 나와 해가 질 때까지 발품을 팔며 구걸을 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이다.


불편해진 마음에 발길은 관광객들을 위한 거리를 벗어나 좁은 골목으로 향한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한참 걷다 언덕을 거닐어 올라가자 비로소 동네 주민들이 북적거리고 생동감 넘치는 시장이 보인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닭을 보고 깜짝 놀라는 내 모습에 까르르 웃고, 처음 보는 식재료가 신기해서 다가가면 코 앞에 들이밀며 냄새를 맡아보게 해주는 사람들. 우리 같은 외국인이야 존재만으로 튀지만, 동네 사람들은 누가 메스티소이고 누가 원주민인지 입고 있는 옷이 아니라면 구분하기 어렵다. 예쁜 카페는 없지만 사람 사이의 벽이 사라지고 함께 어우러지는 풍경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 


고산지역의 채소들은 어마어마하게 싱싱하다. 이제 말 좀 배웠다고 신이 나서 괜히 이것저것 더 물어가며 채소도 잔뜩 사서 담는다. 매운 향이 톡 쏘는 질 좋은 생강으로 차를 끓일 생각에 신이 난다. 현지의 신선한 재료로 음식을 해 먹는 것 또한 빠질 수 없는 여행의 기쁨. 어느새 맛있게 한 끼 식사를 해 먹고 느릿느릿 파란 하늘 아래 향긋한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머금고 쉬어가는 여유를 꿈꾸고 있다. 물가도 저렴하니 배고픈 여행자도 그 여유를 며칠이고 만끽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마을 아닌가.


불편했던 이 도시가 다시 사랑스러워지는 것은 가까운 하늘 때문인지, 사람들의 미소 덕분인지, 단지 구걸하는 사람들이 잠시 눈 앞에 보이지 않아서인지. 여행자들이 왜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오랜 시간 머물게 되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 나 또한 스쳐가는 수많은 외국인 중 하나, 도시에서 나의 안위만 얻어가려는 이기적인 여행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가난하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다. 이들이 살아온 것과 전혀 다른 세상의 경제,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시스템에 무조건 맞춰 지켜오던 것들을 바꾸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오히려 이들은 바라지도 않았던 세상의 변화, 세계화가 그들의 삶의 터전을 침범하고 먹고살기 위해 스스로 해낼 수 있던 것들까지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이들에게는 물질적 빈곤 그 자체보다 자신들이 집 앞까지 찾아와 자신들이 누릴 수 없는 것들을 누리고 있는 외지인들을 바라보는 것이 더 불편하지 않았을까. 그렇담 나의 이 여행과 발걸음 또한 그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주는 걸까. 그렇다고 이곳을 찾지 않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 않은가.


어느 곳을 떠돌고 있든 여행자 또한 세상의 부조리한 고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동시에 여행자 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도시를 떠나면 오늘의 이 불편했던 마음 또한 다른 도시로 옮겨가겠지만, 늘 나의 소비가 어디에 닿는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세상의 점 같은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크고 작은 책임들을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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