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I. 통제와 비통제: 5. 관계 불안을 줄이는 작은 태도들
“불행의 대부분은 우리가 불행할 것이라고 미리 걱정하는 데서 비롯된다.”
-세네카
티벳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걱정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할 일이 없겠네.”
시대와 지역은 다르지만, 현자들은 한 목소리로 경고한다. 걱정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우리 삶을 더 무겁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신입사원 B양은 언제나 밝은 성격의 소유자다. 어느 날 아침,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C대리에게 평소처럼 환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오늘따라 C대리는 무심하게 고개만 끄덕이더니 곧장 내렸다.
B양은 곧바로 불안에 빠졌다.
‘내가 무슨 실수를 했나?’
‘혹시 정규직 심사에서 탈락한 걸 이미 알게 된 건 아닐까?’
걱정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결국 오전 내내 집중하지 못했다. 점심시간이 와도 입맛이 사라졌다.
그러나 사실 C대리의 속사정은 전혀 달랐다. 전날 회식에서 과음을 해 기억이 끊겼던 것이다. 혹여 누군가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았을까 불안해서, 아침에 B양을 보자 순간 당황해 무심히 지나친 것이었다.
C대리 역시 속을 끓였다.
‘어제 내가 B양에게 실수라도 한 건가? 그래서 날 보고 웃은 건가?’
그는 점심까지 굶으며 괴로워했다. 그러다 동료에게 전날 상황을 확인하고서야 안도했다. 그제야 얼굴에 웃음이 돌아왔고, B양에게 다가가 함께 점심을 먹자고 제안했다.
이렇듯 상대방의 속사정을 알 수도 없는데, 지레 걱정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모습은 일상에서 흔히 일어난다.
이런 모습은 고대의 현자들이 이미 간파했던 인간의 보편적인 약점이다.
어느 날, 제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스승님, 왜 사람들은 늘 걱정 속에서 사는 걸까요? 닥치지도 않은 일을 미리 두려워하며 고통스러워합니다.”
장자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까닭을 보여주마. 내 이야기를 들어보아라.”
한 농부가 있었다. 어느 날 새벽, 닭이 우리에서 달아났다. 농부는 부리나케 뛰어나가 이웃에게 소리쳤다.
“큰일 났네! 내 닭이 도망갔어. 아마 여우한테 잡아먹혔을 거야.”
이웃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직은 모르는 일이지. 산으로 갔을 수도 있고, 다시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농부는 온종일 초조했다.
“닭이 없으면 내일 알은 누가 낳고, 손님 상에는 뭘 내놓나…”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는 들판을 샅샅이 뒤지고, 이웃집 헛간까지 들여다봤다. 그러나 닭은 보이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농부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하루는 망했어. 닭을 잃었으니 내일도 고생이구나.”
그 순간, 우리 앞에서 ‘꼬꼬댁!’ 소리가 들렸다. 달아났던 닭이 저녁이 되자 스스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장자는 이야기를 마치며 제자에게 물었다.
“닭이 돌아오기 전까지 고통받은 건 누구였느냐? 닭이었느냐?”
제자가 대답했다.
“닭이 아니라, 농부입니다.”
장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걱정은 닭이 없어서 생긴 것이 아니다. ‘닭이 돌아오지 않을까’라는 상상 때문에 생긴 것이다. 닭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이지만, 농부의 마음은 이미 닭을 영영 잃은 것처럼 괴로워한 것이다.”
달아난 닭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한 농부처럼, 상대방의 의도와는 무관한 걱정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다.
같은 교훈은 불교의 경전인 법구경에서도 찾을 수 있다.
어느 날 한 제자가 붓다에게 물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내일이 두렵습니다. 혹시 병이 나면 어떡합니까? 혹시 굶주리면 어떡합니까? 가족이 떠난다면 어떡합니까?”
제자는 내일의 걱정 때문에 오늘 눈앞에 있는 법문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붓다는 제자의 눈을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내일의 고통을 네가 오늘 붙잡는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지겠느냐?”
붓다는 들에 핀 꽃을 가리켰다.
“저 꽃을 보아라. 어제는 없었고, 내일은 시들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빛나고 있다. 네가 내일 시들 것을 걱정하느라 오늘의 빛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헛된 근심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미래를 근심하지 말라. 과거를 붙잡지 말라. 현재의 일만 잘하라.”
제자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괴로웠던 이유는 내일의 고통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오늘 끌어와 곱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도 같은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그의 곁에 모인 제자들과 무리들은 늘 같은 질문을 했다.
“우린 무엇을 먹고 살죠? 내일은 무엇을 입어야 하나요? 우리 아이들은 굶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내일에 대한 불안으로 오늘 하루도 온전히 살지 못했다.
예수는 언덕에 앉아 무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스스로 걱정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의 새를 보아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지만, 하늘 아버지께서 먹이시지 않느냐? 들의 백합을 보라. 수고하지도 않고 길쌈하지도 않지만, 솔로몬의 모든 영광도 이 꽃만 같지 못하다.”
무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의 두려움은 내일의 몫이고, 오늘은 오늘의 몫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이해한 것이다.
현실 속 관계에서도 불안은 자주 찾아온다.
메시지 답장이 늦거나, 상대가 시큰둥한 표정을 짓거나, 애매한 말을 할 때 우리는 곧장 추측에 빠진다. 하지만 그 속에는 상대의 진짜 의도가 없다. 있는 것은 우리의 불안한 상상뿐이다.
사람의 마음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작은 표정이나 말투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불안을 키운다. 상대가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닐까, 무언가 잘못한 건 아닐까 하는 상상은 걱정을 낳고, 그 걱정은 다시 불안을 증폭시킨다. 사실 상대의 마음은 알 수 없고, 어쩌면 별 의미도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빈칸을 우리의 불안이 채우는 순간, 관계는 불필요한 무게를 얻는다.
세네카가 말했듯, 불행의 대부분은 실제가 아니라 예상된 불행 때문이다. 인간관계 속 걱정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의 마음을 미리 짐작하고 불안해하기보다, 지금 내가 건네는 한마디와 태도에 집중할 때 비로소 평안이 찾아온다.
다시 말하지만,
걱정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할 일도 없는 것 아닌가?
걱정은 해결책이 아니다. 오히려 불안을 키운다. 오늘 내가 선택하는 태도와 행동만이 불안을 줄인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붙잡고 있는 걱정은 무엇인가?
당신이 지금 붙잡고 있는 걱정은 실제인가, 아니면 상상인가?
그리고 오늘 당신은 어디에 더 집중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