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메모

프롤로그

by 에드유

우리 집 냉장고는 항상 가득 차 있었다.

식탁은 항상 비어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은 항상 조용했다. 현관문을 열 때마다 기대했던 "다녀왔어?"라는 인사는 없었다. 대신 냉장고 위에 붙은 메모지가 나를 맞이했다.

"국이랑 밥 데워 먹어. 반찬은 냉장고에"


동생과 나는 익숙한 루틴을 반복했다. 냉장고 문을 열고, 부모님이 새벽에 끓여놓으신 국을 꺼내고, 전자레인지에 돌리는 소리. 그 소리만이 빈 집을 채우는 유일한 온기였다.


"오빠, 리모컨 내 차례야."

"아니야, 내가 먼저 봤어."


사소한 다툼이 시작되면, 맏이인 나는 항상 져야 했다.

부모님이 돌아오시면 먼저 혼나는 건 언제나 나였으니까.


"오빠가 왜 동생한테 양보를 안 해?"

"엄마아빠 없을 땐 네가 엄마아빠야."


그럴 때마다 생각했다. 왜 난 이렇게 외로울까. 왜 부모님은 항상 안 계실까.

그리고 초등학생이던 내가 찾은 답은 '돈'이었다.


부모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아서 집에 안 계시는 게 아니었다.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학원 보내기 위해서였다. 결국 돈이 모자라서 함께할 시간이 없는 거라고 나는 결론 내렸다.


그날부터 다짐했다. 나는 달라질 거라고. 나중에 꼭 돈을 많이 벌어서, 내 아이에게는 "다녀왔어?"라고 직접 말해줄 수 있는 아빠가 되겠다고.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약사 면허를 땄고, 결혼했고, 내 나름대로는 준비된 어른이 되어 있었다.


"테스터기 두 줄 나왔어!"


와이프의 말에 기쁨과 동시에 묘한 초조함이 밀려왔다. 아빠가 된다. 그런데 시간이 촉박했다.

새내기 약사가 모은 재산으론 부족하다고 느꼈다. 아이가 태어났으니 이제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경제적 자유를 이뤄야 한다. 그래야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투잡을 시작했다. 주말도, 저녁도 없었다. 빨리, 더 빨리 경제적 자유에 도달해야 한다는 강박이 나를 몰아붙였다.


"아빠, 같이 놀자."


재택근무를 하던 어느 오후, 이제 겨우 두 살이 된 아이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물리적으로는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나는 모니터 속 회의와 메일 속에 갇혀 있었다.


"아빠 지금 일해. 나중에 놀아줄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문틈으로 보이는 아이의 뒷모습에서 과거의 내가 보였다. 조용한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던 어린 시절의 나. 부모님을 기다리며 현관을 어슬렁거리던 그 아이.


나는 지금 내가 그토록 피하려 했던 바로 그 모습으로 살고 있었다.


아이를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아이가 원할 때 시간을 낼 수 없었다.

경제적 자유를 위해 투잡을 뛰었지만, 나는 단지 시간을 돈으로 바꾸는 교환에 갇혀버렸다.


그날 밤, 문득 아버지 생각이 났다. 항상 새벽에 나가셔서 우유배달을 하시고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홀로 장사하시다가 들어오시던 아버지.


이제야 그분의 계획이, 슬픔이, 내적갈등이 이해됐다.

전화를 걸고 싶었다. 하지만 손가락은 통화 버튼 위에서 멈췄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모니터 불빛만이 어둠 속 내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침실에선 독박육아로 지쳐 쓰러진 와이프가 코를 골며 자고, 옆방에선 아빠와의 자동차 놀이를 기다리다 지쳐 잠든 아이의 숨소리가 들렸다.


이십 년 전 냉장고 메모지를 바라보던 아이가, 이제는 모두가 잠든 밤 닫힌 방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