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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깔깔마녀 Jul 19. 2021

추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래된 물건에 담긴 사연

서랍에 보관해 둔 걸, 이제야 발견했다. 실은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물건 정리를 하던 중 우연히 찾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샀던 가위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헤어 스타일을 과감하게 바꿨다.

공부에만 집중해야 하니까, 머리도 짧게 단발로 잘랐고

앞머리를 내렸다.

내게는 놀라운 변신이었고, 성공적이었다.

입학을 앞두고,  엄마가 단골로 가는 미용실로 데려갔다.

번화가였고 자리값이 포함되었는지, 동네 미용실과는 달랐다. 생소했지만, 팁 문화까지 있었다.

(그 후 프랜차이즈 미용실들이 생겨나곤 했던 것 같다.)


여하튼 첫 번째 헤어스타일은 꽤 마음에 들었다.

친구도 "머리 정말 예쁘게 잘랐다." 라며 어디서 잘랐는지 계속 물어본다.

그런데 문제는 계속 머리를 자르러 다닐 수가 없었다.

집에서 한 시간은 가야 하는 데, 도저히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처음과 몇 번을 제외하고, *동네 미용실을 이용했다. 헤어스타일을 바꿀 게 아니라 길이만 수정하면 되니까. 

집에서 가까운 헤어숍에 들러 부탁했다.  

앞머리만 잘라주세요. 살짝.

나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가운을 걸치고 의자에 앉은 뒤 눈을 감고 기다렸다. 여기까지는 문제없다. 분무기로 물을 뿌리고 미용사의 손길이 느껴진다. 앞머리 빗질이 끝나고 살짝 당겨지는 느낌이 들자 긴장감이 몰려온다. 슥삭슥삭 소리만 들린다. 정작 5분 만에 끝날 일인데, 여기 오기까지 왜 그리 망설였는지...


그런데 거울을 본 순간

아! 뭐지? 원하는 위치보다 높다! 훨씬. 눈썹을 살짝 덮어야 하는 데, 자연스러운 층은 없고 끝이 가지런하다. 일직선...이다.  앞머리가 도달해야 할 위치는 그곳이 아닌데...

댕강동 잘려나간 앞머리의 끝은  이마 한가운데를 관통하고 있었다.

아... 이야말로 **두발 대 참사.


앞에서 화는 못 내고 속으로만 부글부글 맘 상한 채 몰래몰래 주인아주머니를 흘겨본다.

남의 속도 모르고, 스펀지로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자꾸 "예쁘게 됐네, 단정하고 좋다."

도대체 뭐가 예쁘다는 말인지, 자평을 하는 게 어이가 없다.

내가 분명 "살짝"이라고 했건만...


생각해보니 앞머리를 '조금'만 잘라주세요라고 하면

어느 정도를 말하는지, 그 표현이 너무 애매한 것 같다. 1cm라고 했다면 정말 그렇게 잘라 주었을지도 의문이다. 


고로 그 당시엔 , 대체로, 미용실에 가는 일은 정말 불안했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정도였다. 

지금이라면 이렇게 말했을까? 

'앞머리는 당겨서 자르는 게 아니에요! 

자연스럽게 층이 나야 예쁘다고요!' 


자격증을 가진 이들에게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한 건 

너무 어렸기 때문일까.

끝까지 주장했어야 했다. 눈썹 위에 올라가면 안 된다고!


결국  깡통시장까지 가서, 저 가위를 사고 말았다.

그리고 스스로 잘랐다.

친구의 앞머리도 잘라준 기억이 있다. (가위도 계속 사용하지는 않았다.)

이제는 저 가위가 필요 없다. 

하지만 그 시절, 나의 앞머리 수호와 안전을 위해 기꺼이 시간과 돈을 지불했던 물건이다. 


요즘 고물건을 버리고 정리하기 바쁘다.

추억이 담긴 물건이 너무 많다. 여행 가이드북, 책, 사진, 여행지에서 가져온 브로슈어, 기념품 등등

물건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하려면 올해 안으로 책 한두 권은 거뜬히 나올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생각뿐이겠지. 

그나저나 추억이랍시고 너무 오래 붙들고 살았다.

이제 놓아줘야 할 때가 왔다. 아쉬움은 잠깐이고,  버리기 시작하니 신난다.

폐기 처분되는 물건들이지만 잠시나마 내 시간을 되돌려 주었다. 흔적은 사라질지라도 추억은 남겨주고 갔다.



*동네 미용실이 못한다는 뜻이 아니고 내가 갔던 곳의 헤어 디자이너가 너무 마음대로 였다. 내 의사는 무시하고. 아님 의사소통의 부재였나? 여하튼 늘 미용실에 가면 좌불안석했던 것 같다. 지금은 헤어숍이야말로 최상의 서비스와 커뮤니케이션의 장소 아닌가. 게다가 서비스는 얼마나 좋은가.


**두발 대 참사라는 표현은 - 최민석의 <베를린 일기>에서 가져왔다. 

내게는 역주행 같은 여행서다. 좀 늦게 발견한 책이지만 재미있게 읽었다. 여행 에세이지만 베를린 단기 체류기, 로컬 되기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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