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자서전

실패담 하나_피아노 콩쿠르에서 탈락했던 이야기

by 깔깔마녀

진하고 탁한 초록색 연못가. 한 아이가 혼자 서 있다. 파란색 바지와 조끼, 핑크색 세로 줄무늬 티셔츠를 입은 아이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멍하게 서있는 데 친구가 달려오더니 “울지 마. 괜찮아.”라며 불쑥 무언가를 내민다. 식빵이다. 그것도 단밤이 쏙쏙 박힌 촉촉한 밤 식빵을. 눈물까지 젖어 축축해진 빵조각을 꾸역꾸역 잘도 삼킨다.


초등학교 6학년 가을, 피아노 콩쿠르가 열렸던 날이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왜 하필 2020년 7월 첫날밤에 떠올랐을까? 아무래도 공모전 주제-나의 실패- 때문인 것 같다. 실패. 셀 수없이 겪었지만 친해지지 않는 두 글자, 입에 담고 싶지 않은 단어다. 지겹도록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뻔뻔하기 짝이 없는 명사다. 도전할 때마다 끼어들고, 성공을 해도 실패를 언급하게 만든다. 차라리 실패 이력서라도 쓸까. 실패 경력을 열거하니 A4 1장 갖고선 안 되겠다. 연대기라도 작성해야 할까? 누구나 마음속에 장편 소설 하나 있다는데 케케묵은 내 실패담이 뭐가 새로울까. 생각을 멈추고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눈 뜨자마자 컴퓨터를 켠다. 일단 쓰자. 실패의 자서전 1막 1장.


피아노 연습은 즐거웠지만 경쟁에는 관심 없던 내게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다. 시교육청 주관 피아노 콩쿠르에 6학년 대표로 출전하란다. 참가자 모두 상을 받는 형식적인 대회가 아니라는 말이 동기 부여가 되었고,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맹연습에 들어갔다. 예선과 본선 2곡을 동시에 준비해야 하는 데, 예선은 바흐 평균율 프렐류드 3번과 푸가 3번 중 택 1, 본선 지정곡은 모차르트 소나타 6번이다.


밥 먹고 학교 가는 일 외에는 피아노 앞에 붙어있었다. 매주 특별 레슨도 받았고, 여름방학 때는 하루 8-10시간씩 연습했다. 집에 놀러 온 친구들에게는 적당히 핑계를 대고 돌려보냈다. 여름방학은 온전히 피아노와 마주했지만 힘들지 않았다. 피아니스트가 될 거라 믿었으니까. 건반이 없는 곳에서도, 에어기타를 치듯,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빌헬름 캠프'의 바흐 연주를 잊지 않고 들었다. 잡음 하나 없는 깨끗한 선율이 무척 듣기 좋았다.


대회 당일. 도착한 대학 캠퍼스가 너무 컸지만, 엄마와 선생님이 계셔 전혀 떨리지 않았다. 피아노 한대가 전부인 연습실에 들어가 손을 풀고 기다리니, 내 차례가 왔다. 연습할 때처럼 긴장하지 않았고, 연주를 끝내자 해방된 듯 홀가분했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원장님이 어떤 학생을 소개해주는 데, 나와 동급생이었다. 키도 크고 씩씩한 그 아이와 금세 친해졌고, 다행히 둘 다 예선을 통과했다.

다시 본선이 시작되었는데 배가 살살 아프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운도 없고 피곤했다. 이번 곡은 템포가 빠르고 에너지 소모도 큰 편인데, 건반을 두드릴 힘조차 없다. 시작하자마자 박자도 무시한 채 마구 달렸다. 강약도 감정도 없이 악보만 외고 끝내버렸다. *동물의 사육제에 참가한 피아니스트 꼴이다. 딸랑하는 종소리도 -그만하라는 신호-유독 빨리 울린 것 같다.


오후 느지막이 발표가 났다. 1등은 꿈도 꾸지 않았다. '꼴찌라도 좋으니 붙기만 해라'는 심정으로 확인하는 데 합격자 명단 끄트머리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다. 그런데 2등 자리에 아는 이름이 있다... 나는 그만 슬그머니 밖으로 나와 버렸고,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연못가였다.

그렇게 13살의 나이에 제법 쓰디쓴 실패의 맛을 알게 되었다. 오래전 일인데 그날의 잔상이 떠나지 않은 것은 몰인정한 뇌의 명령어 탓일까? 실패를 끝까지 기억하라.


지금 내 옆에는 검은색 업라이트 피아노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엄마가 결혼할 때 가져온 피아노는 언니와 내 손을 거쳐 대를 이어왔다. 집 앞에 피아노 교습소가 생기는 바람에 10년 남짓한 시간을 함께 했으니, 우연치고는 인연이 깊다. 피아니스트는 되지 않았지만, 후회 없다. 간절히 원했던 일도 아니니까. 덕분에 클래식을 자연스럽게 즐기게 되었고 음악시간에도 이론 공부를 따로 할 필요가 없었다. 아주 우울할 때 피아노를 만져보곤 했는 데, 이제는 손가락도 허리도 아파 피아노 앞에 앉는 것조차 힘들다. 그래도 피아노를 버리기는 싫다. 하마터면 피아니스트가 될 뻔했던 것도 모두 이 피아노 덕택이니까.


돌이켜보니 또 다른 실패담이 떠오른다. 실패의 스펙트럼이 넓기로서니, 설마 밤하늘의 은하수만큼은 아니겠지? 실패에 대한 면역이 생기긴 어렵겠지만, 적어보니 마음의 먼지를 털어낸 듯 가뿐하다. 이 기회에 실패의 추억을 하나둘씩 놓아줘야겠다. 분명 한 건 실패의 연속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뫼비우스의 띠와는 달랐다. 실패를 했어도 원점으로 돌아오지는 않았고, 가끔 사소한 성취의 맛도 보았으니까. 몇 번의 실패를 거듭했음에도 내 인생 전체는 제법 괜찮은 날들이 많을 거라 믿는다. 그때는 성공의 자서전을 쓰자.




SE-ed0fd06f-d8b9-4b04-a975-40ceff69d0fd.jpg 요한 세바스찬 바흐_빌헬름 캠프 연주
원곡 제목
Bach Prelude and Fugue No.3 Well Tempered Clavier, Book 1
Mozart. Sonata para piano nº 6 Kv 284. I. Allegro
*생상스 <동물의 사육제> 제11곡 피아니스트: 축제에 참가했지만 단순한 음계만 반복했다는 피아니스트를 풍자적으로 표현한 곡.




*참고*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샤인>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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