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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냥이 Aug 24. 2021

페르디난드의 경우

쓸모없음으로 존재하기『꽃을 사랑하는 소 페르디난드』

이 책에는 ‘그저’ ‘그냥’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두 단어는 자칫 무성의해 보이고 문장을 힘 빠지게 만들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주인공 황소 페르디난드를 대변하기에 적합한 단어이다. 페르디난드는 꽃을 좋아한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고, 다 커서도 그렇고, 호전적인 장소인 투우장에서도 그랬다. 꽃을 좋아하는 소답게 어디에서나 그저 꽃을 좋아하고, 그에 어울리게 행동한다. 투우장에 나오기 전, 작고 귀여운 페르디난드의 모습과 거대한 투우장이 비교되어 페르디난드는 더욱 순진무구한 존재가 된다. 단순한 이야기에도, 솜씨 좋은 흑백의 펜화에도 유머가 스며있다.

우스운 것은 페르디난드를 둘러싼 주변의 행동이다. 마침 페르디난드가 벌에 쏘여서 펄쩍펄쩍 뛰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거친 황소라며 투우장에 세운다. ‘공포의 페르디난드’라고 부르며 벌벌 떨기까지 하지만 페르디난드는 평소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적어도 투우사나 관중들이 보기에는 말이다. 페르디난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 때문에 투우사들을 울렸다.


꽃을 좋아하는 소 페르디난드는 언제, 어디서나, 상황에 맞지 않아도 꽃을 좋아했다.


이 책을 둘러싼 세상의 반응도 딱 이러했다. 야망이란 눈꼽만큼도 없는 페르디난드의 이야기는 격동치는 역사 현장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금서와 갈채를 번갈아 받았다. 글 작가인 먼로 리프가 40분 만에 써내려갔다는 이  단순한 이야기는, 1936년 미국에서 첫 출간되었다. 책의 배경으로 그려진 스페인에서는, 스페인내전이 일어나고 프랑코 장군이 정권을 잡자 이 책을 금지시켰다. 평화주의의 비유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즈음 독일에서 히틀러는 이 책을 불태우라고 지시했으나, 전쟁이 끝나자 평화 인식을 고양하려는 목적으로 3만 부를 배포하였다. 스탈린 통치 하에 있던 폴란드에서 이 책은 유일하게 허용된 비공산주의권 어린이책이었다. 작가인 먼로 리프는 자신은 어린이를 위해 이 이야기를 썼지만 이제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념 교체가 극단적이지 않았던 미국에서는 1936년 첫 출간에 5200부를 찍었고 1938년이 되자 1주에 3천 부가 팔렸다. 출간된 이래 한 번도 절판된 적이 없다. 


사람들은 페르디난드 이야기를 계속했다. 투우를 좋아한 헤밍웨이는 페르디난드를 비꼬았고, 간디, 엘리너 루즈벨트는 페르디난드를 좋아했다. 사람들은 페르디난드의 성향을 두고 평화주의, 아나키스트, 본성, 다름과 젠더에 대한 논쟁 등을 뻗어나갔다. 지금 보면 페르디난드라는 캐릭터는 진취적이지 않으니 자기계발도 되지 않고 현재에는 딱히 정치 이데올로기로 읽히지도 않으나그럼에도 이 책은 아직도 많은 사람을 매료하고 작가는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을 여러 주제로 이야기하게 만든다그 사이 이 책은 출간 100년이 되어간다. 


페르디난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투우소로서는 정말 쓸모없었으나 그럼으로써 자기 생긴 존재 자체로 오롯이 남았다. 별 야망 없이 존재함으로써 존재가 드러나는 역설이 내게는 이 책의 가장 뚜렷한 특징으로 보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쓸모 있기도 힘들지만 쓸모없기도 참 힘들다. 세상에 필요한 온갖 구실을 갖다 붙여 주니 매우 고마운가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쓸모를 갖추어야 싶기도 한다. 쓸모없음조차도 쉽지 않은 세상이기에, 쓸모없어짐으로써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자유를 획득한 페르디난드가 실은 세상살이에 능란하다는 생각마저 들고 만다. “투우소가 되기 싫어요!”라는 투쟁은 고사하고 억지로 끌려 나오는 몸짓도 없이 스스로 걸어 나와 꽃향기를 맡았을 뿐인데 페르디난드는 자유로워졌다. 가장 격렬한 현장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평화로운 행동이었다. 그것이 실제로 능란한 수였든 아니든, 이 발칙한 존재들은 스스로를 소외시키지 않거나 소외시키지 않을 것 같다. 자기 없는 삶을 살지는 않을 것 같다. 누군가의 쓸모이기 이전에, 페르디난드족族은 스스로 존재하고 살아간다.* 


이 책을 둘러싼 여러 논쟁을 얘기했지만, 칼럼니스트 잭 가이오니Jack Gaioni의 말대로 이 논쟁의 주제는 페르디난드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내가 세상을 어떻게, 무엇을 보고 있느냐를 드러낸다. 이슈를 줄줄이 달고 나오지 않아도『꽃을 사랑하는 소 페르디난드』는 그 자체로 매우 아름답고 유머가 있는 책이다. 나도 이 책의 숱한 논쟁이 궁금해서 이 책을 본 것이 아니었다. 책을 펼치면, 스페인의 벌판이 섬세한 흑백 드로잉으로 펼쳐진다. 흑백인데도 유럽 남부의 맑고 새파란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이 연상된다. 첫 장면의 그림이 아름다워서, 스케치북에 연필로 따라 그리려고 책을 빌려왔던 것이 이 책과의 첫 만남이었다. 


『꽃을 사랑하는 소 페르디난드』, 먼로 리프 글, 로버트 로슨 그림, 정상숙 옮김, 비룡소, 1998. 오른쪽은 본문의 첫 장면이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페르디난드를 가르켜 누군가는 단호한 개인주의자라 하고, 누군가는 자신의 길을 가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가차 없는 파시스트라고 하며 또 다른 이들은 노동 파업에 대한 풍자라고도 했다." Some say he’s a rugged individualist, some say he’s a ruthless Fascist who wanted his own way and got it, others say the tale is a satire on sit-down strikes - 뉴욕타임즈, 아래 사이트 주소에서 인용 


**참고한 곳

https://www.sothebys.com/en/articles/the-controversial-childrens-book-banned-by-hitler-and-franco

https://www.newyorker.com/books/page-turner/how-the-story-of-ferdinand-became-fodder-for-the-culture-wars-of-its-era

https://www.theolivepress.es/spain-news/2018/09/01/the-beef-about-the-story-of-ferdinand-spains-most-controversial-childrens-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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