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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러 르귄의 ‘어스시의 마법사’ 시리즈를 매우 좋아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게드라는 주인공의 덕이 클 것이다. 게드는 어스시 세계의 대마법사이다. 게드는 세계의 지도자라 할 현자로서 세상의 악습을 알아차리고 인간의 욕심 때문에 어그러진 세계의 질서를 바로잡으려 했다. 대의이자 영웅의 행위였다. 그러나 세계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 모든 마법을 쏟아붓고 나자, 게드는 마법의 힘을 소진한 지친 남자일 뿐이었다.
마법이 없어도 왕의 조언자가 될 수도 있었다. 게드는 응하지 않았다. 대신 스승 오지언의 작은 오두막에서 생활한다. 그의 곁에는, 한때 무녀였으나 게드에게 이끌려 세상 밖으로 나왔고 그 역시 궁정의 삶을 택하지 않고 농가의 촌부로 사는 테나가 있다. 둘은 채마밭을 가꾸고, 염소를 치고, 땔나무를 구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물을 끓이고 모닥불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같은 침대에서 잠들고 악몽을 꾸면 위로해 준다. 이들에게는 매일의 생활이 있을 뿐이다.
세계의 제일 현자에서 아무것도 없는 초라한 사람이 되었어도 게드에게 변함없는 점이 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는 점이다. 세상을 구하는 일이건, 허름한 일이건, 그저 그때 그곳에서 자신이 할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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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고 스스로 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게 당장의 밥줄이 아닌데도 그런 태도를 유지하는 이들 말이다.
이제 얘기할 미야자와 겐지도 그렇다. 겐지는 20세기 초반 일본의 동화 작가이다. 만화 「은하철도 999」에게 영향을 준 『은하철도의 밤』을 썼고 이외에도 『주문이 많은 음식점』『첼리스트 고슈』를 포함한 많은 단편을 썼다. 그의 단편 동화를 어렸을 때도 읽었는데, 어린 내게 잘 이해되지 않는 논리에 기묘함이 서린 느낌으로 남아 있었다. 지금의 느낌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불온함이랄까. 경계에 놓인 세계, 이계異界의 느낌이 농후하다. 커서도 그 느낌이 남아 미야자와 겐지의 작품이 출간되어도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김기정의 동화 『금두껍의 첫 수업』을 읽으며 문득 미야자와 겐지의 기묘한 느낌이 떠올랐다. 자연과의 교류에서 오는 묘한 이질감, 발전과 발견이 완수되지 않은 시대 배경이 뿜어내는 낭만이 연결 고리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때 겐지에 대한 관심이 다시 열렸다.
사실 겐지는 지금이야 독보적 동화작가나 시인으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나 그의 작품은 거의 사후에 발표되었다. 살아 있을 때는 농업학교 교사였다. 농민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이끌고 싶다며 교사를 그만두었는데, 그리고서는 자신의 비전을 갖고 현장으로 뛰어든 활동가였다. 또 농민에게 비료를 상담해 준 농업과학자였다. 그의 고향인 이와테 현은 일본 북부에 위치한 지역인데 봄여름에 냉해와 가뭄, 수해 같은 자연 재해가 발생했고 그럴 때마다 작황은 형편없었다. 재해에 대한 별다른 방도 없이 살아가는 농민의 삶은 피폐했다. 정작 겐지의 집안은 동네 유지 격으로 부유했고 경제적 어려움이 없었으나, 겐지는 자신의 부유한 집안과 대조적인 농민의 삶을 보며 자신에게 주어진 부를 편안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자신이 농민들의 빈궁한 삶으로 들어갔고 그가 배운 것들로 농민의 가난을 덜어 주려 노력했다. 겐지의 동화를 더 깊게 느끼고 싶다면 그가 농민들을 마음 깊이 걱정하고 그들을 더 나은 형편으로 이끌어 싶어 분투했던 사람이었다는 점을 알아 두면 좋겠다.
그런 그가, 욕심 없고 타인을 위하며 살았을 것 같은 그가 ‘지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대상이 비다. 바람이다. 눈이다. 여름 더위다.
‘비에도 지지 않고 / 바람에도 지지 않고 / 눈에도 여름 더위에도 지지 않는’을 시작으로 욕심 없이 살고 소박히 먹고 살며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낮이든 밤이든 언제나 찾아갈 것을 말한다. 연민을 잃지 않고 ‘모두에게 멍청이라고 불리는 / 칭찬도 받지 않고 미움도 받지 않는 / 그러한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이 시를 그림책으로 만든 『비에도 지지 않고』에 나오는 집처럼 초가지붕 오두막에 겐지는 살았다. 농부들이 먹는 것보다 좋은 것은 먹지 않겠다며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 야채 조금을 먹고 동서남북을 돌아다니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어린 시절부터 고향의 자연 재해와 농민들의 가난한 삶을 보며 마음 아파했고 청소년 시절에는 불교 법화경에 큰 감명을 받으며 그의 삶은 점점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쓰겠다는 다짐으로 채워졌다. 이런 삶의 자세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 이 시, 「비에도 지지 않고」이다.
그가 다짐처럼 내세우는 삶의 자세는 그가 살아오며 ‘보고 듣고 알고 그래서 잊지’ 않은 것들이 모여 이루어졌으며 그 시대에 그곳에서 자신이 해야 할 부분을 일상적으로 해 나가는 모습이다. 자연 재해에 지지 않겠다고 다짐하나, 사람에게 이기겠다거나 지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부잣집 도련님, 교육 받은 지식인에서 스스로 가난한 형편으로 물러나 초가집에 살며 조촐하게 밥을 먹고, 자신이 필요한 곳에 나서며, 잘 보고 알며 잊지 않겠다고 그는 말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의 슬픔을 초래하고 더 높은 자리로 가서 더 많은 것을 쥐고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려 분투하는 식민지 시대의 세태와도, 지금 시대의 만연한 풍조와도 대치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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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지는 청소년 시절에 불교 경전인 법화경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십대에는 가족도 법화경 종파로 개종시키려 하나 되지 않자, 자신의 수양이 부족해서 그렇다면 집을 나와 무작정 도쿄의 법화경 신앙 단체(국주회)를 찾아간다. 오래 지나지 않아 누이의 병고 소식을 듣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법화경의 교리는 이미 겐지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 영향은 평생 지속되었고 그의 작품과 삶의 동기이자 토대가 되었다.
법화경은 대중을 구제하려는 대승불교이다. 자신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겐지 가족의 신앙과 달리, 겐지는 세계 전체가 하나의 법으로 통한다고 보며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간절히 바랐다. 그 세계는 모든 존재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평화롭게 사는 세상이며, 이런 세상에 도달하기 위해 겐지는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었음을 그의 작품에서 자주 보여 준한다. 겐지가 동화를 쓰게 된 계기도 법화경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겐지의 도쿄 가출 시절, (국주회의 인사에게) 법화문학을 써 보면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았고 겐지는 몇 개월 동안 열정적으로 원고를 썼다. 겐지가 귀향했을 때는 트렁크에 원고가 가득했다고 한다. 겐지의 유언 역시 법화경을 1000부 인쇄하여 지인에게 전달해 달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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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지의 시집 『봄과 아수라』를 보면 불교의 연기론의 면면도 볼 수 있다. ‘서’는 이 시집의 서술 방식에 대한 설명이자 법화경뿐 아니라 불교의 핵심 교리인 연기론을 시적으로 보여 주는 언어이기도 하다.
'나라고 하는 현상은 / 가정된 유기 교류 전등의 / 하나의 푸른 조명입니다 / (온갖 투명한 유령의 복합체) / 풍경과 다른 모든 것과 함께 / 조조히 명멸하며 / 잇달아 또렷이 불을 밝히는 / 인과 교류 전등의 / 하나의 푸른 조명입니다 / (빛은 변함없으되 전등은 사라져)'
모든 것은 명멸한다. 나 역시. 나의 생각도, 나의 의지도, 나의 행동도, 나라는 존재도 그렇다. 나라는 개인이라 고집하지만 나의 개성과 나의 행동도 실은 많은 원인과 자극에 의해 일어난 하나의 현상이다. 지금의 시대도 그렇다. 우리는 지금껏 알아온 지식으로 지금의 시대를 정의하지만, 훨씬 더 오랜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지금 정의한 것도 달라질 수 있다. 절대적이지 않다. 지금 이 시대도 긴 역사의 데이터 중 한 부분일 뿐이다. 고정된 것은 없다. ‘각자의 마음에 비친 하나의 풍물’이며 ‘우리가 느끼는 것에 불과’하다. 위의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이 시들은 스물두 달이라는 / 과거로 감지된 방향으로부터 / 종이와 광물질 잉크를 엮어 / (전부 나와 함께 명멸하고 / 모두가 동시에 느끼는 것) / 지금까지 이어온 / 빛과 그림자 한 토막씩을 / 그대로 펼쳐놓은 심상 스케치입니다'**
그가 ‘심상 스케치’라 말하는 이 작법도 사물과 풍경과 상황에 집착을 두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 서술하려는 태도의 발로가 아닐까 생각한다. 무의식의 흐름이라는 작법이라기보다 불교적 태도의 연장으로 보인다.
따져 보면 내가 놓지 못하는 많은 것이 집착이고, 그중에서도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 그렇다. 나라는 집착을 내려 넣으면 차별할 이유가 없고 나만 위할 이유가 없다. 그러면서 개인에서 전체로 나아가는 논리를 마련하게 된다. 그리고 겐지는, 자산의 안위보다 행복한 전체로 나아가려는 욕망이 더 간절해 보였다.
겐지는 ‘세계 전체가 행복하지 않으면 개인의 행복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동아시아의 수신제가평천하修身齊家平天下처럼 자아의 의식이 개인에서 집단, 사회로 확장하는 과정과 닮았다. 여기에 겐지는 최종 단계로 우주를 거론한다. 인간의 몸에 갇힌 작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과 교감하고 우주를 의식하며 사는 인간을 말하는 겐지. 그러니 속세에 살면서도 삶은 구도와도 같았다.
*宮沢清六(1988: 238)는 겐지가 임종하기 전에 부친이 유언할 것은 없느냐는 물음에 겐지는 사후에 국역법화경 1000부를 인쇄해서 경전의 뒤에는 “나의 전 생애의 일은 이 경전을 당신의 곁에 전달하고 그리하여 그 속에 있는 부처의 마음에 접하여 당신이 무상도(無上道)46)에 들어가기를.”이라는 것을 써서 지인들에게 전달하라고 했다고 한다. -고한범, 「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의 전쟁관 고찰 : 법화경 신앙을 중심으로」, 『일어일문학』 66권, 대한일어일문학회, 2015, 285~286쪽.
**미야자와 겐지 지음, 정수윤 옮김, 『봄과 아수라』, 읻다, 2018, ‘서’에 수록된 말들
***심종숙, 「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의 「농민예술개론강요」론」, 『일어일문학연구』 76권 2호, 2011, 225쪽 인용문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