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늙은 산양이 있다. 한때는 젊었고 뿔이 강했고 늠름했다. 지금은 아니다. 지팡이가 없으면 걷지를 못한다. 그런데 그 지팡이도 자꾸 떨어뜨린다. 산양은 깨달았다. 죽을 때가 되었구나! 산양은 늙고 약해졌어도 현명하다. 가만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지 않는다. 죽기 좋은 곳을 찾아 떠난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산양도 모른다. 길을 나서고 보니 마음껏 달리다 죽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들판에는 힘차게 달리는 동물들로 북적였다. 젊은 그들과 경쟁하듯 달릴 수는 없었으니 죽음을 맞을 좋은 장소가 될 수 없었다. 산양은 다시 길을 떠났다. 이번에는 높은 절벽이 생각났다. 절벽 끝에서 지팡이도 던져 버리고 맞이하는 죽음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겹겹이 솟은 절벽지대에 도착해서 보니 자신의 생각과 달랐다. 절벽은 너무 높았다. 산양은 늙었다. 그 절벽을 호기롭게 다니던 젊은 시절의 산양이 아니었다. 산양은 또 발을 돌린다. 그러나 다음 장소에서도 자신의 늙음만 확인한 산양은 어디로 향할지도 몰라서 집으로 돌아온다.
산양은 기력을 다 소진했다. 짧은 여행 사이에 더 늙은 것 같다. 몹시 피곤해 보인다. 죽기 좋은 곳, 멋지게 죽을 수 있는 곳은 내일 다시 찾아가자, 더 먼 곳으로 가 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산양은 잠들었다. 오랜만에 편하게 잠들었다. 멋지게 죽을 곳을 찾는 여정도 이렇게 마친다.
2
『어느 늙은 산양 이야기』는 군더더기가 없는 그림책이다. 보여줄 이야기만 한다. 그 외의 디테일에서 발생하고 이어가는 이야기는 없다. 색깔도 두 가지이다. 먹색과 노란색.
흰 바탕에 먹색의 산양이 있다. 산도 먹색이고 산양이 편안히 잠든 밤도 먹색이 감싼다. 화면에 단색으로 산양과 꼭 필요한 배경만 담았으니 간결하다. 이 먹색의 세계 안에 산양의 지팡이와 초승달만 면지처럼 노랗다. 노란 지팡이가 죽음을 향해 가는 산양을 지탱해 주고, 노란 초승달이 여정을 마치고 잠든 산양을 감싸 준다. 아무 걱정이 없을 것 같은 평화롭고 아늑한 밤의 모습이다.
첫 화면에 나오는 젊고 멋진 산양은 강인하고 수려한 모습으로 압도한다. 뿔도 굵고 단단해 보인다. 늙은 산양은 그렇지 않다. 늙은 산양은 크게 보여 주지도 않는다. 화면 한 구석에 힘이 빠진 모습으로 있다. 선이 거칠면 그만한 생명력이 돋보이기 마련인데, 늙은 산양은 그냥 풍선에 바람 빠진 듯 힘이 빠진 모양새다. 들판에서도, 절벽에서도, 산양의 존재는 참 작다. 젊은 날이 다시 오지 않음을 늙은 산양도 잘 알고 있다. 자신의 늙은 모습이 당황스럽지만, 그렇다고 늙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늙은 산양은 늙은 산양으로서 할 일을 할 뿐이다. 산 존재로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일을 정성스레 한다. 죽음의 무게에 짓눌리지는 않는다. 생의 단계에서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처럼 삶으로 받아친다.
이야기는 죽음에서 끝나나 살아 있는 사람은 늘 그 역전을 읽는다. 산양이 편안한 죽음에 이르려는 모습도 삶을 지속하는 모습이자 잘 살려는 모습, 그러니까 살아 있음의 본능이자 습관으로 보인다. 생물이기에 죽으나 살아 있는 동안은 계속해서 살며 때로는 죽음에 맞서고 때로는 죽음까지 끌어안는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살고 우리의 일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다. 도대체 이것이 사람 사는 것인가, 라고 심각하게 의심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무엇을 배우든, 괴로운 상황을 그만두어 환경을 바꾸든, 더 악착같이 달려들든, ‘그래, 삶의 에너지가 느껴지도록 다시 해 보자’로 결론을 내리고 별반 다를 것 없는 일상생활에 뛰어든다.
그리해서 편안하고 좋은 날만 오면 좋겠지만 삶이란 게 그렇게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산양을 응원하고 죽음에 의연한 산양의 모습에 안도하지만 그것이 불안한 감정에 대한 승화이자 해학으로 보이는 것은 그래서이다. 씩씩한 척하고 싶지만 삶은 불안하다. 큰 삶은 큰 삶대로, 작은 삶은 작은 삶대로, 자신의 일상에 걸맞는 걱정을 하고 조바심을 내며 산다. 제법 큰 일을 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작게 작게 사는 사람의 걱정이 우스울 수 있으나, 작게 사는 사람은 크게 사는 사람의 삶의 방식과 고민 자체가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이미 큰 문제에 시달리기를 거부한 삶일 수 있으니 말이다. 작게 작게 살아도 걱정은 생기고, 삶과 삶이 맞물리며 여러 감정을 겪는다.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어느 정도 의도한 방향으로 삶을 이끌어가려 한다. 그러다 예측하지 못한 일이 닥치기도 한다. 이런 일을 마주하고 허망해하며 스스로 질문한다. 예측할 수 있다면, 지금의 이 결과를 바꿀 수 있다면 나는 그때 다르게 행동했을까? 이렇게 물으면 답할 수가 없다.
3
아주 무서운 꿈을 꾼 적이 있다.
꿈에서 나는 옛 동네를 걷고 있었다. 한 무리의 명랑한 소녀들이 내 곁을 지나갔다. 나는 그중 한 소녀의 운명을 알았다. 하지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모든 예측은 일어나기 전에는 확실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말을 함으로써, 당사자가 그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경계하고 별스럽게 행동하다가 운명과 똑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위태로운 운명을 알면서 모른 체하기도 어려웠다. 이도저도 못한 채, 그러나 운명이란 것의 힘에 짓눌려 두려워하면서 벌벌 떨었다. 얼굴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두려움에 굴복하고 거의 체념하며 고개를 뒤를 돌리려는 찰나, 검은 손이 내 어깨를 당기려는 듯했다. 아니, 검은 손의 존재를 느끼고 고개를 돌리려고 했을까?
두려움이 극에 달해서 깼다. 꿈 밖에서도 똑같이 밭게 숨을 쉬면서 떨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그 검은 손이 운명 또는 그에 맞먹는 거대한 힘의 형상화라고 생각했다. 그 손이 나를 해치려 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 존재를 드러냈을 뿐. 그리고 그 존재만으로도 나는 압도당했다. 두려움의 압도였다.
내 인생에서 심리적으로 가장 깊은 공포를 경험한 순간이었다. 그 후에도 몇 년 동안이나 그 꿈을 생각할 때면 생생하게 그때의 두려움이 살아나 모든 게 멎어버리는 것 같았다. 마음 깊숙한 데서 올라오는 공포였다. 앞날을 예측한다고 하여 삶이 쉬울까, 아니면 정해진 결과에 맞추어 자신의 처신을 계산하느라 그 사이에서 길을 잃게 될까.
내 능력은 물론, 앞날을 예측하지 못하므로 최대한 조심스럽게, 작게 산다. 그런데도 종종 쉽게 답할 수 없는 고민을 한다. 그날도 그랬다. 생각을 계속해서 반복해도 답을 하지 못하고 오지 않은 미래에 미리 서글퍼하다 책꽂이 앞에 섰다. 그때 내가 꺼낸 책이 하필 왜 이 책이었을까. 테드 창의 소설집이었다. 그중 「네 인생의 이야기」가 있었다. 이 이야기의 화자인 루이즈는 스스로 질문한다.
‘나는 처음부터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에 상응하는 경로를 골랐어. 하지만 지금 나는 환희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아니면 고통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내가 달성하게 될 것은 최소화일까, 아니면 최대화일까?’
4
루이즈는 외계생명체 헵타포드의 언어를 배우며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인지하는 순간을 경험한다. 자신의 아이에 대해서도 그랬다. 연인 게리가 “아이를 가지고 싶어?”라고 물을 때, 루이즈는 벌써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처음과 끝을 다 알았다. 해피엔딩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루이즈는 자신의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루이즈의 질문대로, 사랑의 환희를 위해서일까, 그럴지도 모르나 아닐지도 모르는 고통을 굳이 확인하기 위해서일까? 외계 존재의 언어 체계 안에서 인지된 미래와 실제 삶을 경험하고 도전해 보려는 모험심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 심정이 알고 싶어서 한참이나 루이즈의 질문을 생각하다 이렇게 질문해 보았다.
“어떤 슬픔이 올 것을 감지한다면, 당신은 지금 그를 사랑하기를 멈출 것 같나요?”
사랑의 상대가 어디를 향하든, 당신이 지극히 사랑하는 존재라고 해 보자.
사랑을 멈추고 인연을 끊을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을지도 모른다. 멈추는 이유는 더 큰 상처가 없는 안전한 인생을 도모하기 위해서일 테고, 멈추지 않는 이유는 여럿이다. 헤어지는 법을 몰라서일지도 모른다. 스스로 어떤 슬픔을 견딜 만한 강한 인간이라는 착각인지도 모른다. 미래를 감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 운명을 벗어날 사람이라는 자신이 있을 수도 있다. 슬픔이 인생의 과업이라는 청승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가올 슬픔에 대비하여 헤어지느니 자신의 사랑을 감내하겠다는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더 담대하게, 미래를 알든 모르든 세상 살다 보면 여러 일을 경험하게 되고 모든 인연은 시작할 수도, 끝날 수 있으며 끝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끝을 미리 실행해 버리지만, 또 한 편의 사람들은 끝을 안다고 해서, 지금 당장 그 끝을 실행하지는 않는다. 모든 일에는 처음과 끝이 있으나 처음과 끝만 있지는 않다. 우리가 본 것은 산양의 늙은 모습과 죽음을 향한 길 하나뿐이나 그 사이에도, 그 이전에도 빼곡한 날들이 있었다.
5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는 읽을 때마다 참 열심히 읽는다. 헵타포드의 언어 원리를 다 이해하지는 못하는데, 그래도 문장을 건너뛰지도 않고 곱씹어 보며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 원리를 이해하면 내게 지혜라도 생길 것처럼, 내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합하여 볼 수 있는 능력이라도 생길 듯이 공들여 읽었다. 소설 속 설정이 아니고 진짜 언어 기술인양 말이다. 그렇지만 소설 속 지식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해서인지 나는 헵타포드 언어처럼 과거부터 미래까지 동시에 인지하는 경험을 하지 못했다. 여전히 순차적이고 인과적 관계에서만 현상을 이해하고 추론할 수 있다.
그래도 한 번 해 보았다. 이 책을 읽고 가만히 친구와 나를 생각 속에 두고서는 “우리가 만났다”를 조용히 속삭인 적 있다. 속삭인다고는 할 수 없는데, 저 여섯 글자를 한 순간에 발설해 보려 했었다. 그러면 우리의 선형적 시간이 한 번에 아우러지며 미래가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회색 코트를 입은 친구와 내가 무언가를 함께 보며 이야기하는 장면만이 떠올랐다. 이 이상의 이미지는 내게 보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필요한 미래의 장면은 그 정도면 된 것 같다.
6
루이즈는 헵타포드의 세계관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나 그들의 언어로서 생각할 수 있었다. 이따금 헵타포드의 언어로만 기억을 의식할 때면 루이즈는 과거뿐 아니라 미래도 동시에 지각하게 된다. 이때 루이즈의 총체적 기억은 헵타포드의 언어를 숙지하기 시작한 헵타포드들과의 인터뷰로 시작해서 루이즈 자신의 죽음으로 끝난다. 이 사실을 깨달은 루이즈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아닌 미래를 절박하게 따르는 삶을 택한다면?
인간의 자유의지와 인간이 미래를 아는 것은 충돌한다. 루이즈는 그리스 비극 속 인물을 예로 든다. 애매모호한 예언이 아닌 미래에 관한 실제 지식이 주어졌다고 하자. 정해진 미래와 인간의 자유의지는 대립하고, 그 속에서 그리스 비극 속 인물은 ‘운명을 회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반 사정에 의해 결국 그 운명에 따라 행동한다는 식으로 얘기가 흘러갈 것이다.’ 보통은 이 구조를 쓸 것이다. 미래를 알고 있음에도 미래에 종속되지 않고, 인간다움의 대표 도리인 자유의지를 보여 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루이즈는 이 구조와 반대로 행동한다. ‘미래를 아는 경험이 사람을 바꿔놓는다면? 이런 경험이 일종의 절박감을, 자기 자신이 하게 될 행동을 정확하게 수행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불러일으킨다면?’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하듯, 루이즈는 자신이 인지한 미래를 절실하게 따른다. 삶의 장면 장면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어떤 세부도 놓치지 않을 작정으로 산다.
인간의 사고체계는 선형적이고 인과적이다. 행동이 결과로 이어지며 과정이 결과에 영향을 준다. 그러므로 항상 미래를 목표로 두고 삶을 이어 간다. 미래의 좋은 결과를 위하여, 보상을 위한 삶을 산다. 때로는 결과를 보고 과정도 평가하기도 한다. 결과가 좋으니 과정이 그만큼 성실했다거나 재능이 넘치는 사람이었고, 결과가 좋지 않은 것을 보면 과정에서도 허점이 있었을 것이라고 스스로, 주변인들은, 사회는 판단한다.
미래를 따르기로 한 루이즈의 삶은 달랐다. 루이즈는 미래에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의 삶을 정성을 다해 빼곡히 채워간다. 미래를 이미 알기에 미래에 저당 잡히지 않고 매순간을, 매순간 그대로 받아들인다. 알 수 없는 삶을 불안해하는 대신, 생의 순간순간에 집중하며 자신의 삶에 무감각하지 않게 산다.
환희의 극치인지, 고통의 극치인지 묻는 루이즈의 질문을 답하는 데에 필요한 실마리는 연인간의 뜨거운 사랑이 아니었다. 루이즈는 어쩌면 자기의 남은 인생을 걸고 극도로 신실한 도박을 벌였다. 내걸 것이라고는 자신의 인생밖에 없는 인간이 그 인생을 걸고, 상대도 없고 이미 결과가 정해진 도박판에 들어왔다. 결과를 알면서도 소홀한 법이 없다. 촉각을 곤두세워 패를 살피고 자신이 던진 패를 수습한다. 남은 인생 전부를 걸고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삶을 수행해 간다. 미래를 알고 결과를 알아서 마구 사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알기에 삶의 과정을 더 소중히, 하나하나 채워 간다.
이 소설을 감정의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면에서만 본다면 왜 루이즈가 자식의 죽음을 알면서도 그 밤, 남편과 사랑을 나누었는지 안타깝고 야속하다는 생각도 들 수 있다. 그러나 루이즈는 헵타포드의 언어 속에서 아이의 일생을 보았을 뿐, 아이의 일생을 정하는 존재가 아니다. 아이의 일생과 루이즈의 시간이 겹쳐 있을 뿐이다.
7
우리는 영원하지 않다. 우리가 삶의 끝, 생명의 끝을 향해 가는 것은 자명하다. 그건 태어나는 순간부터이다. 삶이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게 다가오는 순간은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다. 키가 크고 지식이 성장할 때,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그저 사실을 말하자면, 태어나는 순간 이미 끝은 정해져 있다.
게다가 삶은, 내가 사는 삶인데도 내가 컨트롤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긴다. 예상 못한 일이 일어나 충격을 받고 긴 시간을 침묵 속에 머물기도 한다. 그럴 때면 우리네 삶을 옭아매는 운명이란 것이 있을까, 운명의 그물을 건드리면 더 가혹해질까, 하는 무거운 생각에 빠진다. 나보다 더 큰 힘이 나를, 우리를 흔들어 대고 있지는 않을까, 문득 이렇게 겁이 나고 서글플 때, 운명을 설득할까, 운명이 우리에게 눈 감아 주기를 바랄까, 운명이라는 허망한 실체를 웃으며 지나갈까, 몇 가지 방법이 머릿속을 스친다.
이건 마치 고대 신화 속 영웅이 하던 고민과 다를 바가 없다. 내가 스스로 결정 내리지 못하는 문제를 고민하는 내 모습과 고대인의 모습이 겹친다. 신의 세계는 개방되거나 끝났고 독점되던 많은 정보는 세상에 퍼졌다고 하나 그렇다고 인간이 뭘 다 아는 것도 아니다. 마음도, 운명도, 죽음도 우리는 모른다. 평소에는 합리적이고 자신감 있는 현대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이 무겁고 복잡하여 내게 나를 설명할 수가 없을 때, 내 삶인데 이끌어 갈 자신이 없어 느닷없이 운명의 실재를 묻고 불안해질 때, 실용주의나 과학 같은 현대인의 장치는 떠오르지 않는다. 고대인의 투쟁만 떠오른다.
인생의 처음과 끝, 세상의 큰 이야기 사이에서 무력함을 느끼며 서글퍼할 때, 아래의 문장을 읽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꺼낼 때, 책장에서 같이 꺼낸 책이었다.
마른 나뭇가지를 모으며 석양 무렵의 가문비나무숲을 걷는다. 축축한 대기가 느슨하고 따뜻하다. 숲속 카펫에 떨어지는 무스(사슴과의 포유류) 똥에 물기가 조금 배어 있다. 버드나무의 새싹이 트기 시작했을 것이다. 붉은다람쥐 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숲도 조금씩 꿈틀대기 시작했다.
작은 장작불이 흔들리고 있다. 타닥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나의 마음을 풀어준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 더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역시 묘한 거야, 사람의 마음이란. 아주 자잘한 일상에 좌우되면서도 새 등산화나 봄기운에 이렇게 풍족해질 수 있으니.
사람의 마음은 깊고, 또 이상할 만큼 얕다. 사람은 그 얕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밤이 되고 별이 나왔다. 랜턴을 켜놓고 일기를 쓴다. 올해가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어떻게, 용케 이 책을 같이 꺼냈을까. 호시노 미치오의 책 『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중에서 한 부분이다. 미치오는 사진 그림책 『곰아』로 처음 알게 된 사진 작가이다. 알래스카의 풍광과 곰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서린 사진도 마음 저리게 아름답지만, 평생 곰을 찍다 곰에게 죽은 극적인 인생으로 하여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사진만 좋을 줄 알았는데, 산문집을 읽다 보니 문장과 그 속에 담긴 사유도 좋았다.
사진과 글로 짐작한 그의 삶은 바람처럼 가볍지는 않았다. 스스로 택한 독특한 삶의 방식에서 변하는 세상과 변화 속에서 휘청대는 알래스카 원주민의 삶을 목격했다. 처절함과 부당함과 죽음을 알았고, 카메라를 들고서는 아름다움과 생명을 찍었다. 묵직한 인생이나 그렇다고 그 사이의 작은 기쁨을 외면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는, 오히려 풍족함을 누리는 그 마음에 안도했다. 큰 역사만 강조하는 때는 지났어도 여전히 큰 업적, 매스컴에 드러난 성공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곳에 도달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것도 좋다. 하지만 그러면서 작은 성취는 무시하고 처음부터 큰 성취만 이루려고 한다. 사실 우리를 따뜻이 감싸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커다란 성취보다 우리 생활의 작은 부분에서 훨씬 많이 올 것이다.
태어남과 사라짐. 이 커다란 스토리는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이다. 처음과 끝은 달라지지 않고 달라질 수 없다. 다만 그 사이에 있는 하루하루의 깊이와 온도가 다를 뿐이다. 그러니 올 것이나 오지 않은 결과에 지레 짓눌리지 말고, 그 사이의 작은 달콤함과 따뜻함을 더 주고 싶고 더 깊게 누리고 싶다.
7
고정순 작가는 작품에서 달을 중요한 오브제로 쓸 때가 있으나 그렇다고 그곳으로 가지는 않는다. 외부로 가지 않고 이곳에서 달을 보는 이 작가의 스타일을 좋아한다. 저기의 피안이 아니라 여기의 소소하고 잔잔한 일상을 산다. 그 일상에 고통이 점점이 이어있더라도, 작가는 그 안에서 자신이 할 일을 인지하고 일상을 꾸려간다. 저곳에서의 휴가는 멋진 기억은 남길지 몰라도 그게 일상의 지긋지긋함이나 눈앞의 고통을 해소해주지는 못한다. 작가는 그림책에서 천국을 만들어내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휘둘리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태도, 유머와 해학은 어떤 상황에서도 비집고 나와 날카로워진 마음을 누그러트린다.
8
늙은 산양은 지혜로워서 죽음이라는 가까운 미래를 인지했다. 그것은 산양이 노력하든, 가만히 있든 오는 것이다. 하지만 산양은 죽음을 향한 길을 자신의 선택과 시도로 성실히 채운다. 자신의 죽음을 더 만족스럽게 실행하고자 길을 나서고 멋진 죽음을 상상하고 그럴 만한 장소를 찾아갔다. 자신의 상상과 현실이 다르면 다시 설계하고 그 멋진 죽음을 이루러 다시 떠났다. 그리하여 도달한 곳이 결국은 자신의 집이고, 그 사이에 더 힘이 빠졌을지라도, 그리하여 그곳에서 평범하게 죽음을 맞이하였을지라도 산양의 시도는 헛되지 않다. 끝까지 살아 있었고 죽음에 무력하지 않았다. 이 책이 죽음에 대한 책일까? 죽음에게는 그럴지 모르나 삶에게는 삶의 태도에 대한 책이 된다.
큰 이야기만 하고 사는 건 힘들다. 처음과 끝 사이에 있는 많은 작은 이야기가 우리를 지탱하게 한다. 우리가 본 것은 산양의 늙은 모습과 죽음을 향한 길 하나뿐이나 그 사이에도, 그 이전에도 빼곡하게 이어진 날들이 있었다. 죽음을 향한 여행길에서도 산양은 다 알 것 같은 세상 모습에 새삼 감동을 받고 새로움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 사이의 이야기들이 또 다른 그림책에서 펼쳐진다. 긴 절망, 그 뒤에 오는 한 줄기의 바람 또는 승화, 먹는 즐거움,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 사랑을 이루는 기쁨, 고요함 속에서 누리는 편안함. 우리 삶을 비어 있지 않게 하는 것은 평범하고 사소한 이야기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