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음에 슬픔이 가득하여 세상도 쓸쓸하고 외로울 때, 김환기 화가의 그림을 보면 서글픔과 안도감이 교차하는 감정에 젖었다. 푸른 그림 속 하나하나의 점과 작은 사각형은 하나하나의 집으로 보였다. 불이 켜진 집, 켜지지 않은 집, 그 속에는 각자의 이야기가 있어 보였다. 내가 그림을 보는 그 시간에 내 그리운 사람들은 어디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을까. 김광섭 시인의 시가 더해져 그 그림을 보고 나면 한참을 아련함에 빠져 있었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세상은 이렇게 저렇게 이어지고, 인연은 때로는 너무 신기하고 오묘하게 이어진다. 서로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한없이 사랑하면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한 채 다시 못 만나는 이들이 있어서일까, 깊은 푸른 그림도, 검박하게 빛나는 작은 별 같은 시도 마음을 적신다.
2
오에 겐자부로는 『읽는 인간』에서 윌리엄 포크너의 『야생 종려나무』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여자와 의대생인 남자가 사랑에 빠지고 둘은 탄광촌으로 도망간다. 그곳에서 여자는 임신을 하지만 아이를 지우기로 결정한다. 의대를 다녔던 남자가 직접 중절수술을 시도하나 여자는 그 때문에 죽고 남자는 체포된다.
남자에게 여자의 가족이 독약을 권한다. 생의 모멸만 남았지만 남자는 독약을 거절한다. 살기로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 그 순간 그 여자와의 사랑도, 그의 삶의 시간도 다 사라지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는 ‘아무것도 아닌 것’ 대신 슬픔을 택한다. 아니, 이것은 슬픔이 아니라 비탄이라 부름이 어울린다.
연인과 아이의 죽음도 비탄이요, 남은 자의 선택도 비탄이다.
수많은 책이 떠난 사람과 떠난 뒤 남은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한다. 그림책도 그렇다. 이별은 누구에게나 온다. 나이가 들며 더 경험하게 되지만 어려도,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결혼이나 출산은 예상하고 일어나는 일이지만 죽음은 그렇지 않기에 죽음, 죽음 뒤의 상황을 설명해줄 책이 필요하다.
내 기억에 그림책에서 누군가를 잃고 난 뒤 비탄의 정서를 그대로 표출하는 책은 별로 없다. 아이들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목적 때문에도 최대한 담담히 말한다. 대상이 어찌 되었든 그런 전달 방법과 그렇게 감정을 처리하는 방식은 맞다. 삶은 죽음을 향해 간다. 죽은 자에게는 모르겠지만 산 자에게는 죽음마저도 삶의 일부이다. 슬픔은 슬픔대로 표출해야 하나 죽음이 삶의 일부임을, 이별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임을 최대한 담담히, 우아하게 말해 줄 필요도 있다.
언젠가부터 ‘영영 이별’(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책을 눈여겨보았다. 그중 최고는 『내가 함께 있을게』였다. 삶과 죽음의 정체가 궁금할 때, 그들이 서로 그 안에 있음을, 그리하여 받아들여야 함을 말해 주는 그림책이다. 놀라운 책이다. 어떻게 그렇게 정제된 언어로, 어떻게 그렇게 간결한 스토리로 삶과 죽음의 맞물림을 전할까.
언젠가 내 격렬한 슬픔이 세월에 닦이고 닦여 평온해지면, 내가 내게 거리를 두어 비로소 정확한 언어로 말할 때가 되면 삶과 죽음에 대한 그림책을 쓰겠다고 생각한 적 있다. 그러다 이 책을 보았을 때, 생각했다.
‘완벽한데! 내가 굳이 보탤 필요가 있을까.’
『곰과 작은 새』는 참 특이한 책이다. 곰이 사랑스러운 친구인 작은 새를 갑자기 떠나보냈다. 곰은 작은 새를 기억하고 함께한 날들을 떠올리는데, 곰의 상실감, 절망,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추억에 대한 허무함, 무기력함이 너무 무거워 내 등짝을 내리누르는 듯하다. 와트만지에 크레용이나 목탄으로 칠한 듯한 흑백 그림도 독특한데, 이 그림은 이 이야기를 묘하게 판타지로 만든다. 이 책을 보면 흑백 집시영화, 아님 안소니 퀸 주연의 「길」이 떠오른다. 젤소미나의 나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곰과 작은 새』를 읽고 나면 남은 자가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일단 슬픔을 고스란히 견디는 것, 그리고 그 슬픔을 승화시키는 것이다.
3
2013년 말에 모리스 센닥이 마지막으로 작업한 책이 나왔다. 『나의 형 이야기』.
이 책은 비탄으로 가득하다. 이렇게 비탄을 고스란히 말하는 그림책은 보지 못했다.
책 표지에 윌리엄 블레이크의 신화풍 그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책을 펼치고 책장을 넘기며 이야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린다. 형제는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우주 어딘가에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본문 첫 장면, 바로 이별이 닥친다.
화려한 빛을 내뿜으며 새 별이 돋고, 그 빛살에 단단한 지구는 두 동강이 나 버렸네.
잭은 얼음대륙에 던져져 코가 꽁꽁 얼고 가이는 가파른 공중을 빙빙 돌다 보헤미아 땅에 떨어졌다네. 곰의 굴속으로 쿵.
곰은 가이의 숨통을 끊으려 했지.
가이는 곰에게 얼어붙은 잭이 있는 곳이 어딘지 수수께끼를 냈네.
곰은 대답 대신 자신의 몸을 찢어 큰곰자리가 되었고 가이는 큰 곰의 목구멍 속으로 들어가 광대한 시간 속으로 뛰어들었지.
세상은 봄이 되고 5년 동안 얼어 있던 잭도 이제 초록빛 신비로운 꽃들 속에 있지.
이별은 갑자기 왔다. 지구가 두 개로 쪼개져 버리고 잠자던 형제는 인사도 없이 헤어지고 말았다. 지구가 쪼개지고 형제가 각각 어딘가로 내동댕이쳐버린 설정에서, 얼결의 이별에, 슬픔과 충격이 동생의 세상 전부를 잠식했음을, 슬픔이 그의 심층부의 생명력까지 파고들었음을 가만히 헤아려본다. 형과의 이별 뒤 형을 찾는 동생의 모험은 신화처럼 원초적이고 상징적이다. 한 번도 소리 질러 부른다거나 우는 장면이 없는데도 이 책은, 절규하고, 절절하며, 절박하다. 가이가 세상을 하염없이 떠돌다 험악한 곰을 마주하는 모습은 형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냥 휘청거리는 모습으로 보여 위태롭다.
잡아먹히기 직전 가이는 곰에게 형의 행방을 묻는다. 신화와 전설처럼 곰은 수수께끼를 맞히지 못하고 동생은 관문을 통과하여 형이 있는 지하세계로 뛰어든다.
가이가 이 모험을 하는 사이에 5년이 지났다. 세상에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격렬한 모험을 하며, 긴 시간을 보내며, 가이는 조금이나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받아들인다. 형을 깨운 가이는 이제야 비로소 형에게 인사를 한다. 평온하게 안녕을 말한다.
이제 잭은 동생의 팔에 안겨
편안하게 잠들었어요.
가이는 속삭였어요. “잘 자.
우린 꿈 속에서 보게 될 거야.”
4
그러나.
가이의 평온한 인사는 내게 안도감을 주지 못했다.
잭은 평온히 잠들고 가이는 잭과 평화롭게 인사하나 마지막을 향해 가는 길은 비탄으로 가득했다. 책을 읽는 내내 폭발할 듯 응축된 비탄을 알아차린다면, 마지막의 평온한 인사에서도 슬픔이 꾹꾹 억눌려 있음을 느끼고 만다. 가이는 완전한 평온을 되찾은 것이 아니다. 이별을 완전히 자기 속으로 끌어안았을 뿐이다.
모리스 센닥은 이 원고를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남은 자는 그들을 그리워한다. 슬픔은 절망이 되고 함께한 시간을 돌이킬 수 없음은 통탄스럽다. 끝도 없는 생이라면 어느 순간에 슬픔이 격렬한 감정으로 분출될지 모른다. 그러나 삶이 저물어 갈 때라면 어떨까. 줄어드는 생의 에너지만큼 슬픔의 격정도 줄어들지 않을까. 그에게 슬픔은 이미 체화된 것이니 익숙했으리라. 슬픔에 익숙해진다 하여 서글픔과 고통이 쉬이 누그러지지는 않았겠으나, 적어도 더 격정적으로 비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때가 되었다. 남은 자에게 죽음이 가까워지자 비탄은 옅어지고 말도 안 되는 희망이 번져 갔을지도 모른다. ‘영영 이별’의 고통스러운 시간이 끝나고 재회할 수 있는 때가 왔으니.
2012년 5월, 센닥은 병실에서 디자인 작업을 마친 최종 원고를 보았다. 그리고 사흘 뒤 세상을 떠났다. 먼저 떠난 사람들을 절절히 그리워하던 모리스 센닥은 이 책의 긴 작업을 마치자 그 자신도 세상의 저편으로 넘어갔다.
셰익스피어 연구자인 스티븐 그린블래트가 책의 서문에 “자욱길조차 없는 바다, 꿈조차 꾸지 못한 해안을 향해 / 그대들은 격렬하게 몸을 던지고.”라고 셰익스피어의 구절을 인용했듯, 모리스 센닥은 형과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어디로 향하는지도, 향하는 길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고 꿈도 꾸지 못한, 알지 못하는 저 세계로 떠났다.
영혼도, 사후세계, 이승과 저승도 다 거짓일 수 있다. 인간이 확인하지 못하는 거의 유일한 영역이 아닐까. 그러나 그렇게라도 만들어 내야 했다. 그것만큼 원하지 않는 이별을 겪은 인간을 위로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5
명절 즈음하여 여기저기서 몇 건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명절이 지나자마자 지방 장례식장에 내려갔다. 얄팍한 숄더백 안에 든 간단한 여행 물품으로 며칠을 지냈다.
몇 번째이던가, 내가 지인의 죽음을 경험한 것이. 장례식을 치르고 갑자기 바람이 차가워졌다. 내겐 내내 이 말이 맴돌았다.
또 한 번 계절이 간다.
찰나를 경계로 계절은 스산해졌다.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나는 같으나, 뭔가가 달라져 버렸다.
이 말이 무엇인지, 이 느낌의 정체가 무엇인지 나는 명확히 밝혀내지 못했다. 마음속 단추 하나가 툭 풀린 느낌이다. 계절의 물리적 경계이자 사람 마음의 심리적 경계를, 높지 않은 계단 또는 넓지 않은 틈이나 넘어서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던 것을 또 넘어서 버렸다. 내가 애쓴 것이 아닌데 속수무책으로 삶은 깊어졌다. 스산한데 겸허해지고 입은 더 무거워졌다.
20대 마지막에 아주 가까운 사람과 영영 이별을 경험했다. 그 뒤에도 몇 번의 어처구니없는 부고 소식을 듣고 황막한 시간을 견디며, 내 삶은 타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종종 했다. 이번에도 또.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고 하지만 내게 죽음은 기억하는 게 아니다. 일부다. 어느 하루고 삶과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날이 있을까.
외로움과 고독에 천성적으로 강하지만, 그 천성적 능력에 생의 쓸쓸함, 깊은 외로움, 두려움이 더해졌다. 내가 스스로 그 깊숙하고 무거운 감정을 도저히 놓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나는 엇나가 버렸다.
외로움을 이해받으려 하지도 않고 그냥 고스란히 견딘다. 그게 내가 해야 하는 일인 양.
솔직히 말하면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게 너무 큰 바람이라는 생각에 대놓고 말하지 못하지만 실은, 누가 나를 알아주면 좋겠다. 내가 그렇다고. 처절한 슬픔과 외로움에서 뒤돌지 않았다고.
그런데 만약 내게 그러지 말라고 그 비탄을 그만두라고 한다면, 나는 당장 말할 거다.
“싫어!”
슬픔을 간직해서라도 기억하려는 거다.
그리고 말도 안 되고 볼품없으나 내게는 중요한 저항이다. 슬픔, 컴플렉스, 상처에 대해 힐링과 치유를 필요 이상으로 부르짖는 거대하고 일방적인 말들에 대한. 치유법 다수가 결국은 소비와 상업으로 연결되는 데 대한.
이 책은 여는 글도, 추천사도, 번역가의 후기도, 모두 아름답다. 각자의 언어로 결국은 모리스 센닥이 우리에게 어떻게 작별인사를 했는지 말해 준다. 길지 않으니 찬찬히 읽어 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