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정냥이 Oct 01. 2023

Ⅳ 깊이

어슐러 르귄은 판타지 문학은 예술의 심미성을 갖춘, 완전한 이성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판타지 문학이 허무맹랑하고 법칙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들의 생각에 지긋지긋한 분노를 애써 감추며 판타지 문학은 현실도피가 아니라 체제 전복이라고 논리적으로 말해 나간다. 

나는 그이의 분노를 짐작한다. 그림책이나 판타지 문학이나 막강한 편견에 시달리는 모양은 비슷하니 말이다. 그림책에 대한 편견은 이렇다. 글이 적다는 이유로, 소품처럼 보이는 그림에, 쉽게 만든다고 착각하며 자신이 깊은 감상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림책은 작가의 창작 의지와 독자에게 잘 전달하려는 계산이 잘 어우러져 자연스러워지는 수준에 이르려는 이성과 노고의 산물이다. 또 판타지 문학이 그러하듯 그림책도, 2 더하기 1은 3이라고 말하는 장르이다. 2 더하기 1로 5나 47을 만들지 않아도 충분히 상상력 충만하고 감성이 풍부하며 때로는 날카롭다. 

글이 원고지 40쪽도 안 될 그림책을 보고 또 보고 시간이 지나 또 펼치지만, 글이 더 많은 어른 대상의 도서에서는 그런 경험이 더 적다. 갈증을 느끼고 갑갑할 때도 있다. 그림책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글자 수로 치면 비교할 것도 못 되지만 여백과 함축은 내게 와서 큰 이미지 세계를 만들어냈다. 글과 그림이 합하여 만들어내는 세계에서 나는 자유로웠고 많은 것을 쭉쭉 흡수했다. 평면인 종이의 한계를 벗어나 너울너울 춤추는 그림책을 보고 또 보고 천천히 책장을 넘기며 여백, 함축, 깊이를 음미했다. 그림책의 여백을 채우고 주석을 만들어가는 일은 나를 이해하고 내 이야기를 길어올리는 과정이었다.     

이전 14화 당신들의 유토피아, 우리들의 터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