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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퀄리브리엄」을 언제 처음 보았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지금보다 많이 어렸다. 최고의 요원 존 역을 맡은 크리스천 베일의 액션이 대단히 깔끔해서 눈을 떼지 못하고 봤다. 각이 잡힌 제복을 입고 흐트러짐 하나 없이 사방으로 총을 쏘았다. 액션의 파괴력이 엄청나서 나라 하나도 전복시킬 정도였다. 실제로 영화에서도 독재 체제 하나를 전복시켰다.
그 인상 깊은 영화를 얼마 전에 다시 보았다. 자신의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드는 데에 전념하던 인물 존이 그 세상의 디스토피아 면모를 새삼 깨닫는다. 철통같던 존이 매일 먹던 감정조절약을 먹지 못한 날, 존의 감정에 틈이 생겼다. 그 사이에 시와 연애감정이 들어왔다. 부인이 잡혀갈 때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던 사람이 약을 끊자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 영화도 그렇고 대표적 디스토피아 소설이라 하는 『1984』와 『우리들』에서도 연애는 큰 사건이다. 개인은 소외되고 개성은 말살되고 부모와 자식 관계를 부정하는 전체주의 체제에서 연애는 사랑을 경험할 드문 기회이다. 연애는 감정과 생활을 공유하는 깊고 내밀한 인간관계이다. 소설 속 전체주의 사회에서 사람은 주어진 대로 살아갈 뿐 선택할 것이 없다. 그곳에서 연애는 거의 유일하게 자발적 선택이자 행동이다. 또한 주인공들의 감춰진 생각과 감정을 드러나게 하며 그렇기에 이들을 파멸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1984』에 등장하는 사회에서는 사랑과 연애가 철저하게 통제된다. 결혼생활과 부부관계는 당을 위한 것이라 세뇌하며, 연인들은 당의 감시를 피해서 데이트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덜 잔인해 보이는 『멋진 신세계』도 연애는 권하지 않는다. 섹스와 일회성 만남은 수두룩하나 한 사람과의 만남이 이어지면 질타한다. ‘유대감’과 ‘사이’가 형성되는 것을 차단해버린다.
연애에는 두 가지 중요한 면이 있는데, 욕구와 신뢰의 감정이다. 성적 이끌림에서 만남을 시작하여도 여유로운 분위기의 사회라면 연애의 주체가 되는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가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데에 충분한 시간과 과정을 거칠 수 있다. 그로써 믿음이 형성되는 사랑으로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앞의 소설들에서 이 과정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들』에서 보면, D-503과 I-330(이하 D, I)의 만남은 D에게 내재한, 그러나 D도 확실히 알아차리지 못했던 본능과 감정을 이용하여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I의 시도에서 시작됐다. I에 대한 D의 감정은 혼란스럽고 강렬했고 충실했다. 그의 삶 자체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그들에게 시간이 더 있었다면 그들은 더 자유롭고 더 불온하며 더 강력한 연인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지 못했다. 서로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거나 그로써 서로를 믿는 수준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D는 연애로써 자신의 벽을 깰 경계까지 이르렀으나 결국은 장벽 안으로 다시 들어온다. D는 체제의 세뇌를 벗어나지 못했다. D-503과 I-330. 서로에게 집중할 여유가 없는 남녀 사이는 욕정과 혼란과 비극으로 끝났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짓눌리는 연애를 보며 역으로 연애가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역할, 사회에 퍼뜨리는 파장이 얼마만큼이나 전복적인지 궁금해졌다. 근대만 하여도 동아시아에는 연애라는 단어조차 없었는데, 지금은 연애가 강박에 가까울 정도여서 연애 저항감마저 나타난다. 근대의 작가들이 주목하던 연애가 이렇게 경박했을까. 그들이 생각하는 연애, 이상적으로 꼽는 연애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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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중 「연애인 것을 깨닫자마자」는 일제강점기의 경성을 배경으로 한다. 이 단편소설의 지식인들은 쿠리야가와 하꾸손의 근대의 연애관을 언급하며, ‘오직 연애에 의해 결합된 성적 생활만이 영구 평화의 세계, 계급투쟁이 없는 사회와 나란히 개조의 3대 이상이라고 하지 않았던가?’라고 한다.
여기에서 언급된 연애관은 『근대 일본의 연애관』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본이 나와 있다. 구리야가와 교수는 책 초반부에서 ‘연애’라는 단어가 그 시절 일본에 있지도 않은 단어라는 점부터 밝힌다. 개념이 없기 때문에 단어도 없었다며, 근대 발명품이라 할 연애를 탐구하고 이상사회의 조건으로 연애를 말한다.
그가 지향하는 연애는 영육일치로, 성적 끌림에서 시작하여 인격적․정신적으로 결합하는 단계로 이어진다. 그렇지 않은 연애는 연애가 아니다. 더 나아가 재산을 보고 결혼하거나 집안 간의 맞선결혼을 맹렬하게 비판한다. 인간으로서 올바르지 않으며 생활을 파괴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 에세이에서 그의 분석은 여성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다. 연애는 남자보다 여자, ‘부인’에게 더 중요하다는데, 전근대적 결혼 제도에서 여자가 독립된 인격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처지를 알기 때문이다. ‘부인은 노예가 아니고 자유로운 인격’이며, 여성이야말로 진정한 연애로 결혼생활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대로 된 연애는 인격 대 인격의 만남이며 개성의 인정이다. 그가 정의하는 연애는, 여성이 자신을 해방하는, 그 자신으로 오롯이 존중받는 장場이다.
구리야가와의 기준을 만족하는 연애란 절제되어 있고 순결하다. 자유연애라는 말에서 오해할 수 있는 분방함이나 문란함을 그는 용납하지 않는다. 부인들이 존중받고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하지만 부인들의 편만 들지도 않는다. 경제력은 남편에게 의지하면서 연애만 자유롭게 하려는 태도를 비판한다.
연애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 인정받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주장에는 매우 감화를 받았지만 그의 모든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100년 전 과거라 하여도, 진보적 연애관과 여성을 존중하자는 외침에 비해 여성의 능력과 다양성에 대한 상상은 빈약하다. 자신의 연애관이 이상적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연애의 사회적 기능을 부각시키는데, 그러면서 연애는 여성이 진심에서 우러나와 가사와 육아에 임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순환논리처럼, 이 주장을 여성 존중의 연애를 외치는 근거로 쓴다. 때로 그가 말하는 연애를 통한 자아해방이나 큰 자아를 향해 간다는 주장은 거창하고 거룩하여 일상의 연애에서 동떨어진 느낌도 든다.
그러나 연애에 대한 의문 제기와 탐구도 여전히 완료되지 않았기에 지난 시대의 주장이라고 외면할 수도, 책을 바로 덮을 수도 없었다. 그가 말한 여성의 처지나 결혼에 대한 인식은 지금이라고 완전히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에 따르면 연애는 인간이 자유로워지고 존중받는, 지고하고 지대한 차원의 사건이다. 하나의 인격이 인격 그대로, 개성 그대로 존중되고 그 또한 상대를 그렇게 존중하는 것이 연애이다. 생활에 이러한 감정이 움트고 사회 전반으로도 자리 잡는다면, 분명 사회 분위기가 온화해지고 갈등도 줄어들 것 같다. 그렇다면 연애가 충효나 사회와 충돌할 이유가 없는데도 그때나 지금이나 일과 학업 때문에, 부모 때문에, 경제적 여력 때문에 연애를 포기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 이는 그 시대 생활에 커다란 결함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연애와 여러 외부 조건은 충돌하는 패턴은 비슷하다. 그때와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아서, 그의 지적은 지금도 가볍게 넘길 수가 없다.
지금은 구리야가와 교수의 시대보다 안정되었지만 그가 말한 이상적 사회 정도는 아니다. 지금도 세계 평화를 이루지 못했고 민주주의는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는 듯 불안하게 뒤뚱거린다. 그가 생활목표로 제시한 연애는 어떨까. 자유연애라는 말이 따로 필요 없는 시대이건만, 연애 권하는 분위기에 시달리다 못해 연애하지 않겠다는 이들도 등장한다. 연애지상과 연애거부가 공존하고 연애 이야기가 판을 친다. 연애에 대한 수많은 담론, 경험담, 조언이 널려 있다. 하지만 그만큼 서로를 존중하는 진정한 연애의 분위기가 조성된 사회인지는 모르겠다. 여전히 연애를 결혼의 전단계로만 보는 이들은 연애에서 결혼으로 이어져야 도덕적으로 부합된다고 주장한다. 연애든 결혼이든, 전근대에서 살짝 변주했을지는 몰라도 그 시절의 관념이 사라지지도, 산뜻하게 바뀌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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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에 정답이 있을까.
정답이나 완벽은 연애에 어울리지 않는 목표라고 생각한다. 사람 사이는 정답을 정해 놓기보다 서로 성장하고 변화하며 나아가는 편이 적당하리라는 판단 때문이다. 연애 역시 세상살이의 하나이므로 어른과 주변인의 조언이 힘이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연애에 세상의 힘이, 외부의 힘이 너무 많이 개입되지 않기를 바란다. 누군가 판단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할 여유가 뒷받침되는 편이 더 좋겠다.
좋아하는 마음과 사랑을 말하는 그림책은 여럿이다. 『사랑에 빠진 개구리』, 『레오 판더』가 있다. ‘가부와 메이 이야기’는 우정 이야기라고들 하지만 내게는 사랑 이야기로 읽힌다. 나와 다른 존재를 만나 느끼는 끌림, 당혹스러움, 용기, 환희 등을 책 속 캐릭터들은 제 나름의 방법으로 펼쳐내고 있다.
『사랑에 빠진 개구리』에서 초록색 개구리는 자신의 상태가 평소와 달라서 당혹스럽다. 감기 걸린 것도 같고 심장은 쿵쿵 뛴다. 토끼가 그건 사랑에 빠진 거라고 알려 주자, 개구리는 이 근사한 감정에 휩싸인 게 기뻤다. 개구리는 하얀 오리를 사랑한다. 하지만 자기 마음을 확인하고도 오리에게 말하지 못한다. 개구리는 오리에게 멋진 모습을 보이려고 점프 연습을 하다 그만 땅으로 떨어지고 만다. 가엾은 개구리…. 그런데 이것이 기회가 되어 개구리는 오리와 함께 있게 되고 오리에게 고백도 한다.
사랑에 대해 충분히 안도감을 줄 책이다. 사랑을 이루는 기쁨과 더불어 자신이 모르던 감정을 겪는 개구리의 어리둥절하고 혼란스러운 마음, 즉 사랑의 기쁨뿐 아니라 불안, 어색함이라는 양면을 담고 있다. 이 점은, 사랑을 환희로운 감정이라고만 착각하거나 설명하려 드는 이들이 눈여겨보면 좋겠다. 이 점은 다른 책에서도 볼 수 있다. 『흰 토끼 검은 토끼』는 고전적 사랑의 전형이다. 서로 좋아하고, 그 결말이 결혼에 이른다. 안정적 스토리임에도 사랑을 이루어가는 과정에는 왠지 모를 서글픔과 조바심이 나타난다. 지금은 절판 상태이나 사랑에 빠져드는 과정이 더 절절히 드러난 『레오판더』도 있다. 이 책에서도 사랑은 마냥 환희롭지 않다. 서로를 알고 다른 모습을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둘의 사랑이 결혼에 이르든, 꼭 결혼이 아니든, 책임감이 따른다. 겁이 많고 미숙한 표범 브루노가 좋아하는 리자를 위해 강해지기로 했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 책임감은 상대에 대한 책임감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감에도 이른다.
『사랑에 빠진 개구리』는 사랑의 과정뿐 아니라 누구를, 또는 어떤 존재를 사랑했느냐는 점에서도 다시 보고 기억할 이야기이다. 초록색 개구리는 하얀 오리를 좋아한다. 돼지는 어떻게 초록색 개구리가 하얀 오리를 사랑할 수 있냐고 하지만 개구리에게 색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건 오리에게도 그랬다. ‘색이 다르다’는 여러 가지를 의미하는데 결국은 나와 다른 존재이다. 개구리와 오리가 사랑에 빠지고, 낮에 활동하는 표범 브루노와 밤에 활동하는 표범 리자가 서로를 몹시 좋아한다. 그림책에서야 다 되는 일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나 그림책에서만 보여주는 설정이 아니다. 현실에서 우리도 그렇다. 우리도 다른 존재와 사랑에 빠진다. 다르지만 또 같은 점을 공유하는 존재, 같지만 알아가다 보면 다른 점을 지닌 존재이다. 우리도 우리와 다른 존재를 만나 열심히 좋아하고 미워하고 외부의 간섭을 이겨 나가거나 외부의 도움을 받고 때로는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며 서로의 곁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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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존재와 만나 느끼는 호감, 위태로운 감정마저 사랑에 빠진 사람의 설렘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던 그림책이 있다. ‘가부와 메이 이야기’ 시리즈이다. 늑대 가부와 염소 메이가 폭풍우 치는 밤에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로 만나 친해진다. 생태계에서 포식자와 먹이라는 차이에도 서로가 너무 마음에 들었지만 세상은 달랐다. 두 비밀 친구의 이야기가 7권까지 이어진다.
이 시리즈의 첫 권 『폭풍우 치는 밤에』를 읽었을 때 느낀 것은 누군가를 처음 좋아할 때의 설렘과 강렬함이었다. 가장 먼저 튀어나온 감상도 ‘이게 무슨 우정이야?’였다. 한참 뒤에 시리즈의 마지막 권을 보았을 때도 같은 생각을 했다. 사랑이라고 해도 어울릴 기쁨과 책임이 가부와 메이 사이에는 있다. 때로 가부는 포식자라는 타고난 본능을 숨기지 못한다. 태생부터 다른 데서 오해가 생기기는 해도 가부와 메이는 서로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비밀을 유지하며 만남을 이어가는 데서 오는 스릴과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외면하려 했으나 우연한 포옹에 서로의 경계가 무너지는 모습은 무척이나 드라마틱하다. 여기에 거칠고 박진감 넘치는 그림이 이 드라마에 강렬함을 더한다.
현대 사회에서 연애는 자유이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계급과 돈에 상관없이 상대를 만나 사회적 기준에 휘둘리지 않는 연애를 할까? 살며 쌓아온 겹겹의 많은 기준이 상대에게 향하고, 그것은 주변에서 잣대를 들이대기 전에 연애 당사자가 스스로 행한다. 말은 자유연애이나 이 자유의 수면 밑에는 정교하고 복합적인 기준이 작용한다. 이미 사람들은 살아오며 자신이 경험한, 자신을 둘러싼 사회의 재력, 계급 등 모든 기준을 장착하고 내재한 채 상대를 만나고 상대를 판단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경험한 바로 사람들은 ‘끼리끼리’가 제일 낫다고 말들을 한다.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슷한 환경의 사람들끼리 만나는 것이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기에 좋을 것이라는 기대는 당연하다. 이렇게 시작해도 다름을 경험하고 또 그 안에서 비슷한 점을 공유하거나 어떤 점은 비슷해진다. 연애는 상대를 받아들이는 과정이지만 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런 시선에서 보면, 조건을 따지고 시작한다고 해서 사랑이 불결해지는 것도 아니고 상대의 환경과 조건을 하나도 따지지 않는다고 해서 순수한 연애라고 말할 수는 없다. 조건을 따지지 않는 사랑만이 순수하다고 여긴다면, 그 순수한 연애를 달성한 예 중 하나는 앞서 말한 『1984』나 「이퀄리브리엄」 속의 연애이다. 나이도, 계급도 따지지 않았다. 개인 대 개인으로 마주하고, 서로의 끌림만이 있었다. 눈빛만으로 서로를 알아챘고 조건을 따지지 않는 연애였으며 서로에게 바라는 것도 없었다. 그러나 실상은 어땠는가. 그곳은 조건을 따질 수도 없을 만큼 단절된 사회였다. 연애의 가능성이 차단된 사회였다. 그들의 연애는 늘 비밀스러워야 했고 결국 연애 때문에 그들은 완전히 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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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연애가 있을까 한다. 둘 사이의 유대감을 만드는 것만도 쉽지 않다. 서로 눈을 마주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 그 사람과 마주 앉게 되고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는 과정은 짜릿하나 핀트 하나만 어긋나도 가슴을 졸인다. 만남을 시작하였다고 하여도 그의 모습에 비춘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소침해지고 나의 생각에 비춘 그의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아 퉁명스러워진다. 내 안에서도 갈등하고 둘 사이에서도 갈등하는데, 외부의 간섭까지 드리운다. 친구든, 가족이든, 외부의 평가와 압력이 버겁다. 그 연애하자고 투쟁을 벌이는 나를 본다. 그 투쟁이 힘겨워 그만할까 싶은 순간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연애’로 엮인 사이에 대한 가능성을 저버리지는 않는다. 정이라고 할지도 모르나 내가 진단하는 것은 좀 다르다. 가능성이다. 연인 사이에 대한 가능성.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고 얼마나 힘이 될지에 대한 가능성 말이다. 서로 아끼는 사이이고 사랑에 노력이 필요함을 아는 두 사람이라면, 시간이 양분으로 쌓일 것이고 시간이 양분으로 쌓일 때 서로에게 얼마나 든든한 온기가 될지를 기대하는 것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을 억지로 만들 수는 없다. 연애에서 노력이란 그런 부분이 아니라, 서로의 어떤 언어 때문에 감정의 소통이 막혔는지, 아니면 서로를 위한다고 한 점이 오히려 서로의 소통을 막은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고 소통을 하려는 노력을 말한다. 연애는 그림책다우면 좋겠다. 상대를 존중하고 알아가고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순수히 받아들이려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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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하게도 연애 권하는 사회이고 매스컴은 연애로 도배를 하지만, 연애를 가장한 이벤트에 끌려가고 있지는 않은가. 폭력이라는 잘못된 방식, 자본주의의 지독한 개입, 미숙한 연애의 답습을 ‘연애는 원래 그러니까’라며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 그 연애의 한계, 폐해, 즐겁지 않음을 연애의 과정이라며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이지는 않는가. 아무 저항 없고 아무 투쟁 없고 아무 성찰 없이.
구리야가와는 연애가 기반이 되는 세계 개조를 이상 사회의 모습으로 제시했다. 연애라는 교감도 쉽지 않거니와, 데이트 비용이 부담스러워 연애할 수 없는 실업자 시절을 겪었던 나로서는, 현실의 연애도 이런데 그 연애로 세계까지 변혁하려는 구리야가와의 연애관이 거창해 보인다. 그러나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연애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는 기대한다. 연애하는 마음이 세상을 온유하게 이끌 만한 힘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세계를 평화롭고 즐겁게 하는 가장 온화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정치나 통치세력이 주도하는 시스템 개조로는 해내지 못하는, 개인에게서 발현되는 힘이자 자유이자 유연함일 테니 말이다.
사회의 수준을 가늠하는 지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여기에 ‘연애 건강도’를 지표로 넣어도 어울릴 것 같다. 아마 사회의 여러 면을 생각해 보게 할 것이다. 연애하지 않더라도 동시대인으로 느끼는 점, 주변에서 얼마나 연애를 강요하거나 반대로 연애를 쓸모없는 치기로 보는지는 얼마든지 답을 할 수 있다. 쓸데없는 제약을 받지 않고 건강하게 연애할 수 있다는 말은, 단순히 남녀 간의 만남이 쉬운가, 아닌가를 넘어선다. 그 사회의 연애가 건강한지 아닌지를 파악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편견, 사회 계급과 부의 자유로운 이동, 이성과 타인에 대한 존중, 시민의 기본 매너, 성 역할이 고정되었는지 아닌지 등 많은 것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