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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작가 토미 웅게러는 사람들 머릿속 깊숙이 들어앉아 있는 편견을 무심히 도발한다. 퇴역한 공무원 라신 아저씨는 자기의 보물 같은 배를 먹은 괴물을 잡으려다 괴물과 친해져서는 괴물에게 줄 아이스크림을 사고 같이 놀 시간을 기다리고(『라신 아저씨와 괴물』), 보아 뱀이 할머니의 온순한 가족이자 상냥한 이웃이 되고(『크릭터』), 사람들을 위협해서 돈을 뺐던 세 강도가 그 돈을 쓰려고 버려지고 학대받는 아이들을 데려와 키운다(『세 강도』). 변종 캐릭터, 강도, 요상한 마법이 등장하고 그림은 때로 기괴하다. 혼란스러운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혼란을 따라가다 보면 지극히도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마을 또는 공동체에 이른다. 그 사회의 인습과 경계보다 존재를 우선하는 따스한 마음이 그의 작품에는 깔린다.
그의 작품에는 악당도 변종도 고정되어 있지 않는다. 악당은 악당의 특징과 재산을, 변종은 변종의 특징과 능력을 십분발휘하여 남을 돕고 자신을 즐기며 사랑받고 건강하게 살아간다. 인간 대 인간으로, 한 존재 대 존재로, 각 존재가 그때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줄 수 있는 것을 준다. 사회의 편견과 인습에 시달린 존재를 구하는 건 유능한 법과 제도가 아니라 마음과 자리를 내어주는 이웃들이다. 그럼으로써 온전히 성장한 주인공은 이웃에게 다시 도움을 주고, 이렇게 어우러지며 그들의 터전을 따뜻하고 돈독히 만들어간다. 존재 본연의 자아실현과 서로의 연대가 어우러진다.
옛이야기 「브레멘의 악대」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쓸모없다며 쫓겨난 네 동물이 브레멘 악대에 참여하려고 길을 떠난다. 가는 길에 도둑들 몇 명이 잔치를 벌이는 집을 지나게 되고 네 동물은 도둑들을 내쫓고 그 집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림책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의 시작은 이 이야기와 같다. 네 동물이 일하던 곳에서 쫓겨나 어디론가 떠난다. 그들도 불이 환히 켜진 집을 보았고 그 집에는 복면악당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집 안을 들여다보니… 잔치는커녕 세간살이도 없고 악당 넷이 한탄의 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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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에서는 동화 브레멘 악대처럼 선한 네 명 대 악당 네 명으로 대립구조를 띤다. 당나귀, 개, 고양이, 닭 vs 복면악당 네 명. 그런데 이 여덟 존재에게 쓸쓸한 공통점이 있다. 이들 중 인정받는 존재는 하나도 없다. 일꾼이었던 네 동물은 해고되었고 복면악당 네 명은 악당으로서 쓸모가 없단다. 택시기사 당나귀 씨는 나이가 많아 해고되고 식당에서 일하는 바둑이 씨는 일터 이전으로 해고된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야옹이 씨는 험상궂은 얼굴 때문에 해고되고 꼬꼬댁 씨는 길거리에서 자판을 벌여 두부를 팔다 접게 되었으니 고용된 적도 없이 쫓겨났다. 이들과 같은 도시에 있던 복면악당 네 명은 검은 복면을 쓰기는 했는데 무엇을 하는지 잘 알 수가 없다. 도시를 어슬렁거릴 뿐이다.
일터에서 쫓겨난 네 동물이 지하철을 탄다. 아마도 전철 노선의 맨 마지막 역에서 내린 모양이다. 계단을 오르고 올라 달동네 길을 걷다 악당 넷이 있는 집을 지나며 악당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그런데 악당의 못된 대화란 없고 자신들과 똑같은 처지의 초라한 동료가 있을 뿐이었다. 못된 짓도 쉽지 않고 보스는 이들에게 멍청하다고 하고 너무 늙었다고 한다. 네 동물이나 네 악당이나 서로의 일과 자리만 달랐을 뿐, 해고된 이유는 비슷하다. 열심히 산 이도, 거짓으로 살려던 이도, 쫓겨나기는 마찬가지였다.
네 동물은 문을 두드리고 한 말에 악당들이 말한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열심히 살았는데도 할 일이 없어졌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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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책에서는 두 가지의 옛이야기의 구조를 찾을 수 있다. 「브레멘의 악대」와 「돌멩이 수프」이다.
처음 패러디된 이야기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그림 형제의 「브레멘의 악대」이다. 옛이야기와 그림책은 당나귀, 개, 고양이, 닭이 해고되어 길을 나서고 악당의 집에 도달하여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는 것까지는 같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전혀 다른 전개가 펼쳐진다. 네 동물이 악당들을 쫓아내는 대신, 서로의 처지에 동질감을 느낀다. 양지에서 일한 동물 넷과 음지에서 일한 인간 넷이 시무룩하게 한 장소에 앉아 있다. 쫓겨난 자이며 찾지 않는 자라는 점에서는 동료였다.
정당히 일하며 살았어도, 도둑질하며 살았어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해고되거나 일을 그만두어야 할 때 다른 직장으로 금방 이직하거나 직종을 바꿔 생계를 이어나가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자아실현이란 생의 한 과정이 아니라 사치인지도 모른다. 사회에서 안정된 계층에 속해 있지 않거나 축적된 부가 없다면 삶은 삐끗 하는 순간에도 벼랑 끝에 내몰리고 만다.
다음 장면으로 넘기자 이들의 꾸부정한 뒷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제 뭐하냐는 물음에 답한다.
일단 밥이나 먹을까요?
허망함에 잠시 멈추었던 삶이 다시 시작된다. 여기에서 두 번째 옛이야기의 구성이 이어진다. 「돌멩이 수프」다. 네 동물과 네 인간은 각자의 짐에서 먹을거리를 꺼내어 맛나고 푸짐한 식사를 마련한다.
꼬꼬댁 씨가 다 못 팔고 남은 두부, 야옹이 씨가 편의점에서 가득 가져온, 판매기한이 지났을 삼각김밥, 바둑이 씨가 식당에서 해고되며 받은 김치 한 통, 당나귀 씨의 동료들이 당나귀 씨를 보내며 건넨 참치세트. 악당들은 도구를 준비한다. 큰 냄비, 휴대용 가스레인지, 수저(식당에서 정리하는 것을 가져왔을까, 수저는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가), 조리에 필요는 없지만 뭐든 보태고 싶어 양초도 꺼낸다. 한쪽에서는 참치김치찌개를 한가득 끓이고 한쪽에서는 상을 차린다. 야옹이 씨는 공기밥을 대신할 삼각김밥을 주섬주섬 꺼낸다.
모여 앉아 푸짐히 밥을 먹다가, 한 명이 상상을 시작한다. 아주 조심스럽게 상상을 내놓는다.
만약에, 만약에, 오늘처럼 이 재료들을 한 냄비에 집어넣고 푹푹 끓여 한 끼의 식사를 파는 가게를 한다면, 만약에 말이야, 그러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말한다. 바쁘게 일을 하고 저녁이 되면 청소하고, 조리대를 닦아 놓고, 다음 날 재료를 꺼내고, 정산을 하고, 쓰레기를 모아 문밖에 내놓으면 하루를 마치는, 그런 하루는 어떨까.
상상은 금방 현실로 돌아온다. 화면을 가득 채운 흥겹던 가게 장면과 달리 화면은 한 면으로 축소되고 여덟 친구들의 그 화면에서도 한쪽에 치우쳐 있다. 가게를 상상할 때의 기대와 즐거움은 바람 꺼진 듯 줄어들고 정적인 풍경으로 바뀌어 버렸다. 갑자기 서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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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결말일 수도 있다. 그저 지친 자들의 밥 한 끼의 추억으로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게 결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냐면 맞다. 그리고 작가가 뒷면지에 빼곡히 그려준 그림에서 나는 다시 기대를 품는다.
그들이 가게를 하나 하면 얼마나 좋을까. 가게는 곧잘 사람냄새 나는 따뜻한 곳으로 그려진다. 그 또한 판타지가 한 겹 끼어 있을 수 있으나, 어느 정도 가능하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모여 누구나 해야 하는 ‘밥먹기’를 하는 곳이다. 따뜻한 국물을 한 숟가락 떠 넣으면 마음까지 누그러진다. 찌개에 밥을 비벼 슥슥 먹고 나면 몸에는 온기가 돌고 한 끼 제대로 먹었다는 만족감에 힘이 난다.
크기도 않은 가게에 네 동물, 네 악당이 매달리니 한 사람이 가져가는 몫은 적겠지만 그렇게라도 이 불안한 시간에 위안을 받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만큼만 해도 다행이다. 작가에게 감사한다. 이들에게는 동료가 생겼고 해야 할 일이 생겼다. 계단을 오르고 올라야 도착하는 이 높고 세련되지 않은 동네에 그들의 터전을 만들 수 있으리라 애써 믿는다.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일하는 모습은 다르다. 가게를 상상하는 장면에서 야옹이 씨의 모습을 보라. 정중히 손님을 대하는 모습은 편의점에서 일할 때와는 확실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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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읽고 결말을 알고 나면 앞장면을 다시 보아도 마음을 조금은 내려놓게 된다. 네 동물과 네 악당, 여덟 친구가 드디어 한 장소에 다 모이는 순간, 그런데 누구라 할 것도 없이 다 서러운 여덟 친구가 축 처져 있는 모습을 다시 보니 웃음이 풋 나온다. 서로가 연합할 것을 알지 못하니 할 것이라고는 시무룩해지는 것뿐인 못난 얼굴들. 아… 못난이들. 그런데 참 마음이 아리다.
더 씁쓸한 것은 한계가 뚜렷한 사회이다. 해고에는 이유가 있었다. 고연령층의 운전 위험성은 사회 이슈가 된 지 오래이다. 매장 판매직의 태도, 미소는 그보다 더 예민하고 일상적 이슈이다. 점원에게 기본 업무 이상의 미소, 상냥함, 업무 외의 시간을 자신에게 요구하는 소비자가 있다면, 그것은 판매나 매장관리 업무를 오해하는 것이 맞다. 손님 응대가 1순위이지만 매장 직원은 그 외에도 할 일이 많다. 각 매장의 생산과 운영 방식에 따라 손님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할 때도 있다. 손님의 응대를 ‘모두’ 들어주는 것은 가게 점원의 의무도 아니고 손님의 권리도 아니다.
반대로, 계산만 잘하고 물건만 잘 담아 주면 되지 표정이 험상궂고 말투가 퉁명스러운 것을 왜 따지냐, 가게 사장이나 손님이 야옹이 직원에게 쓸데없는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한다면, 이렇게 상상해 보자. 매장이 아니라 사무실이다. 당신과 함께 일하는 동료는 늘 화난 표정에 인사도, 대답도 없다. 가끔 짜증난다며 소리를 지르고 물건도 탕탕 내리친다. 매장이 아니고 사무실이니까 괜찮은가? 인사와 설명, 어느 정도의 소통과 공감의 표시는 사무직이든, 현장직이든, 어느 직종이건 기본 매너이고 필수이며 예절이다. 기분 나쁘다고 사무실이 떠나가도록 동료와 상사를 탓하거나 대답도 안 하는 게 받아들여지는 직종은 없다. 나는 편집일을 멈추고 가게에서 일한 지 5년이 넘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내가 한 생각은 변함이 없다. 가게 직원이 배울 것은 서비스 교육이라는 명목의 멘트 학습보다 제품에 대한 이해와 기본 예의이다. 특히 예의. 그런데 이것은 직원에게만 필요한 태도가 아니다. 가게 일꾼뿐 아니라 손님도, 길 가는 사람도, 그러니까 아주 많은 사람이 인간에 대한 예의를 더 배우고 익히면 좋겠다고, 일하면서도, 뉴스를 보면서도 생각한다. 타인을 귀하게 여기고 자신의 삶도 귀하게 여기면 좋겠다.
야옹이 씨의 해고가 당연하다는 게 아니다. 성실한데도 나이 때문에 해고되는 당나귀 씨의 상황이 안타깝다. 가게 이전 때문에 멍멍이 씨를 두고 가는 건 가혹하다. 하지만 이전한 가게가 멍멍이 씨가 출퇴근 가능한 거리일까, 그렇다고 가게에서 숙식을 제공하거나 집을 마련해 줄까? 아니라는 것을, 그렇게는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꼬꼬댁 씨에 대해서도, 그 작은 장사를 꼭 그렇게 금지해야 하냐고 하겠으나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발치에 놓인 두부는 밟힐 듯 말 듯 아슬아슬하다. 무엇보다 먼지에 무방비하다.
그래도 나름의 방식으로 도시에 참여하고 있었으나 더는 그리하지 못하고 떠나가는 장면은 참 쓸쓸하다. 인파에 끼지 못하고 떠나가는 꼬꼬댁 씨는 몸집보다 그림자가 더 크다. 떠나는 자뿐 아니라 오래 함께한 동료를 떠나보내는 동료도 마음이 아프다. 이 쓸쓸한 이야기는 사회 구조의 모순이나 시스템의 한계에서 오는 부분이 크고, 반대로 이 부분이 그 사회에서 개선하거나 감싸 안아야 할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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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덟 친구의 돌파구는 법이나 사회제도가 아닌 이웃, 그들과 함께하는 터전이었다. 그 터전을 만들기 위해 대출 시스템이나 창업지원제도가 도움을 주었을지도 모르나, 아닐 수도 있다. 이웃에서 안 쓰는 물건을 받아오고 빈약한 재산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신들의 터전을 꾸몄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말이다… 옛이야기에서도, 이 그림책에서도 브레멘에 도착한 이들은 없다. 정확히 말하면, 옛이야기에서 네 동물은 브레멘에 도착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브레멘에 꼭 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나이 들고 쓸모없다는 이유로 목숨을 위협받으니 집 또는 평생의 직장을 떠나야 했다. 목적지가 필요하니 당나귀는 그동안 상상해 왔던 어떤 곳, 브레멘을 떠올렸을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지금의 이 현실밖에 없는데 여기에서 밀려나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최대한 또 다른 장소, 또 다른 목표를 이정표 삼아 ‘다시 한 번!’을 외쳐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나 네 친구가 머무를 안락한 집이 생기자 네 동물 친구는 즉각 여행을 마쳤다. 네 친구는 그 집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계속 그 집에 살았다. 그들도 남의 집을 뺏기는 했으나 옛이야기에서도 그 비난을 피하고자 선한 자가 아니라 악당의 집을 뺏는 전개를 넣은 게 아닌가 한다.
그들이 원하는 건 이 정도의 터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대단한 음악 연주자를, 인정받는 가수를이루지 않아도 되었다. 평생을 함께해 온 주인에게 죽임당하지 않고 안락하고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집, 그들의 터전이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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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작지만 소박하고 따뜻한 이 터전을 꿈꾼다. 사람마다 삶의 방향과 생활 방식은 다양하되 보편적으로 안락함과 안정감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이다. 터전에 속하는 집이나 직장, 공동체는 나를 보호하고 내가 안전하게 머물며 생활을 꾸려 가는 데에 기본이 되는 조건이다. 정치인과 통치자들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터전에서 안락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며 시스템을 세우고 법을 개정하고 처벌을 강화한다. 하지만 그들이 부르짖는 유토피아가 우리의 유토피아가 되지 못하고 사각지대는 계속 사각지대로 남는다. 국민이 원해서 하는 일이라는데 때로 그 국민에 나는 포함되지 않나 싶고, 우리를 위한 유토피아가 아닌 것 같아서 갸우뚱해진다. 심지어 디스토피아로 바뀌지 않을까 하는 걱정하고 두려워한다. 그런데 이 불안함은 정치인이 아니라 시민의 몫이 되고는 한다.
「브레멘의 악대」 이야기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는 정반대이다.
유토피아를 만든다고 했던 돼지 나폴레옹은 폭력적이고 불합리한 유토피아를 만들고, 나머지 동물들은 더 가난하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혁명의 제일 공신이자 평생 동물농장을 위해 일한 말 복서는 도살장으로 끌려갔다.
이에 비해 노년의 평화를 스스로 획득한 「브레멘의 악대」의 네 동물은 획기적이고 대단하다. 주인에게 도살당하지 않기만을 바랐던 네 동물은 힘을 합치고 서로가 이웃이 되어 자신들이 살 터전을 만들어냈다. 사회적 제도에서 이루어진 결과가 아니니 혁명적 이야기는 될 수 없겠다. 그런데 나라가 나서서 전 사회적으로 이런 시스템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보다, 방해하거나 엉뚱하게 집을 뺏어가고 네 동물을 떨어뜨려 놓지나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더 간절히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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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그림은 지금껏 다루었던 그림책의 그림체보다 웹툰 스타일에 가깝다. 분할 화면과 한 펼침면을 통으로 쓰는 등 화면 사용이 자유롭다. 구도도 그렇다. 네 동물을 가까이에서, 멀리서, 때로는 드론의 시점처럼 지붕 위 높은 곳에서 포착한다. 배경으로 파스텔톤의 색을 택했으면서도 색의 사용은 점진적 변화 없이 간결하고 명확하다. 사물과 인물의 표현은 또렷하고 배경은 군더더기가 없다. 명암과 음영이 없고 동작이 유려하게 표현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단조롭다거나 디테일이 부족하다는 들지 않는다. 구도와 화면 분할을 여러 방식으로 연출해서 인물이 처한 상황과 감정을 영리하게 전달하며 선이 유려하지 않아도 동작의 핵심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그림 속 사람들의 동작은 도시의 현실 생활 모습과 그대로 겹친다. 소시민이 경험하는 도시의 일상적 풍경을 제대로 포착했다는 점에서도 이 그림책은 의미가 있다. 배경으로 등장하는 장소와 소품은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으며 우리도 살고 있는 바로 그곳에 우리의 주인공들이 친숙하게 끼어 있다.
이 책은 본문을 시작하기 전의 앞면지, 본문이 끝난 뒤의 뒷면지가 중요하다. 이야기를 알고 보면 앞면지에 모든 등장인물과 그들의 직장이 나온다. 더불어 절찬상영 중인 브레멘 공연 전광판도 있다. 도로 안내판을 보면 브레멘까지 500m밖에 안 된다. 그런데 앞으로의 해고를 예고하듯 앞면지의 도시 풍경은 단색에 생기가 없다.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각자 일만 할뿐 교류도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가장 밝고 희망적인 장면을 뒷면지에 배치했는데, 본문을 읽었을 때는 실제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미래인데다 여덟 등장인물과 한편의 독자들의 바람이니 번외편처럼 등장하기에도 괜찮은 장면이다. 장난치는 인물도 있고 이웃과의 교류도 있고 스스로 일을 하고 있어서 활기차다. 앞면지와는 달리 뒷면지의 장면은 색을 입은 생생한 세상에 유머와 즐거움이 스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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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그림책에서 여덟 친구가 밥을 먹고 있는 장면을 좋아한다.
이 장면을 보면 안도감이 든다. 이야기 내내 지속된 서글픔과 안타까움이 누그러진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하나씩 내놓고 밥 한 끼 만드는 사이, 서로가 서로의 동료가 되었다. 자신의 악당 친구만 감싸던 팔이 어느새인가 꼬꼬댁 씨와 멍멍이 씨에게도 닿아 있다.
자신의 현재 능력을 쓸 수 있고 정당하게 보상받을 수 있다면 일단 희망은 있다. 당신에게 있는 참치캔, 판매기한 지난 삼각김밥, 젓가락, 양초까지, 하나로는 부족하거나 쓸 수 없던 재료가 이웃을 만나자 쓸모가 완성되고 빛이 난다.
“이제 뭐하지?”는 책 속 등장인물들만의 고민거리는 아니다.
나도 그렇다. 나의 브레멘이 어디인지도 모르겠다. 내 야망이 버거웠던 시절이 있다. 더 인정받고 싶어 소리 없이 발악하던 시절도 길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브레멘으로 가는 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무언가로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이 누그러졌다. 그러지 않아도 사랑받을 수 있고 부족하지 않음을 알게 되어서일 수 있다. 그런데 브레멘에 대한 미련은 그렇다 쳐도, 나의 작은 터전은 그렇지가 않다. 나는 그곳을 계속해서 그려 본다. 그 작은 터전이 나의 생활의 기반일 테니 꿈꾸기를 멈출 수가 없다. 브레멘에 못 간 친구들의 ‘오늘도 멋찌개’ 식당처럼 나의 가게를 차리고 손님들과 즐겁게 인사하고 지인들과 오순도순 정답게 지내는 모습도 그려 본다. 혼자 있는 시간이 다소 많이 필요한 사람이지만, 가게에 잘 들리는 손님들처럼 너무 빨리 친해지지 않고 조금은 거리를 두고 좋은 에너지를 주고받는 사이라면 나는 꽤 많은 사람과 즐겁게 지낼 수 있다.
내가 글 쓰고 일하며 지내는 사이에도 몇 년이 지났다. 그 사이 세상은 온화해질 기미를 보여주지 않고 자꾸 극으로 치달았다. 작은 터전을 마련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세상은 원래 무섭고 포악한 면이 있기는 하다. 옛날은 옛날대로 그랬다. 그렇다고 그 포악함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지도 않고, 익숙해질 것도 아니다. 그냥 기다리면 될까, 그러면 알아서 좋은 시기가 올까?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타인을 잠재적 범죄자가 아닌 잠재된 이웃으로 여길 수 있으면 좋겠다. 저기에 내 이웃이 있다는 생각으로 든든해지는 정도라면 말이다, 각자의 터전을 갖추고 살 여건이 뒷받침되고 그 터전에서 개인으로 살아가되 기분 좋은 이웃으로 만날 수 있다면, 그러면, 그 정도면 다들 살 만한 세상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