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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시스의 그림책은 장소에 예민한 감각을 보인다. 그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레이어가 쌓인 듯한 중첩된 깊이감, 기억 속 장소에 대한 극도로 예민한 감각과 현실인지 비현실인지를 넘나들고, 중세인지 현재인지 시대 구분을 묘연하게 하는 그로테스크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장소가 이야기의 무대이자 중요한 소재가 되는 『티베트』와 『세 개의 황금열쇠』가 특히 그렇다. 신비하고 기괴하다.
피터 시스는 표현뿐 아니라 주제도 독보적인 작가이다. 그가 체코 프라하 출신이고 30대에 미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철의 장막 체제를 겪었다. 피터 시스는 그 안에서 예술가로 지냈고 그 체제를 벗어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기에 말할 수 있는 경험을 몇 권의 그림책에 풀어놓았다. 『장벽』과 『세 개의 황금열쇠』는 그의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의 프라하를, 『티베트』는 그의 아버지 블라디미르 시스가 티베트에 영화를 찍으러 갔다 행방불명되었다 다시 돌아오는데, 그 사이의 일을 그린 책이다. 이중 『장벽』은 그의 다른 장소 그림책보다 그림의 표현은 단순하지만 내용은 그렇지가 않다. 읽다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장벽과 장벽 안의 전체주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피터 시스의 『장벽』에서 시작된 책과 생각의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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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시스는 1949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산진영에 속했고, 그가 경험한 철의 장막 안의 세상과 장벽 밖으로의 비상을 그린 책이 『장벽』이다. 철의 장막은 20세기 중후반 자유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냉전을 나타내는 말이자 공산주의 진영의 폐쇄성을 이르는 표현이었다. 철의 장막으로 둘러싸인 동유럽 사회는 장벽 밖으로 사람들이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고 비밀경찰이나 사상경찰이 사람들의 자유로운 활동뿐 아니라 사유까지 봉쇄하려 했다. 그 생활이 어떤 것인지, 전체주의 하에서 사람은 어떻게 자라고 사는가를 이 그림책에서 볼 수 있다. 피터 시스는 이미 만들어진 장벽 안에서 태어났다.
표지를 보면 아기가 막힌 별 모양의 장벽 안에서 북을 치고 있다. 아기는 해맑다. 이 아기에게 장벽은 없다. 장벽 안의 세계가 전부이다. 아기는 자기를 에워싼 장벽이 자신과 세상을 가로막고 있는지 모른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자 아이에게는 필수사항이 많아진다. 금지하는 것도 많아진다. 모두 똑같이 행동하고 시키는 대로 한다. 똑같이 생각하거나, 똑같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행동한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이가 탱크 그림을 그려 오자 부모는 표정이 굳는다. 그러나 부모에게 아이는 밀고자 같은 존재이기에 본심을 숨긴다. 이때까지도 아이에게 장벽은 장벽이 아니었다. 아이가 알고 있는 세계가 그러할 뿐이다. 그러므로 질문하지도 않는다. 세뇌된 대로 움직이고 명령을 답습하며 더 세뇌되어 간다.
“그러다 명령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서쪽에서 새로운 물결이 들어온다. 락음악, 비틀즈, 긴 머리, 화려한 색색의 옷, 모두 다른 개성, 그리고 싶은 그림, 시, 여행, 이곳 아닌 저곳을 꿈꿀 수 있는 자유! 피터 시스는 알렉산더 두브체크가 제1서기가 되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주장하던 1968년, 프라하의 봄을 눈부시게 표현한다. 공산주의 사회 묘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채로운 색과 자유로움, 꿈과 형상이 모여 있다. 그의 장벽 안 세계에 신선한 바람이 불어들고 청년은 설렘으로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꿈꾼다.
그러나 그해 8월, 소련은 체코에 대규모 침공을 감행한다. 프라하의 봄은 물러가고 철의 장막이 다시 내려온다. 세상은 다시 예전과 같아졌다. 아니, 봄을 경험한 청년에게는 더욱 가혹해졌다. ‘밀고, 고문, 불신, 이해할 수 없는 검열, 소문’이 일상을 뒤덮었다. 사생활의 범위는 줄어들고 개인을 내세울 수 있는 수단은 제한된다. 사상은 똑같아야 하고 누군가는 검열하고 있고 누군가는 몰래 엿보고 있으며 아무도 믿을 수 없기에 모두를 배신할 수 있는 곳, 또 다른 생각, 다른 외모로 튀면 안 되는 사회가 펼쳐진다.
피터 시스는 장벽 밖을 꿈꾼다. 어떻게 꿈을 꾸어도 잡힐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의 꿈은 이루어진다. 1984년, 만화영화를 만들려고 고국을 떠나 있던 그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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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국가들의 공산체제는 무너졌다. 소련을 구성하던 국가들은 하나하나의 국가로 독립했다. 피터 시스를 가로막던 철의 장막은 무너졌다. 1990년 전후의 일이니 이렇게 된 지도 30년이 지났다.
피터 시스는 그림책 후반부에서 한 화면을 두 세계로 나누어 말한다. 두 세계 사이에는 장벽이 있다. 장벽 한 편의 세계는 흑백이며 불의, 거짓말, 공포, 테러가 만연하다. 장벽의 또 다른 한 편의 세계는 장밋빛이며 해방, 진실, 신뢰, 지식, 평등, 영혼 등 인류가 추구할 이상적 개념이 차지하고 있다.
장벽 안에 살던 피터 시스는 말한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기대할 수 있을까?’
피터 시스는 더 나은 세상을 기대하며, 분명 더 나은 세상이기에 자신의 장벽을 넘어 장밋빛 세계로 왔다.
그런데 이 질문을 당신에게 한다면, 당신은 “예”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나요?
우리는 피터 시스가 말한 장벽 너머, 민주주의, 평화, 자유를 지향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이곳은 정말 장밋빛 사회일까, 한 번 장밋빛 사회는 영원불멸의 장밋빛 사회일까? 행여 퇴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까?
이 그림책이 국내에 출간될 무렵, 위키리크스 사건이 세계적 이슈였다. 위키리크스 관련 뉴스와 이 그림책을 동시에 보며, 피터 시스의 질문이 계속 떠올랐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기대할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기밀을 알 수 없고 다 알지 못해도 된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가 서로의 전문 영역이라 하며 맡기는 사이, 필요한 부분까지 가려져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그 가려진 틈에서 또 다른 공포, 불신, 증오가 싹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유롭다고 믿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과연 신뢰, 존경, 시詩가 사회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일까. 또는 이렇게 묻고 싶다. 세계는 계속 믿을 만한가, 빈곤과 불평등을 없애겠다며 오히려 전체주의로 나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과연 이곳에는 장벽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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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피터 시스의 『장벽』과 반대의 이야기를 보자. 장벽 너머를 꿈꾸고 장벽을 허물던 사람들과 반대로 장벽을 쌓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아민 그레더는 『섬』에서 장벽을 쌓는 사람들의 어두운 심리를 묵직하게 표현했다. 낯선 사람을 동료로 받아들이기는커녕 자신들의 두려움을 제어하지 못하여 세상과 물리적‧심리적 담을 쌓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섬에 한 남자가 실려 온다. 남자는 발가벗은 채로 무방비 상태였다. 섬 사람들보다 몸이 훨씬 작아서 그에게 비하면 섬 사람들은 무지막지해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섬 사람들은 이 사람의 등장에 매우 혼란스러워졌다. 이 이방인을 바다로 다시 돌려보내자고 했지만 어부는 반대했다. 바다가 얼마나 험한 곳인지 알기에 바다로 보낼 수가 없었다. 섬 사람들은 남자를 섬에 두기는 하되 안 쓰는 염소우리에 그를 방치했다.
며칠 뒤 굶주리던 남자가 음식을 구하러 우리에서 나오자 마을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 섬 사람들은 여전히 이 남자를 어찌할지 몰랐고 이번에도 어부는 보살펴 주자고 했다. 사람들은 다시 남자를 섬에 두기로 했다. 그러나 남자를 믿지 못했고 남자와 함께 살아갈 생각은 없었다. 남자에 대한 근거 없는 두려움이 섬에 퍼져나가도 아무도 막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어느새 연약한 남자는 사람들 상상 속에서 살인자가 되고 악마가 되었다. 남자도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데, 변호해서 상황이 더 나빠질 것이라 여겼는지 아니면 아예 기회조차 없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섬 사람들은 남자를 다시 바다로 보낸다. 이번에는 어부의 말도 통하지 않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들은 남자로 내쫓고 난 뒤 섬에 장벽을 쌓았다. 지나가던 새도 쏘아 버리고 물고기도 잡아먹지 않았다. 물고기는 남자가 온 바다에서 나는 식량이기 때문이다.
섬 사람들은 자신들을 보호한다고 장벽을 세우나 장벽이 그들을 가두어 버린 셈이다. 세계를 보는 눈을 막고 인식의 틀 자체를 높다란 장벽 안으로 가두어 버렸다. 섬 사람들은 그들의 두려움을 파헤치려 들지 않았다. 벌거벗은 남자에게 왜 왔는지, 어디에서 왔는지는 묻지도 않았다. 세계를 알고 두려움을 극복하거나 해소하려는 것이 아니라 근거 없는 두려움에 스스로, 기꺼이, 굴복되어 버렸다.
큰 판형의 그림책에 시꺼먼 연필선, 어두컴컴한 색으로 폭풍우가 들이닥칠 것 같은 섬이 있다. 벌거벗음으로써 아무런 무기도 지니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이방인과 농기구를 들고 무리를 지어 이방인을 대하는 섬 사람들을 같은 화면에 담는다. 그림으로만 보면 이방인이 위태롭지만 섬 사람들은 놀랍게도 이방인과 외계에 대한 두려움을 기꺼이 뒤집어쓰고 공포에 겨워한다. 섬도 고립된 곳이건만 외부인에 대한 배타성으로 높은 장벽까지 세워 바람이 들고 나기를 아예 거부한다. 이 상황이 고착화되면 벽 안의 사람들은 벽 밖의 세상에 대해 이야기를 지어낼 것이다. 또 그것을 핑계로 일상을 억압하는 통치를 하기 시작할 것이다. 바깥 세계에 대해 어떤 말을 해도 아무도 증명할 수 없으며 역사도, 생활도 장벽 안에 고스란히 갇혀 버리고 만다. 밖을 꿈꾸거나 정상적으로 외부와 교류하지 못하는 채로 두어 세대가 지나고 나면 장벽 안에서는 정적인 평화를 지속하거나 아니면 언제 올지 모르는 이방인을 향한 전쟁을 항상 준비할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현 세대의 히스테리와 공포 때문에 모험을 포기한 삶과 세대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방인을 향한 두려움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대물림된다.
위험에 대한 두려움, 안전에 대한 집착, 그에서 비롯한 미지의 것에 대한 배척 때문에 장벽을 쌓는다. 장벽은 안전을 보장하는 것 같다. 하지만 장벽은 장벽을 쌓는 데서 그 역할이 그치지 않는다. 장벽 밖의 소리를 막는다. 장벽 밖의 세상을 왜곡한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막혀 있어서 서로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없다는 점은 장벽 밖이든, 장벽 안이든 모두가 공유하는 고약한 한계이다. 지금 우리는 20세기 중반 냉전 하의 철의 장막 저 편을 전체주의니 파시즘이니 하고 부르지만, 동독에서 베를린 장벽을 세울 때 장벽의 공식적 이름은 ‘반파시즘 방어벽’이었다. 그들에게는 서구 자유진영이 파시즘 제국이었다. 이렇게만 보면 상대적이지만, 실제로 둘 중 한 쪽이 더 폐쇄적이고 그곳에는 장벽 너머 저편을 갈구하고 탈출을 시도하는 이들이 훨씬 많았다는 점에서 상대적 차이로만 보기는 어렵다.
피터 시스의 『장벽』은 철의 장막 안에서 자유를 갈망하고 장벽을 넘으려는 이야기이나 그가 넘어온 이 땅에도 장벽이 새로 생기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있던 장벽이 높아질 가능성도 여전히 있다. 2010년에 출간되었으니 『장벽』을 처음 접한 뒤 시간이 꽤 지났다. 정의이든, 놀이이든, 허영이든, 장벽을 흔들 것처럼 보였던 위키리크스의 줄리언 어샌지는 특유의 날카로움을 잃었고, 그때보다 지금의 시대가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 같다. 팬데믹이라는 특수 상황이 벌어지자 세상이 나빠지는 모습이 뚜렷이 나타났다. 코로나 사태 초기에 몇몇 학자들은 팬데믹이 인간에게 결핍된 것들을 되돌아보게 하고 가족, 마을 공동체 등 본래의 관계를 회복시킬 것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런 조짐을 느낄 수가 없었다. 예전에 세상은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로 가득했고, 이제는 불안감, 대립, 오해로 가득해서 타인을 더 경계할 수밖에 없는 사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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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장벽 안의 세계만 알고 장벽 안의 체제에 완벽히 순응한 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세계도 유토피아일 수 있다. 집 한 칸을 제공받고, 실직 걱정 없는 일터에 식량은 늘 배급받는다. 장벽이 생기고 외부와 단절되어 지낸 지 서너 세대가 지나면, 그때는 판단의 기준도 없어질 것이다. 만약 소설 『1984』의 세계에서 50년이 더 지났다고 가정해 보자. 시간이 지나면 전쟁 전의 세계, 즉, 빅브라더 전의 세계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깥 세계와 벽을 쌓고 과거의 기억을 수정하고 왜곡하고 지우는 일을 끊임없이 했으니 실제 기록이 얼마나 남았을지 알 수 없다. 자유, 사랑, 평화 같은 개념 단어가 사라졌으니 자신의 실존 상태를 고민하기도 어렵겠다. 식량의 질이 나쁘더라도 비교할 대상이 없으면 질이 나쁜지 아닌지에 대한 감각이나 판단이 없으니 괴로울 수도 없다. 가족이 없으니 가족으로 인한 갈등도 없다. 서로의 고발을 서글퍼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이며, 무의식까지 세뇌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인간 본능 중 하나인 진리 탐구와 호기심을 기꺼이 억누르거나 제거한다. 통치 세력이 벌인 혁명만이 혁명이며 그 혁명 이후에 인간을 고양시키거나 혁명의 소지가 있는 단어를 없애며 더 완성으로 나아간다. 세계는 무기력하나 평평하고 갈등이 없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이 체제와 체제의 방식이 불편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자신에게 더 나은지, 아닌지 판단할 기회를 아예 제공하지 않는다. 감정과 개념이 원천봉쇄된 사회에서 인간은 개성을 지닌 개인일 수 없다. 그들 앞에 놓인 것이 인류의 안전 보장인가, 인류가 소멸해 가는 과정인가.
‘어스시의 전집’의 마지막 권 『또 다른 바람』에서는 죽은 자들의 영혼이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살아 있는 자에게 신호를 보내는 일이 일어난다. 망자가 불모의 세계에 갇힌 것이다. 어스시 세계의 통치자, 현자, 각 종족의 일원이 세계의 어긋남을 바로잡고자 모인다. 이 문제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얘기를 하던 중에 팰른 지방의 마법사가 그들의 전설을 말해 준다.
“강과 산과 아름다운 도시들이 있는 근사한 나라, 고생도 아픔도 없고 자기 자신이 그대로인 곳, 자아가 변하지 않은 채, 변화를 겪지 않으며, 영영 그렇게 지속되는 곳…, 그건 바로 고대 팰른 전승의 꿈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 말처럼, 한 야망 높은 마법사가 그런 땅을 만들었다. 시간을 초월하고 죽은 이들의 영혼이 영원히 살게 되는 땅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 서쪽 땅에 담을 세우자, 예견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담 안에서 바람은 불기를 멈추고 물은 흐르지 않았다. 연인이기를 갈망하여 죽은 이들도 그곳에서는 서로를 스치기만 할 뿐 사랑하지 않았다. 어미는 아이를 안지 않았다. 말 그대로 평화롭고 아무 문제도 없는 세상이지만 그곳에는 영혼의 자유로운 감정도, 자연스러운 흐름도 없었다. 죽었으되 죽지 못하며 산 것도 아니었으니, 펠른 마법사가 말한 꿈은 실제로 이루어졌으나 악몽이 되었다.
“죽은 이들은 어둠의 땅, 메마른 땅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불멸과 영원이 주어졌으나 불모의 땅에 갇힌 자들이 원하는 것은 진정한 죽음이었다.
이 이야기는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에 대한 비유로도 들어맞는다. 유토피아를 만든다고 하나 전체주의 체제로 통일된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와 같은 선상에 놓인다. 디스토피아의 통치자가 디스토피아를 세우겠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내세우는 목표는 유토피아의 완성이다. 그리고 그 사회는 일견 완성되어 있다. 모두 제자리에서 일하며 엄격한 규율에 따라 움직인다. 단, 변화가 없다. 혁명은 물론 개혁도, 시대의 자연스러운 변화도 용납하지 않는다. 바람이 일지 않는 사회이다.
모두가 유순하고 도덕적인 세상이라면 진정 유토피아가 가능하겠다. 통치자도 시민도 그러해야 한다. 모두가 본디 덕을 갖춘 사회라면 문제 될 것이 없다. 하지만 역사에서 인류가 이랬던 적이 있는가? 작은 마을에서 단기간은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은 사회에 사는 나로서는 모두가 욕심이 없고 고민이 없고 순응적이어서 삶의 무게도, 고뇌도 없고, 고뇌가 없으니 열정에 찬 글도 쓰일 일이 없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상상하기가 어렵다.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모인 중구난방인 지금 같은 사회를 평온하고 획일적인 유토피아로 만들려 한다면, 인간은 억압되고 강제로 맞춰지는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그것도 끔찍하거니와, 그렇게 전체화된 사회에서 참 어이가 없는 모순이 생긴다. 그곳의 질서를 만들어 내는 몇몇은 전체라는 강압에서 벗어나 있고 자신의 개성과 자유와 취향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하므로, 디스토피아뿐 아니라 유토피아도 쉽게 바랄 수가 없다. 역사와 문학에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와 전체주의는 극단적 히스테리와 완벽주의로 만들어 놓은 결과에 맞추느라 아주 많은 잔가지를 쳐 버리고 만다. 그 잔가지까지 하여 인간과 자연과 세상은 풍요롭게 돌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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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야 당연히 지향할 것이 못 되는 줄 알지만 유토피아도 경계해야 한다면 도대체 인류가 무엇을 바라야 할까 싶지만, 이것은 아무것도 추구하지 말자는 뜻과는 다르다. 너무 쉽게 완벽함에 현혹되지 말고 너무 쉽게 우리 자신을 포기하지 말자는 말이다. 그리고 방법은 있다.
『어둠을 금지한 임금님』은 앞의 두 그림책과 달리 폭압도, 폭력도 나오지 않는다. 글과 그림에 위트와 유머가 가득하지만 한편으로는 참으로 간악한 세태가 담긴 이야기이다. 현대 사회에서 정치와 언론이 어떻게 일을 하며 시민은 어떻게 그에 부화뇌동하는지 정확하게 그려 냈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아이가 있다. 그런 아이는 흔하다. 그런데 그 아이가 왕자였다. 왕자는 임금님이 되어 큰 권력을 행사하게 되자 어둠을 금지시켰다. 가능하지 않을 법한 명령이나 신하들은 “폐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를 시작으로 실행 방안을 내놓는다. 무조건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요청하도록 어둠에 대한 부정적 소문을 퍼트린다. 밤의 어둠이 자연스러울 뿐 ‘아무 생각’이 없던 백성들은 거짓 소문에 슬슬 영향을 받는다. 계획한 대로 임금님은 백성들의 의견을 ‘흔쾌히’ 받아들여 어둠을 금지한다. 어둠 금지에 따른 조치와 통제가 이어진다.
그러나 자연스럽지 않고 상식에 어긋나는 일은 모두를 힘들게 한다. 백성들은 불을 끄고 밤의 평화를 누리고 싶었다. 그러자 신하들은 두 번째 조치를 말한다.
“백성들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면 됩니다.”
그리하여 모두의 관심을 집중시킬 성대한 불꽃놀이를 계획하지만 사람들은 두 번은 속지 않는다. 작가는 불꽃놀이 축제라는 장치로 대중을 우롱하는 통치 세력의 뻔한 수법을 드러낸다. 동시에 잘못된 세태를 바로잡는 백성의 힘과 단결력을 보여 준다.
어둠 금지 정책은 폐기된다. 엄청난 혼란을 야기한 임금은 아무 벌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임금님은 임금님 말을 듣지 않은 백성들 그 누구도 벌하지 않았다며 임금의 너그러움과 깨달음을 한 문장으로 전한다.
큰 틀을 보면 그림책의 전형이다. 아직 어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미성숙하고 자기중심적 존재에게 어둠은 자연스러울 뿐 두려운 현상이 아니라 말한다. 그런데 그림책의 전형적 틀 안에, 통치 세력의 조작, 홍보와 그에 휘둘리는 듯하나 잘못된 선동을 넘어서는 시민의 자각과 권리와 의무를 본다. 사실 어둠은 친해지거나 자연스러워질 자연 현상이다. 임금은 그것을 해내지 못한 자신의 미숙함을 통치로 덮어 버렸다. 임금과 신하는 그 미숙함을 깨닫지도, 고치지도, 조언하지도 못했다. 시민만이 밝음과 어두움이 적절히 조화된 세계를 지켜 냈다.
시민이 답이지만 또한 시민의 힘이라고 해서 늘 현명하지만은 않다. 그림책에서 어둠을 제자리로 돌려놓은 역할을 시민이 했으나 왕과 신하들의 선동에 휘둘려 어둠을 없애 달라고 요청한 이들 역시 시민이었다. 시민은 강력한 권력이자 또 다른 폭력이 될 때도 있다. 좋은 사회는 시스템만으로도 되지 않고, 개인의 인성만으로도 되지 않는다. 시스템의 정비와 개인의 인성 교육은 둘 다 필요하다. 그래도 나는 시민에게 기대하는데, 더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고 변해가기 때문이다. 시민은, 군중이 되고 무리가 되어 폭력을 행할 수도 있으나, 또한 반복되는 현상에 금세 질리고, 거부한다. 다수는 따르더라도 한 부류라도 날카롭게 파악하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 날카로움이 전염되는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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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팬데믹으로 감시 체제, 시민들의 자발적 고발과 견제, 감시망에 따른 인권 침해 등의 문제가 대두되었으나, 이 글의 동기는 팬데믹 상황만은 아니다. 획일성과 전체에의 강요는 지금만의 문제가 아니고 통치 방식의 문제만도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에서만 비롯되지도 않는다. 유행에서 벗어나는 옷차림에서 벗어날 때도, 소수만 의견이 다를 때도 느낄 수 있다.
『동물농장』의 책 뒤표지에는 이런 카피가 있다. ‘『동물농장』은 지금도 있고 미래의 세계에도 있을 것이다’ 이 표현은 내가 좋아하는 다른 책의 첫 문장과 닮았다. 그 책에서는 이렇다.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 모든 것이다.’ 이 문장이 뜻하는 것은 바로, 코스모스, 즉, 우주이다.
우주와 『동물농장』의 부패한 권력의 공통점이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존재하는 점이라니… 인간의 세계를 우주의 시간과 공간, 만물의 물리적 범위에 비길 바가 아니지만, 『동물농장』의 풍자가 가리키는 인간의 일그러진 권력욕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맹종이 인간 사회에 뿌리 깊게 퍼져 있으니 틀린 말도 아니다. 전체를 장악하려는 통치 욕망과 지배층의 부패는 인류가 우주에서 사라지는 날까지 계속될 것 같다. 여기에 시민의 맹종과 무기력이 더해지면 더할 나위 없이 암담한 사회가 되고 만다.
우주의 질서는 인간이 탐구하고 흐름을 탈 뿐 변화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 세계의 권력과 정치는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존중하며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출 수는 있다. 그렇다고 해도 완벽하지 않고, 적당한 밸런스로 고정되지도 않으니 토론과 의견을 멈출 수 없는 분야이다. 서로 존중하고 근거와 논리를 갖춘 말과 태도가 필요하지, 자유와 권력에 대한 의문 제기와 탐구에 소홀해도 되는 때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사회는 기술이 발달해서 감시와 통제는 더 쉬운 일이 되었고 누구나 완벽하지 않은 정보에 둘러싸여 있다. 『어둠을 금지한 임금님』에서 어둠을 금지하려고 사용하던 선동이나 조작, 홍보의 방식은 정치와 언론에서만 사용하는 방식이 아니다. 정보를 유리하게 편집하고 강조하고 과장하거나 언급하지 않는 방식은 정도와 방법의 차이는 있으나 캠페인과 제품의 마케팅, 홍보 등 많은 분야에 퍼져 있다. 더 많은 판매를 위해, 타인을 설득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식이다.
이미 이러한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주의를 기울이자는 것이다. 위태롭고 부정적 면도 있으나 이곳 전체를 부정할 생각이 없으며 이곳에서 느끼는 활기와 분방함에 매료될 때가 많다. 즐거움이 계속 즐거움이 될 수 있도록, 일상의 미세한 흐름에서 위험을 감지하는 감각을 키우고 싶다. 알지 못하는 채로 부당함을 따르고 일조하며 휩쓸려가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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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는 지금 이 세계에서도 어떤 모습은 유토피아를 향하고 어떤 모습은 디스토피아를 향한다. 이탈로 칼비노의 문장을 빌자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나는 첫 번째 방법은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고 두 번째 방법은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이다.
전자는 많은 사람이 쉽게 할 수 있고, 후자는 위험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 나가야 한다. 칼비노의 말대로 위험하고 계속 노력해야 하는 길이더라도, 당대의 기준에서 보편적으로 좋은 세상으로 가는 여정을 멈추지 않으면 좋겠다. 유토피아는 그 과정에만 있을 것이다. 믿을 것은 좋은 세상에 대한 협의와 그 세상에 타인과 함께 도달하려는 노력이다. 유토피아가 완성되는 일이 있다면, 그때는 그 완성의 허구성 또는 전체성이나 폭압성의 위협을 살필 일이다. 어쩌면 모두가 만족하는 이상향이란 세뇌된 이상일 수밖에 없음을, 그러므로 만인일치의 완벽한 이상향보다 시대마다, 지역마다 결핍된 부분을 정확히 알아차리고 더 나은 방향을 찾는 일이 우리가 할 일임을 깨닫는다.
방법은 다양하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미성숙한 임금과 달리 어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시민들처럼 성숙하고 경쾌하게, 미신의 시대에서 이성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던 케플러처럼, (평범한 삶의 방식을 따르지 않았으나 자신의 고요한 삶으로서 시를 완성하고 경직된 세상에 삶의 모습을 하나 더 보탠 에밀리 디킨슨처럼-대체할 예술가나 문인,) 자신에 대해 질문하고 생각하게 하는 『이게 정말 나일까?』와 더 큰 세계를 인식하려는 『지구를 상상하다』처럼, 혼자서도 살 수는 있으나 고립된 손 아저씨를 불러내어 동료를 구하고 함께하는 삶을 택하는 『길 아저씨 손 아저씨』의 길 아저씨처럼, 피카소처럼 예술로. “그림은 집이나 꾸미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적과 맞서서 싸우고, 또 나를 지키는 하나의 무기입니다.”
세상 살면서 이겨야 할 것은 몇 개 안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또는 이기지도 않지만 지지도 않는 그 균형 감각이 중요하다. 수전 손택이 폴란드 작가 자가옙스키를 말할 때 쓰던 말, 유토피아는 아니지만 ‘적당히, 불완전하게 좋은 세상’이라는 표현을 나는 더 신뢰한다.
완벽히 이기는 것보다 그저 지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할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