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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진행하며 하나의 덕목을 얻었다. 미련함이다. 둔하고 더디다. 미련함을 추구한 적도, 가지려고 애쓴 적도 없다. 그런데 미련함이 내게 왔다. 생각이 많고 아이디어가 사방으로 뻗쳐서, 그중에서 최상의 방법을 찾아내려고 더딘 것도 아니었다. 치열하게 해내지를 못한다.
나는 계속해서 편집자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며 왜 그만큼 다발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지를 나에게 따지고,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했다. 얼마 전에야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며 과거의 나를 내려놓았는데, 사실 반복해서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그때라고 해서 그렇게 잘한 것도 없었다. 그렇게 과거의 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나니 미련함은 지금 내게 적합한 덕목이었다. 나는 한 자씩 밀고 나가듯 글을 쓰고 탈고로 향해간다.
내 일상은 이렇다. 그리 화려하지 않다. 일상이 그저 그렇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던 때도 있다. 이십 대 후반이었다. 과도기였다. 일에서, 스타일에서 변화해야 할 시기이지만 산뜻하게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잘할 거라며 덤빈 일을 시원스레 진행하지 못했고 사람을 사귀는 건 여전히 서툴렀다. 세상이 내게 퉁명스러워졌다고 느꼈다. 잘할 거라는 위로와 다짐을 너무 많이 하는 시기였다. 나는 태어나면서 즐거움은 장착되어있다고 생각해왔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기어이는 화가 났다. 설마 그 기능도 없이 세상에 내보냈다고?
하지만 이렇게 혼자 투덜거려도 그 기능을 장착해주겠다며 애프터서비스를 해줄 존재는 없었다. 즐거움도, 의미도 내가 스스로 찾아낼 수밖에 없는 거였다. 천천히, 천천히, 원래 인생에 그런 기능은 장착되어있지 않다고, 한편으로는 수긍하고 한편으로는 포기했다.
한참 지난 어느 날, 책상을 정리하다 서랍에서 낯선 엽서를 보았다. 여행지에서 만난 친구가 보낸 건데 받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봉투 대신 A4 용지에 곱게 싸인 엽서에는 친구가 어디선가 들었던, 아니면 읽었을 내용이 쓰여있었다. 의미는 주어지는 게 아니라 자신이 찾아가는 거라고. 무의미하게 다가온 것에 느낌이 들고 의미가 생기고 그것과 함께하는 이야기를 갖게 되며 내 삶이 채워지는 거라고.
나는 어쩜 그 말들을, 그 엽서를 한 번도 읽은 적 없는 듯 고민하고 있었을까!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무려 2003년에 받은 엽서였다. 그때의 나는 이런 말이 무기력하게 느껴졌을 정도로 의미가 넘치는 일상을 살고 있었을까. 알아서 다가오는 많은 자극 속에 살고 있었을까, 혹시 작은 자극 하나에도 온 신경이 예민해져서 버거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을까… 20년이 지나 다시 읽은 친구의 말은 일상의 무기력함에 대한 분노와 상실감,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이 실망감이 누그러지는 과정이 왜 있었을까 싶었을 정도로 말끔하게 정리하고 정답을 알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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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시절에도 방학 동안 흘러넘치는 시간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해 힘들어한 적이 있다. 직장 생활을 하자 권태로움을 느낄 시간이 많이 사라졌다. 나한테는 그것이 직장의 큰 장점이었다. 그런데 카페에서 일하면서 무기력하게 비어있는 시간과 막연한 기다림을 제대로 맞닥뜨리게 되었다. 나중에야 손님이 오지 않을 때도 할 일이 계속 이어졌지만, 처음에 카페 일에 익숙하지 않았을 때였다. 그 많은 할 일이 보이지 않았다. 손님이 없는 시간은 비어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그 시간을 어찌할 줄을 몰랐다. 사무실에서 일할 때처럼 자료를 정리할 수도, 다음 일을 준비할 수도, 이것저것 검색을 하며 여유를 부릴 수도 없었다. 기다림에 대한 책이 절로 떠올랐다. 『고도를 기다리며』도 그때 다시 읽었다. 내가 기다리는 고도는 설마 손님이었을까? 말도 안 되지만 그때는 그랬을지도 모른다.
새로움도, 도전도, 떨리는 첫 순간도 결국은 일상이 된다. 해도 해도 긴장이 줄지 않고 괴롭다면 곧, 참아봤자 얼마 뒤 그만둘 테니, 그 일은 나의 일상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에피소드로만 남게 된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서로를 튕겨내고 남은 것은 아무리 유별나도 결국은 일상의 한 요소로 녹아든다. 그리하여 내 일상은 늘 평준화되고 평온함을 유지하게 되며, 별일 없기를 기대한다.
별 이야기가 생기지 않는 일상이 답답해서 역동적인 일상을 만들려고 이리저리 다른 세계를 찾아 기웃거리다가, 얼마 안 지나면 또 평온한 하루를 기대하고 조용한 하루에 만족했다. 나는 이 주기를 반복하면서 별일 없고 평온한 날을 유지하는 기간이 점점 길어진 듯하다. 늘 시간이 더 필요해서 한 주가 열흘이고 그중 7일 일하고 3일 쉬면 좋겠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다. 하루는 30시간이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때라고 해서 내가 무미하지 않게 보냈을까, 하면 잘 모르겠다. 살아간다기보다 이대로 죽어간다는 생각이 더 드는 때였다. 일상이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란, 참 귀하고 아쉬우면서도 꽉 채우기보다 틈새가 필요한 모양이다.
빵집에서 일할 때였다. 손을 다쳐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새벽에야 집에 들어간 적이 있다. 그 뒤로 엄마는 늘 내 전화에서 별일 없다는 말을 들으면 안심하셨다. 처음에는 별일 없다는 말을 전하며 재미없다고 했는데, 이제는 나도 별일 없는 일상에 안도하고 감사한다. 재미있는 일이 생기면 좋겠다는 동료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예전만큼 갈구하지 않는 나를 느꼈다.
사람의 일생에는 별일 있는 시간보다 별일 없는 시간이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은 곧 역사로 옮겨갔다. 역사의 굵직한 사건 뒤로, 이름을 날린 인물들 뒤로, 후대에 이름 남기지 않고 살아간 훨씬 많은 이들은 그들의 평범한 일상과 지루함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이들의 별일 없는 시간을 다 합치면, 인류의 역사가 쌓아온 업적 뒤에 도대체 얼마나 긴 무미한 시간이 받치고 있을까? 눈에 보이는 하나의 성과에 측정되지 않은 많은 사람의 일상, 오랜 역사, 숱한 세상사 흐름이 엮여있다고 해도, 인류 전체 시간의 절반은 그저 시간을 견뎌내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완벽히 살기보다 주어진 시간을 감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3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를 볼 때였다. 큰 역사에서는 보지 못한 수많은 사람의 이름이 이 책에는 있다. 내가 교과서에서 보지 못했을 뿐 걸출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빌 브라이슨이 캔버스 화이트에 대해 말한 것처럼, 이 책 속 많은 인물은 이 책에서 그들의 이름과 기록을 보는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다. 물론 이 책에도 기록되지 않을 작은 변화를 이끈 이들도 많을 것이다. 역사를 받치고 있는 것은 허술하고도 하찮은, 그러나 느슨하면 느슨한 대로, 치열하면 치열한 대로 지낸 많은 이들의 일상이다. 시시콜콜하지만 시시하지는 않은 이야기를 읽다 보면 거대한 역사를 메우는 일상의 대수롭지 않은 장면을 상상해보게 된다.
빌 브라이슨의 책을 보며 흘러넘치는 역사의 시간으로 생각이 옮겨가자, 버지니아 리 버튼의 『생명의 역사』를 꺼냈다. 우주의 탄생부터 시작하여 지구의 탄생, 긴 지질시대, 생명이 오랜 시간을 걸쳐 인간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이 그림책은 담고 있다. 작가는 우주의 역사에서 지구의 역사로, 다시 인류의 역사로 이어오는 과정을 5막짜리 연극으로 보여준다. 우주와 지구의 탄생은 프롤로그에 소개한다. 프롤로그의 세상에는 세상은 아직 혼탁하여 낮과 밤이 나뉘지 않았다. 프롤로그의 마지막 장에 생명의 시작을 알리지만 그 흔적은 미미하다. 지금도 생명은 어디에서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림책 1막부터 3막은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를 거치며 다양한 생명체가 나타나고 변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4막과 5막에 인류의 시대를 담았다. 이 책에 따르면 인류의 시대는 약 1만 년 전부터이다. 1만 년을 어떻게 상상해볼 수 있을까… 인간에게는 너무 길지만 지구 역사에 비하면 인간의 역사는 양팔 전체에서 손톱 끝에 불과하다.
빌 브라이슨의 책을 보며 익힌 감각대로 이 그림책을 보려고 해 보았다. 인류의 역사로 압축시키면 사건과 에피소드가 바글바글하지만, 압축을 풀어보면 개개인의 날들은 매일 별 차이 없거나 느릿느릿 변화했을 것이다. 그림책을 천천히 보며 지구의 탄생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치지도 않고 반복하며 이어지는 날들을,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문장은 간결하고 몇 억 년의 시간이 한 장에 설명되어있다. 이 문장마다, 문장과 문장 사이마다 얼마나 긴 시간이 들어 있을까? 얼마나 느릿느릿 이 변화들이 진행되었을까? 내가 짐작하기 어려운 긴 시간 동안, 예상하지 못했을 우연이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데 아주 미세하고 때로는 큰 영향을 보태었으리라.
하루는 늘 주어지다 보니 하루를 무대로 일어나는 일상은 너무 익숙해서 무기력해지기 쉽다. 그러나 지금 이 일상도 아주 오랜 기간, 아주 많은 사람, 숱한 시도와 실행을 거치며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우리가 자신의 일상을 꾸려온 노력도 포함된다. 내 일상은 앞날의 목표를 향해 가지만 그렇다고 이 하루와 지금 이 순간이 미래의 담보로서만 작동하지는 않는다. 일상은 쉼 없이 흐르고 우리는 이 안에서 모든 것을 한다. 나, 집, 동네로 확대되는 물리적 세계에 발붙이고 생활하며 내 일상을 구축하고 그것이 내 이야기가 된다.
나는 곧잘 생각한다. 일상의 이야기를 읽어내거나 적어도 내 하루가 텅텅 비어 있지 않다는 것만 인지할 수 있어도 힘이 될지 모른다고. 그런 사람에게 세상은 조금은 덜 혼란스럽고 그는 이런저런 외부의 일에 맥없이 흔들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 일상이 지금도 꽤 괜찮다는 것을 안다면, 또는 지금 내 고요한 일상도 꽤 괜찮게 여기고 운영할 수 있다면, 담백한 즐거움을 누리는 시간과 감각이 조금씩 늘어난다면, 그렇게 될 때 사람은 조금은 더 단단하고 타인과 세상에 쉽게 휘둘리지 않을 것 같다. 나의 가설이나 답은 잘 모르겠다. 나도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한 질문이고 진행 중인 실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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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넘어갈 무렵부터일 거다. 겁 없이 덤비라지만 겁 없는 태도가 싫었고 어린 시절에는 동경했던 예술가라는 삶의 방식에 무심해졌다. 대신 성실함이라는 일의 태도이자 삶의 태도에 마음을 빼앗겼다. 큰 인물 대신 자신의 삶을,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어떻게든 운영해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눈에 들어왔다. 완벽한 사람이라는 말은 매력적이지 않았다. 어디서든 배우고 조금씩이라도 받아들이고 성장하는 모습을 익히고 싶었다. 그런 태도야말로 마음을 움직였다.
그런 존재에 대한 그림책을 보았다. 총명했고 일생을 배워갔으나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성실히 살아갔다.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성실히 해낸 존재에 대한 이야기이다.
『자코미누스』. 원제는 ‘Les Riches Heures de Jacominus Gainsborough’ 자코미누스 갱스보로의 풍요로운 시간이다. 토끼 자코미누스의 일생이 담긴 커다란 책이다.
첫 장면은 가을날의 공원이다. 자코미누스가 태어났을 때, 온 가족이 기뻐했다. 베아트릭스 할머니는 ‘자코미누스 스탕 말로 루이스 갱스보루’라는 길고 애정 넘치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자코미누스는 유모차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한쪽 귀 끝의 검은 얼룩만 보인다.
이 장면에는 자코미누스의 친구와 이웃이 될 동물이 여럿 나온다. 자코미누스를 태운 유모차 옆에 있는 쥐 형제는 쌍둥이 레옹와 나폴레옹일 것이다. 오른편 화면에 배가 잔뜩 부른, 줄무늬 원피스에 버건디 코트를 입은 토끼는 두스의 엄마인지도 모른다.
책은 많은 캐릭터가 등장하는 큰 그림과 자코미누스가 단독으로 등장하는 장면으로 번갈아 진행한다. 가을날의 아름다운 공원 다음 장면에는 보송보송한 아기 자코미누스가 보인다. 한 면에는 작고 여린 자코미누스가, 한 면에는 작은 글씨의 텍스트가 있다. 만약 자코미누스가 다른 날,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묻는다. 글쎄, 어땠을까? 영혼의 세계에서는 하나의 사소한 조건만 달라져도 아주 다른 환경이 펼쳐질까, 그저 인간의 상상력일까. 가장 궁금한 것은 이렇게 대체가 가능하도록 세상 모든 것에 영혼이 깃들어 있을까 하는 점이다.
자코미누스는 아주 어렸을 때 다리를 다쳤다. 베아트릭스 할머니는 남들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뭐 어떠냐고 달래 주었다. 자코미누스는 이때부터 목발을 짚고 다녔지만, 불편한 다리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코미누스는 커가며 많은 것을 배웠다. 듣는 법, 보는 법, 느끼는 법. 코끝보다 더 먼 곳을 보는 법과 앞장서서 이끄는 법도 배웠다. 더 복잡하고 어려운 것도 배웠다. 말하기 전에 생각하는 법과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 위해 말하는 법을 배웠다. 거짓말이 여기에 속할까? 참는 법, 선택하고 결정하는 법, 자신감을 갖는 법. 그리고 좋아하는 두스 비도크 앞에서 울음을 참는 법과 떠나는 법도 배웠다. 베아트릭스 할머니에게 영어를 배우고 평생 곱씹고 음미하게 될 책을 만났다. 자코미누스는 자신의 앞에 펼쳐진 삶이 아름답기를 바랐다. 우아한 사람들을 만나 고상한 인격을 지녔다며 호감을 받고 모두에게 사랑받으며 무슨 일이든 잘 이겨내기를, 부유하면서도 소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기를, 고통스러워도 꿋꿋이 일어서며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누구보다 두스에게 호감을 얻고 두스의 마음에 닿기를, 자코미누스는 상상했다.
자코미누스는 더 넓은 세상으로도 나선다. 자코미누스가 곱씹고 곱씹는 책과 이름이 같은 BLACK KNIGHT호를 타고 미쳐버린 세상의 한복판으로 뛰어들고 절망도 경험했다. 사랑하는 할머니를 삶의 저편으로 보내기도 했다. 삶은 때때로 심술궂었고 그건 자코미누스가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슬프고 힘든 시간 속에서 두스만이 구원인 듯, 자코미누스는 두스를 열렬히 사랑하는 마음을 깨달았다. 자코미누스는 두스를 기다린다. 두스가 자신을 바라보기를, 자신에게 말을 걸기를, 자신이 용기를 내기를, 그리고 두스의 대답을 기다린다. 마침내 둘은 결혼하고 둘을 닮은 토끼 세 마리를 낳았다. 자코미누스는 정신없이, 아주 정신없이 살아갔다. 더는 사유할 시간도, 자신을 돌아보고 정리할 시간도 없었다. 해야 하고, 해야 할 것이 차고 넘치는 시간이었다. 자코미누스가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은 밤뿐이었다. 그러나 꿈마저도 분열적이다. 자코미누스의 푸르스름한 니트 조끼는 올이 풀려버리고 낭만의 꽃은 다 흩어져 버렸다. 온통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모두 자코미누스를 조롱하는 것 같았고 자코미누스는 자꾸 화가 났다.
의도해서든 그러지 않든, 삶은 다른 지점에 이르고 또 다른 지점으로 나아간다. 의도했어도 그 변화가 나를 팔 벌려 반기리라는 보장은 없다. 새로운 세상은 내게 무심하거나 조금 닫혀 있고 내가 해내는 바에 따라 달라지고 그렇게 내 세상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을 몰랐을 때는 내가 예상한 바와 다른 분위기를 마주치면 멈칫하고 고민에 빠졌다. 생각보다 아름답지 못한 내 처지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고집스럽게 뻗댔지만 이 반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고민을 하는 중에도 나는 그 상황에 계속해서 적응해 가고 의미를 찾아가고 있었으니. 베아트릭스 할머니의 말처럼, 사랑하는 것을 갖지 못하면 내가 가진 것을 사랑해야 한다. 할머니 말에서 중요한 부분은 앞이 아니라 뒤였다. 내가 가진 것을 사랑하라.
한 집안의 가장이 된 자코미누스에게 삶은 더는 낭만과 성찰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다양한 언어와 사유하는 습관으로 상징되던 인문적 삶과 세 아이의 아버지의 삶은 충돌했다. 그 충돌조차 제대로 고민하고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자코미누스는 삶의 열차에 그대로 휩쓸려가고 그 시간이 지속되며 그 삶에 그런대로 적응해갔다. 자코미누스는 자신의 삶을 받아들였다. 예전처럼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만 살 수 없음을, 사유를 누릴 수 없음을, 아버지로서 자신의 삶을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자코미누스는 더는 무엇을 기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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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고 나를 오롯이 인정한다는 것. 지난 시간에 머물거나 오지 않은 시간에 휘둘리지 않고 지금 내 주변의 공기와 냄새를 느끼고 지금 이 순간에 고요히 멈춰 본다는 것. 사람은 사유와 철학으로도 살지만, 감각과 생활과 그것을 해나가는 육체로도 산다. 가끔은 앞서가려고만 하는, 아니면 뒤에서 머물려고만 하는 정신을 지금 여기에 데려와서 꼭 붙잡고 있는 게 필요할 때도 있다.
멈춤이 패배로 느껴질 수도 있다.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도 한편으로는 필요한 과정이다. 그렇게 사는 시간이 뒷받침되어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코미누스의 기다리지 않음은 이미 많은 것을 기다려 본 뒤에 왔다. 기다림이 이루어지거나 이루어지지 않음을 충분히 경험한 뒤에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는 행위가 크게 의미가 없음을 알아버려서일 수도 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나니. 페르디난드처럼 태어날 때부터 꽃향기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캐릭터도 우리의 한 면을 이루고 있으나 그것만으로 이 세상살이에 만족할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 같다. 결실을 이루어야 하는 쓸모투성이 세상이 살고 있어서 말이다. 눈 돌리면 귀 열면 보이고 들리는 것이 그러하니 어떻게 영향을 받지 않을까. 그리고 결실을 맛볼 때의 기쁨도 매우 값진 것을. 그래서 더욱, 페르디난드라는 캐릭터의 한가함은 매번 누릴 수는 없다 해도 곧잘 과열되고 마는 세상살이와 스트레스 속에서 한 번씩 꺼내어 누려야 할 면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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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미누스는 늙었다. 한쪽 귀의 까만 얼룩도 옅어졌다. 자코미누스는 계속해서 소중한 기억과 소중한 느낌을 떠올렸다. 그것은 아주 작고 세부적인 것들의 연속이다. 친구들이 눈 위를 걸을 때 나던 발자국 소리, 바람의 숨소리와 빗소리, 아이들의 작은 발자국과 소리 같은 것들. 늙은 자코미누스는 그런 기억을 음미하고 다시 꺼내 올리고 그런 자신을 받아들인다. ‘자코미누스 갱스보루의 풍요로운 시간들’을 이루는 기억은 스무 개의 목록으로 정리된다. 이 적은 목록으로 자코미누스의 시간을 설명할 수 있을까 싶지만 스무 개의 목록이 어울리고 스며들며 만든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아진다.
다른 삶의 여러 목록에서 잘 보지 못했던 항목들이 자코미누스의 목록에는 있다. 불규칙동사, 잊을 수 없는 꿈, 선입견, 아주 많은 사소한 불안들 등의 항목을 보면 사유를 즐기며 생각이 많았던, 그 대신 말은 적었던 자코미누스의 삶에 조금 더 가까워진다. 책 내내 본 것이 자코미누스 삶의 큰 장면이자 요약이라면, 풍요로운 순간을 나열한 리스트를 보면 자코미누스의 내면이 더 깊이 있게 다가온다. 자코미누스의 삶은 아름다웠고 사랑할 가치가 있었다. 자코미누스가 어렸을 때 상상한 대로, 소박한 삶이라 할 수 있는 삶이었다. 우아함을 곁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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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레베카 도트르메르의 구아슈 그림은 섬세하고 부드럽다. 레베카는 사진과 명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림보다 사진에 먼저 매료되었다. 그림이 작가의 주된 작업 방식이 되었어도 카메라를 다루던 방식, 사진에서 익힌 구도 잡기, 화면의 깊이, 시선의 위치, 클로즈업과 블러 효과를 십분 활용하고 있다. 여기에 브뤼겔의 그림, 피터 래빗의 영향력이 더해졌다. 학교 장면에서는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색감과 연출을 보여주고, 많은 등장인물이 모인 살롱 장면에는 피터 래빗의 포스터가 걸려 있다. 한쪽 벽에는 동물 만화의 선구자인 벤자민 라비에르Benjamin Rabier의 책 표지도 보인다. 자코미누스의 시대를 특정할 수는 없으나 옷차림, 몽환적인 사진 컷은 20세기 초 대전쟁 시대의 유럽과 비슷하다.
세련되었고 동시에 초현실적이기도 한데, 캐릭터의 모습을 얼굴만 동물일 뿐 인간의 형태로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12개의 큰 장면과 그 사이의 자코미누스 단독샷, 다양한 경험을 보여 주는 스틸 컷 모음으로 이루어진 펼침이 번갈아 진행된다. 섬세한 그림도 훌륭하거니와 그림책에서 보여 줄 수 있는 효과적이고 아름다운 편집 방식을 활용하여 감상을 더 풍성하게 이끌어낸다.
사진, 고전 회화, 등 많은 것을 섭렵하고 좋아하는 작가의 취향과 스타일일 고루고루 어우러지고 드러난 그림책이다. 레베카 도트르메르는 이전에도 독창적이고 잘 그리는 작가로 이름나 있었지만, 이 작품으로 독자들에게도, 그녀의 그림책 경력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며 글에서도 재능 있는 작가임을, 연령대에 상관없이 감동을 주는 작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자코미누스를 주인공으로 한 책이 두 권이 더 나왔는데, 이 그림책이 자코미누스의 삶 전체를 보여 주었다면 두 그림책은 자코미누스 삶의 한 순간과 한 부분을 포착하여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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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미누스의 ‘풍요로운’ 시간이라고 붙인 말은 자코미누스의 삶을 표현하기에 참 좋은 표현이다. 작은 성취감, 섬세한 감각은 그 사람의 생활과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업적은 큰 데서 올지 몰라도 일상의 풍요로움은 이런 작은 순간과 작은 즐거움을 인지하는 데서 온다.
노년이 된 자코미누스의 목록을 보며 따라하고 싶지만 나는 어째 점점 좋아하는 것의 목록, 소중한 순간의 목록을 쓰는 것도 그 순간을 섬세하고 사소하게 묘사하는 것도 예전만큼 잘하지를 못한다. 좋아하는 것, 소중한 순간을 느끼는 강도가 약해지고 목록도 적어졌다. 어쩐지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쓰는 게 조금 억지스러운 일이 되고 있다. 싫어하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싫어하는 일을 쓰고 싶지는 않다. 쓰면서 그 감정이 떠올라 다시 화가 치밀기도 한다. 싫어하는 것을 제외하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감정이다. 이러다 보니 예전의 기억을 끄집어내야 하거나 딱히 싫어하지는 않지만 굳이 리스트에 쓸 만큼 애착이 크지 않은 것들을 쓰게 된다. 집착이 없어지는 것은 좋지만 일상에서 편안함을 느낄수록 물건이 주는 기쁨, 외부 자극이 선사하는 즐거움에는 의존하는 정도와 기대는 약해졌다. 대신 내가 만들어내는 작업에서 더 기쁨을 찾고 싶어 한다.
어느 날 나는 직업을 바꾸었고 두어 달 하다 말 줄 알게 된 일은 몇 년을 이어졌다. 그전에 하던 책 편집보다 현실적이었다. 물질이 기반이 되는 일이었다. 취직과 동시에 나는 곧바로 현장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매일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었다. 소리도 달랐다. 빵 반죽기 덜컹거리는 소리, 오븐 뚜껑을 여는 소리, 커피머신에서 스팀을 내는 소리, 그라인더로 커피콩을 갈아대는 소리에 음악이 끊이지 않았고 저편에서 사람들이 이야기 나누는 소리도 들렸다. 바게트나 깜빠뉴 같은 기본 재료로 만들어내는 빵 냄새를 맡으면 내가 이 새롭고 정직한 풍경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나서 마음이 부풀어올랐다. 그렇게 빵집 일에 점점 적응해갔다.
반복된 작업을 계속해서 해내며 조금씩 나아진다는 점은 매장에서 하는 일이나 편집일이나 비슷하지만 바로 결과물을 판매하는 점은 달랐다. 매일매일 눈에 보이는 성과, 진열해놓고 그것이 팔리는 모습을 보거나 설명하고 사 가는 사람의 반응을 볼 수 있는 점, 여기에서 오는 작은 성취감은, 편집일을 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기쁨을 주었다. 이 성취감은 나를 풍요롭게 했을 뿐 아니라 성취와 도전을 더 쉽고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이쯤 되자 나는 왜 생활 속 작은 도전과 성취는 건너뛰거나 무시하고 큰일만 이루려 했는지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성취감은 아껴 두었다가 큰 일에서만 느껴야 하는 한정된 자원이 아니다. 작은 성취감부터 차곡차곡 쌓아가며 해낸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도 사람의 그릇이 작아지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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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풍요롭게 하는 순간, 감각을 떠올리도록 도와주는 책을 몇 권 안다.
앤서니 브라운의 『내가 좋아하는 것들』. 앤서니 브라운은 상징이 가득하고 비유적 메시지가 들어 있는 그림책을 잘 만들지만 단순한 즐거움이 가득한 책도 참 잘 만든다. 그중 한 권이다. 같은 제목의 다른 책 민느의 『내가 좋아하는 것들』도 있다. 절판됐으나 원색의 어울림이 화려한 『말해 봐, 너 이거 좋아하니…』도 도움이 된다. 제목에서 ‘너 이거 좋아하니?’라고 묻는 게 아니라 말줄임표로 마친 것은 참 절묘하다. 상대의 취향을 묻는다기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상대에게 설명해 주다가 그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즐거움에 빠져들고 있는 것 같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노래 ‘My Favorite Things’도 있다. 아기 고양이의 수염, 따뜻한 장갑, 장미 꽃잎에 맺힌 빗방울 등 작고 섬세하고 기분 좋은 것이 나열된 노래이다. 천둥 치는 밤 이 노래를 부르며 친해지던 마리아와 아이들처럼, 좋아하는 것을 떠올리고 적거나 얘기하는 일은 보송보송하고 기분 좋은 일이다. 미쓰다 마리의 『귀여움 견문록』도 좋다.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이와 더불어 나의 목록을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될 책으로는 사라 파넬리의 『나의 지도책』, 요스타카 신스케의 『이게 정말 나일까?』, 『이게 정말 사과일까?』가 있다. 나와 내 일상이라는 기준점에서 무수히 뻗어나가는 생각의 갈래와 상상의 공간을 보여준다.
여기까지다. 이제 마친다. 다음 탐색을 향해 나는 또 가야 한다. 느리겠지. 아무도 기다리지 않을 테고. 그런데도 마음이 바쁘다.
‘산다’는 주제어를 놓고 글을 쓸 때였다. 최대한 가볍게 쓰려 해도 ‘산다’라는 단어에 줄줄이 따라오는 생각이 많았다. 다 써 놓고도 지우고 다른 방향으로 구상하기를 몇 번을 반복하는데 친구한테 문자가 왔다. 뭐하냐고 묻기에 ‘산다’를 주제로 쓰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친구는 대뜸 답을 보냈다. 사는 건 숨 쉬는 거, 숨을 쉬려면 공기가 필요하고 맑고 깨끗한 공기면 좋다고. 바이러스도 없는 공기. 건강한 공기. 친구는 바로 덧붙였다.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지도 않은 답이었지만 빠르고 단호한 친구의 대답에 수긍했다.
가끔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처럼 살아가는 인류의 마지막 세대쯤일 거라고. 로봇과 AI 알고리즘이 생활의 많은 편의를 제공하고 정말 다행히 인간이 좋은 혜택을 누리며 여유와 잉여의 중간쯤을 누리게 된다고 하면, 징글징글하게 고민하며 사랑하는 방식도, 힘겹게 미래를 준비하고 투쟁하는 모습도, 미래에는 인간의 몫이 아닐지도 모른다. 인간이 할 건 명상과 헬스와 발전한 의료 기술을 누리는 것뿐인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그래서 역으로 지금, 저물어가는 인류를 살아내는 사람처럼 작은 것들로 가득한 일상을 정성스럽게 생활해나가자고 다짐한다. 정치, 현재 역사, 생과 사 같은 큰 이야기에 시달려서 생활 속 작은 이야기를 보지 못하는 일이 없기를, 사는 건 내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시간인데 남 이야기에 휘둘려 내 이야기를 까맣게 잊는 일이 없기를. 그리고 사랑. 친구의 말대로 평화롭고 소박한 생활에 언제나 사랑이 스며들어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