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온 아버지의 문장을, 딸이 엮은 기록.
" 여름방학이 찾아왔다"
며칠 전 복중에 막내인 말복이 지나갔어도 가마솥 불볕더위는 연일 기승을 부려 댄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름방학이다.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은 하늘을 날아갈 듯 좋기만 하다.
고생 보따리 같은 책가방을 내팽개치듯 방에 던져 놓고는 부엌으로 달려가니
부모님들은 들일을 가셨는지 보이질 않고,
부엌에는 개다리 밥상이 홑이불인 양 삼베보자기를 뒤집어쓰고는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 위에는 밥상을 넘보는 파리들이 앞다리를 싹싹 비비며 기회를 엿보고 있다.
보자기를 벗기니 내 몫인 양 꽁보리밥 한 사발이 덩그러니 놓여 있고,
그 옆에는 꽁보리밥을 지키는 초병인 양 숟가락, 젓가락이 나란히 부동자세로 보초를 서 있고,
그 앞에는 MI소총 실탄 같은 풋고추와 된장이 사이좋게 마주보고 있고,
뒷쪽에는 지원군인 듯 열무김치와 갓 끓인 된장찌개가 구수한 냄새로 식욕을 돋군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했던가?
꽁보리밥에 풋고추 궁합이 맞는다.
가끔씩 목이 마르면 된장찌개로 목을 축이니 꿀맛이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밥 한 그릇을 얼렁뚱땅 해치우고는 집을 나섰다.
학교만 가고 나면 쥐 죽은 듯 조용하던 골목길이 갑자기 아이들로 시끌거린다.
첩첩산골, 해가 지면 할 일이 없어 아이들만 만들었는지
집집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벌떼처럼 꾸역꾸역 골목으로 몰려 나온다.
누런 코를 줄줄 흘리는 아이도 있고,
머리에 도장을 찍은 듯 기계충이 먹은 아이도, 종기가 덕지덕지 난 아이도 있지만
모두의 얼굴엔 순박한 웃음꽃이 피어 있다.
큰 아이들은 비석치기, 깡차기, 숨바꼭질.
단발머리 소녀들은 고무줄 놀이에 "호호하하".
짓궂은 사내아이들은 고무줄을 끊고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친다.
몇몇 아이는 호박꽃에서 꿀을 따고 있는 호박벌을 잡느라 호박꽃을 따기도 한다.
모두가 신바람 나게 놀다 보면
길고 긴 여름날도 어느새 저물고
서산마루에는 붉은 노을이 황금을 풀어 놓은 듯 멋진 장관을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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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이 글을 읽으며 ‘여름방학’이라는 단어가 눈시울을 붉힌다.
텁텁하고 더웠지만, 왜 그렇게 반짝였을까.
꽁보리밥 한 사발이 오늘날로 치면 어떤 진수성찬보다 포근해 보이고,
비석치기와 숨바꼭질을 하던 아이들의 얼굴은 지금 이 시대의 아이들보다 훨씬 자유로워 보인다.
글 속 ‘개다리 밥상’은 마치 집이라는 안식처를 상징하는 존재로 느껴졌고,
‘초병처럼 숟가락과 젓가락이 서 있는 장면’은
어린 시절 그 고요한 낮의 풍경을 정지된 영화 장면처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아이들만 만들었는지…”라는 표현에서는
이곳저곳에서 숨결처럼 이어졌던 생의 에너지가 느껴져
웃음이 터지면서도 왠지 뭉클해졌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건,
아버지 글의 끝마다 풍경이 사람을 물들이고,
마음속 깊은 곳의 그리움을 조용히 건드린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