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의 문장들_ 비의 문장들
시골의 문장들_ 비의 문장들
" 해빙비가 지나가면, 만 가지 일이 온다. "
한 낮이 지나자 비가 그치더니
잿빛구름이 서서히 겉이면서
흰구름 사이로 간간이 눈부신 햇살이
마구 쏟아져 내린다.
뜰 앞으로 나서니 어제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달래가 지난밤 내린 비를 머금고는
수줍은 듯 살포시 고개를 치켜들고는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에
연약한 이파리를 하늘거리면서
허리 부러진다고
아우성을 쳐 대고
복사꽃 가지에는 해비가 반가운 듯 가지마다
은 구슬을 꿰듯 물방울을 오롱조롱 꿰고는
동면에서 깨어난 듯 기지개를 켠다.
우중충한 거리는 대청소를 한 듯
깨끗한 것이 바라만 봐도 기분이 상쾌해지고
거리를 오고 가는 행인들의 발걸음 또한
가벼워 보이고
옷차림에서도 물씬 싱그러움이 봄내음이 묻어
해빙비가 내렸으니
농부들은 농사철이 다가왔으므로
앞으로는 줄줄이 사탕처럼 눈 코 뜰 사이 없이
일만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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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글에서 봄은 늘 '갑자기' 온다.
하루 종일 내리던 비가 멎고,
회색 구름이 천천히 물러나며,
구름 사이로 햇살이 잠깐씩 쏟아지는 순간.
세상은 금세 다른 표정을 짓는다.
나는 "어제는 보이지 않던 들꽃이
오늘 고개를 든다"는 장면이 좋았다.
봄은 늘 큰 사건으로 오지 않는다.
어제와 오늘 사이의 아주 작은 차이,
그 작은 차이를 알아차리는 순간에 온다.
들꽃은 부끄러운 듯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바람은 낮게 스쳐 지나가며,
젖은 땅은 봄 냄새를 더 또렷하게 내보낸다.
복사꽃 가지에 달린 물방울을 '은구슬'이라고 부르는 대목에서는 마음이 환해졌다.
비는 떠난 뒤에도 흔적을 남기는데,
아버지는 그 흔적을 '축축함'이 아니라
‘반짝임'으로 읽는다.
물방울을 털며 기지개를 켜는 가지를 보며,
나도 문득 생각한다.
내 안에도 겨울잠 같은 시간이 있었는데,
어떤 계기 하나로 이렇게 다시 펼쳐질 수 있을까.
그리고 이 글의 마지막이 참 현실적이어서 더 좋다.
해빙비가 내리면 농부는 농번기가 가까워졌음을 안다.
앞으로 "만 가지 일이 사탕처럼 줄지어 기다린다"는
말은 웃기면서도 짠하다.
봄이 낭만이기만 하던 시절은 지나고,
봄은 누군가에게 '시작되는 노동'이기도 하니까.
그럼에도 아버지의 글은 이상하게 가볍다.
비가 씻어낸 거리처럼,
마음도 한 번 씻긴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