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하고 뭐하세요?
대학생 때 친구와 옷을 사러 갔을 때의 일이다. 친구는 키가 크고 오목조목 예쁘게 생겼으며 말투도 다정했다. 우리는 학교에서 오랜 시간 같이 붙어 다니는 편이었다. 친구가 옷을 고르는 사이 나도 이것저것 보다가 옷 한 벌을 골라 전신 거울 앞에 섰다. 그런데 골라잡은 옷 대신 내 얼굴이 눈에 확 들어왔다. 집에서 작은 거울로 봤을 때와는 다르게 보기 싫은 부분이 두드러졌다. 부분 부분의 모양만 문제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전혀 정리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어, 이게 나였어?’ 눈은 괜찮네 했다가 코로 시선을 돌리면 그 자리가 아니잖아 싶고, 다시 입으로 연결되는 선이 조화롭지 못하고.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날 새 옷을 입은 친구는 환하게 나를 돌아보고 웃었는데 거울 앞에 선 나는 편하게 되받아 웃어주지 못했다.
생김새뿐 아니라 삶의 전반에서 나는 오랫동안 나를 미워했다. 사나운 마음을 품고 있어서인지 다른 사람의 가벼운 말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불만족스러운 환경과 조건을 만든 부모님에게로 쉽게 원망을 돌렸다. 그런 마음이 달려간 끝에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결국 내가 찾은 답은 멈추는 것이었다. 같은 방식으로 사는 나를 멈추는 것. 2017년 독서심리상담 수업을 찾아 참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책과 타인의 삶을 통해, 나조차 돌보지 않는 나는 누구보다 나를 공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동안 달려와 준 자신을 처음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자기계발서 결론 같은 이야기지만 나로 살아도 괜찮다는 느낌이 들면서 흔들리던 마음이 조금은 단단해졌다. 1년이 지나 수료증을 받는 날, 강사님은 “여러분 모두 참 아름답습니다.” 라고 하셨다. 그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그날 찍힌 사진에는 덜어낸 무게만큼 편안해진 내가 다정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벌써 일 년이 지났지만 퇴직은 아직도 내 인생의 큰 분기점이라서 예전과 지금의 삶을 글에서 비교하며 쓰게 되는데, 쓰다보면 왠지 예전 삶은 다 모자라고 덜 깨우치고 내가 직접 선택한 삶이 아니었다는 식으로 전개되어 버린다. 한편으로 퇴직 이후의 일상이 훨씬 괜찮음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기도 할 것이다. 실제로 나아진 부분이 많지만 되풀이되다보니 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삶은 그렇다면 누가 강제한 삶이란 뜻인가? 모자란 나는 내가 아니었단 뜻인가? 지금의 내가 마음에 든다는 건 더없이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전의 나를 지금보다 못한 존재로 만드는 건 무슨 판단에서일까.
비교하는 마음을 생각하던 중에 고 미숙 작가님이 쓴 <몸에서 자연으로, 마음에서 우주로>에서 눈에 띄는 문장을 만났다. 숫타니파타에서는 자만의 종류를 세 가지로 나누었다고 하는데 첫째, 나는 우월하다(당연히 자만), 둘째, 나는 열등하다(자만의 뒤틀린 형태), 마지막으로, 나는 동등하다(이것 역시 어떤 기준을 만들었기에)가 그것이라고 한다. 결국 우월하다, 열등하다, 동등하다는 다 같은 자만의 산물이라는 내용이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과 같이, 지금의 나는 괜찮고 예전의 나는 그렇지 못했다고 거리를 두어 구분하는 것 또한 자만심에서 나온 생각이 아닐까. 지금의 나는 과거로부터 여러 모습의 내가 분절 없이 이어진 결과물이지 않은가.
여기까지 쓰고 보니 내가 왜 비겁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알 것 같다. 나는 나의 퇴직을 변명하고 있는 중이었다. 퇴직 후가 나아보여야 한다는 생각. 그래서 비교가 시작되었고 내 과거는 실제 이상으로 모자라야 안심이 되었던 것이고. 예전의 내가 마음에 안든 부분도 있지만 그렇게 살았던 이유가 그 시기에는 분명히 있었다. 지금은 조금 여유 있게 바라볼 시간이 생긴 것이다. 스스로 결정했으면서 당당하지 못했다. 선택에 책임을 져야하니까 과거의 나를 끌어들인 것이다.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산다는 게 폼 나기만 한 건 줄 착각했다. 그냥 내가 뿌린 씨를 내가 거두는 거다. 아, 근데 좀 후련하다. 나를 가두고 있던 틀이 하나 벗겨진 느낌. 마음에 안 드는 자신에게 웃을 수도 없었던 그 옷가게 거울 앞의 나에서 그래도 몇 발자국 뗀 느낌이다. 이것은 비교가 아니라 나의 재발견. 그렇다고 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