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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리하는 김선생님 Mar 01. 2024

메추리알을 몇 개 먹을 거예요?

오늘 반찬은 한국어입니다   제3화  메추리알장조림




[ 오늘의 반찬 ] 

몇 N(단위명사)


메추리알장조림을 몇 개 먹을 거예요?     

샤인머스캣 한 송이 주세요.      

공책 한 권, 소주 두 병, 피자 세 조각, …… 학생 열두 감자, 강아지 두 꼬리





  집집마다 식탁에 자주 올리는 반찬이 한두 개씩은 있을 것이다. 김치처럼 매일 올라가는 전통적인 터줏대감은 이번에는 논외로 하겠다. 가족 구성원들의 입맛이나 선호도, 또는 요리하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자주 먹는 반찬 중에서도 특히나 더 자주 만들게 되는 그런 반찬 말이다.



  우리 집 식탁의 단골 반찬은 메추리알장조림이다. 반찬 계획에 대해 남편과 딱히 의논하지는 않는 편이었기에, 메추리알을 자주 먹는다는 걸 한동안 인지하지 못하고 지냈다.



  우리가 결혼을 한 이후로 만드는 요리들은 모두 간단히 사진을 한 장 찍어 SNS에 올리고 있다. 지하철로 오가는 출퇴근길에 책을 읽는 것마저 무료해지면 SNS에 접속해 내가 만든 음식 사진들을 보면서 잠시잠깐의 시간 여행을 떠나곤 한다. 이날 이 음식을 먹었지, 이거 만들기 좀 어려웠는데. 이때는 음식 색을 잘 못 냈는데 지금은 더 잘 만들 수 있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가다 보면 한숨 나오는 지옥철에서도 잠깐씩 혼자 뿌듯함을 느낄 여유가 생겨서 좋다.



  그날도 사람들 사이에 끼인 채 별생각 없이 휴대폰으로 음식 사진들을 쭉 내려 보고 있었는데, 유독 자주 보이는 반찬이 하나 있었다. 화려한 색감의 메인 메뉴에 가려 눈에 잘 띄진 않았지만, 가만히 살펴 보니 일주일에 두세 번씩, 과장을 조금 보태면 한 주도 빠짐없이 식탁에 올라오는 것 같았다. 동글동글한 메추리알 장조림. 작은 반찬그릇 안에 열 알 남짓의 메추리알들이 서로 비집으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걸 보니 꼭 출퇴근길의 내 모습 같았다.     








  우리는 왜 메추리알장조림을 자주 먹게 되었을까? 우선 메추리알장조림은 취향을 타지 않고 대부분이 좋아하는 반찬이다. 나도 계란이나 메추리알 같은 건 곧잘 먹고, 반찬으로 메추리알장조림을 내는 날에는 남편도 밥을 더 잘 먹었던 것 같다. 즉, 가족 구성원의 입맛과 선호도라는 일차 조건을 만족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만들기도 굉장히 쉽다. 물론 원형 그대로의 메추리알을 직접 삶고 껍데기를 벗기는 작업을 포함한다면 상당히 번거로운 일이겠지만, 요즘은 마트에서 이미 다 삶아진 상태에 껍데기까지 벗긴 깐메추리알을 저렴하게 팔고 있다. 깐메추리알 하나만 준비한다면 거의 다 만든 거나 다름없다고 할 정도로 요리법이 간단하다. 이로써 요리하는 사람의 편의까지 충족시키는 메뉴라는 것을 알고 나니, 우리 집 식탁에 메추리알장조림이 매번 올라올 수밖에 없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앞에서는 놓친 중요한 조건이 하나 더 있다. 반찬 만들기가 스트레스를 유발하지 않으려면 반찬을 만드는 빈도수를 줄이는 것이 좋다. 멋진 모습을 자랑하는 메인 메뉴와는 달리, 반찬은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식탁에서도 좁은 자리 한 켠만 배정받기 때문에 만드는 보람이 조금 작은 편이다. 평생을 주부로 살아오신 우리 어머니들께서도 집안일은 해도 해도 티가 잘 안 난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지 않았나? 집안일처럼 반찬도 오랜 시간을 투자해 열심히 만들어도 크게 티가 나지 않는다. 귀찮게 하면서도 생색내기는 어려운 메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예전부터 국민 반찬들은 대개 양 많고 맛있고 한번 만들면 오래 먹을 수 있는 멸치볶음 같은 것들로 구성되었나 보다. 메추리알장조림은 이런 국민 반찬의 조건에 딱 부합하는 기특한 녀석이다.    






 


  지금부터 원래도 간단한 메추리알장조림을 더욱 쉽게 만드는 방법을 소개하려 한다. 우선 대형마트나 온라인 커머스를 통해 깐메추리알을 한 봉 산다. 깐메추리알은 보통 한 봉지에 500그램에서 1킬로그램 정도인데, 우리 집은 2인 가구라서 나는 매번 500그램짜리를 산다. 장조림이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반찬의 대명사라고는 해도 시간이 많이 지나면 아무래도 맛이 좀 떨어지기 때문이다.



  넉넉한 크기의 스테인리스 체를 하나 준비하고, 깐메추리알 봉지를 뜯어 체에 과감히 모두 부어 버린다. 이때 여유가 있다면 한번 귀를 기울여 봐도 좋다. 투두두, 메추리알이 한번에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작은 알들이 서로를 소심하게 밀쳐내는 통통, 소리가 미세하게 들려 미소가 지어질 테니까.



  체에 올린 메추리알을 물로 가볍게 헹군다. 넓은 웍에 물을 500밀리리터 받는다. 웍이 없다면 냄비로도 충분하다. 불을 켜고 육수 코인을 한 알 퐁당 빠뜨린다. 물론 직접 멸치 다시마 육수를 낸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고, 원재료가 그대로 든 육수 내기용 팩을 사용해도 좋다. 빠르고 편한 요리를 지향하는 나는 그냥 육수 코인을 사용한다. 보관도 간편하고 육수를 낸 후 뒤처리를 할 필요도 없으니 편리함으로는 제일이다.



  육수가 바글바글 끓어오르고 육수 코인이 다 녹으면 잠시 불을 끄고 양념을 추가한다. 진간장 또는 맛간장 200밀리리터, 맛술 3큰술, 설탕 1큰술을 넣는다. 그리고 올리고당을 꺼내 동그랗고 크게 휘휘 두 번 짜 준다. 다시 한번 불을 올리고, 물이 끓을 때까지 양념 재료를 잘 섞으며 기다린다. 그 후 메추리알을 다 넣고, 불의 세기를 중불로 맞춘다. 볶음용 주걱으로 중간중간 크게 뒤섞어 주면서 메추리알에 간장 양념이 조금씩 스며드는 걸 지켜보고 있으면 출처를 확인할 수 없는 평온한 마음이 피어오른다. 얼굴을 향한 수증기 사이로 언뜻 다가오는, 식욕을 자극하는 짭짤하고 달콤한 냄새는 즐거운 덤이다.



  메추리알 외에 다른 부재료를 넣을 계획이라면 양념이 절반 정도 스며들었을 때가 적당하다. 부재료로는 꽈리고추나 새송이버섯이 무난하다. 꽈리고추를 추가하면 특유의 향이 전체적으로 배어, 단순한 반찬이 아닌 근사한 요리 같은 맛이 난다. 어디에서나 저렴한 가격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새송이버섯은 고기처럼 쫄깃한 식감을 가지고 있어 메추리알과 함께하기 좋은 동료다. 다만, 장조림 안의 새송이버섯은 늦어도 이삼일 안에는 다 먹는 것이 좋다. 그 이상으로 시간이 지나면 버섯에 간이 과하게 배어 결국 버리게 될 때가 많다. 살짝 매콤하게 먹고 싶을 때에는 청양고추 하나를 어슷 썰어 넣는다. 다 귀찮으면 부재료 없이 메추리알 하나만으로 만들어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 메추리알장조림은 이렇게 넉넉한 인정을 보이는 반찬이다.



  육수가 처음 양의 삼 분의 일 정도가 될 정도로 많이 줄었다 싶으면 불을 약불에 가져다 놓고 다시금 여러 번 크게 뒤적인다. 명색이 장조림인데 색이 너무 여린 것 같다면, 이때 사용할 비장의 무기가 있다. 바로 노추다. 노추는 중국 요리에서 사용하는 조미료인데 맛간장처럼 짜고 달짝지근한 맛이 난다. 맛간장이 걸쭉한 농도로 새카맣게 농축된 느낌이라고 하면 적절할까. 노두유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노추는 맛을 내기보다는 간장을 베이스로 한 조림이나 볶음 요리에 색을 내는 용도로 주로 활용하는 재료다. 여린 연갈색 상태의 메추리알에 1티스푼 정도만 추가하면 표면이 금세 진하고 어두운 갈색으로 변한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은 법이라, 간장을 중심으로 한 요리를 할 때면 끝무렵에 꼭 노추를 추가하는 편이다.



  국물을 얼마나 남길지는 요리사의 자율에 맡긴다. 소고기 장조림처럼 간장 양념을 국물처럼 자작하게 남기는 게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지만, 나는 물기 없이 졸인 방식을 더 선호한다. 마치 짜장 라면을 끓일 때와 같다고 생각하면 편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면 아래에 촉촉하게 국물이 남아 있는 걸 좋아하지만, 국물 없이 바싹 볶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남편은 평소 촉촉한 짜장 라면을 선호하니 메추리알장조림도 간장 양념이 자작한 편을 더 좋아하겠다는 깨달음이 든다. 왜 이제껏 한 번도 장조림 국물에 대한 선호도를 묻지 않고 지냈을까? 다음에 메추리알장조림을 만들 땐 꼭 물어 봐야지.    



 

  불을 끄고 통후추를 두세 번 갈아준 다음, 메추리알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반찬통에 옮겨 담는다. 나에게 메추리알장조림은 완성한 직후 가장 행복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요리이기도 하다. 뜨거운 웍에서 조금 전 막 빠져나온 터라 열기를 가득 머금고 있어 반찬통 옆면에 김이 서린다. 동글동글 작고 통통한 메추리알들이 서로 꼭 붙어 모여 있는 모습. 참 귀엽기도 하지. 윤기로 빛나는 갈색 표면은 갓 만든 메추리알장조림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 장면이다.



  갓 완성한 메추리알장조림을 맛본 적이 있는가? 아직 없다면 진정한 메추리알장조림을 먹어 본 적이 없는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고, 인생에서 뜨겁게 감탄할 기회를 하나 놓치고 살아온 것이라고도 단언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자, 늦기 전에 어서 포크를 준비하시라. 기회는 지금으로부터 약 5분 남짓한 시간 동안만 주어진다.


 

  이 열기가 가시기 전에 빨리 한 입. 혀가 델 수 있으니 처음에는 한쪽 어금니로 살짝만 물어 메추리알 속의 뜨거운 기운을 조금 빼야 한다. 그리고 입안에서 호 호. 이제 됐다. 입을 다물고, 맛을 느끼며 천천히 씹어 보기를 바란다. 탱글한 겉면의 흰자를 부수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미니 사이즈 노른자를 혀로 으깬다. 눅진하게 느껴지는 노른자의 질감은 꼭 아보카도를 먹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그리고 코를 통해 서서히 숨을 내쉬면, 따뜻한 김과 함께, 오래 배어들었기에 결코 가볍지 않고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달콤하고 짭짤한 양념 맛이 입과 코 그 사이 어디에선가 느껴진다.



  동네마다 반찬가게가 여럿 있는 요즘 세상에 굳이 왜 시간을 쪼개어 직접 반찬을 만들고 있느냐 묻는다면, 나는 그저, 갓 만든 메추리알장조림을 맛본 적이 있는지 되묻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려 한다.     








  메추리알장조림을 만든 날에는 남편도 연신 함박웃음을 지으며 식탁의자에 미리 앉아 있다. 식기 전에 조금 먹어 봐, 하며 작은 그릇에 메추리알을 몇 알 담아 내준다. 식사 때 곁들일 반찬으로 만든 거긴 하지만, 지금의 이 맛은 지금이 아니면 절대로 느낄 수 없으니까. 냉장고에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지금의 이 감동은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마니까. 밥과 국을 뜨고 다른 음식들을 내면서 빠르게 묻는다.



  “오빠, 메추리알 몇 개 먹을 거야?”


  “어?”


  “메추리알 몇 개 먹을 거냐고.”


  “어……. 한 열 개? ……근데 그걸 왜 물어봐?”


  “……어?”



  별뜻 없이 한 질문에 남편은 당황하고, 이어진 남편의 질문에 나 역시 말을 잃는다. 얼 타고 있는 나에게 남편은 살면서 그런 질문을 받아보는 건 처음이라고, 특이한 질문이라고, 보통은 그냥 적당히 담고 모자라면 더 꺼내지 않냐고 이야기해 주며 킥킥거린다.



  “진짜 좀 특이해. 지난번에는 샤인머스캣 몇 알 먹을 거냐고도 물어보고.”



  듣고 보니 질문이 좀 이상하긴 한 것 같다. 나 또한 누군가로부터 메추리알 몇 개 먹을 거냐는, 샤인머스캣 몇 알 먹을 거냐는 질문을 살면서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런 이상한 질문을 나는 대체 왜, 아무런 의심도 없이 내지른 걸까?




  나는 세 자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우리 가족은 모두 다섯 명이다. 그러니까 결혼하기 전의 우리 가족 말이다. 아버지, 어머니, 나, 여동생, 여동생. 좁지도 크지도 않은 집에서 두 명의 여동생과 함께 자랐는데, 다른 집 형제 자매들과는 다르게 우리 자매들은 먹을 걸로 싸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이 차이의 영향도 분명히 받았을 것이다. 둘째와는 네 살 터울, 막내와는 열한 살 터울이 나는 맏언니인 내가 고작 먹을 거 가지고 동생들과 다툰다면 그 부끄러움은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옳을 테니.



  욕심도 질투도 많은 내가 부끄럽지 않은 맏이로 남을 수 있었던 데에는, ‘아이스크림 할당제’로 늘 정확한 공평함을 추구하셨던 부모님의 도움이 컸다고 생각한다. 슈퍼에서 막대 아이스크림을 사오실 때마다 부모님께서는 어떤 아이스크림이든 총 개수에 관계없이 종류별로 세 개씩, 우리 셋이 각각 하나씩 배당받을 수 있게 구성하셨다. 그래서 우리 집에선 이런 질문과 대답이 심심찮게 들려오곤 했다. 언니, 아이스크림 얼마나 먹었어? 나 초코는 다 먹었어. 쭈쭈바랑 딸기요거트 하나씩 남았어. 성인이 된 후 주변 사람들과 가족 일화를 나누다가 우리 집의 아이스크림 할당제가 꽤나 독특한 방식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 집의 방식이 정답인 것은 절대 아니지만, 다른 집 형제 자매들은 간식 가지고 자주 싸우곤 했다고 하니 적어도 질투 많은 나에게만큼은 아주 효과적인 방식이었다고 본다.



  남편에게 아이스크림과 관련된 어릴 적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주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그가 한 가지 의문을 더 제기했다.



  “그런데 있잖아. 보통은 ‘많이 먹을 거야?’, ‘얼마나 먹을 거야?’ 뭐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나?”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여실히, 그리고 속절없이 깨닫는다.

  아이고 이거 직업병이구나.     








  “교실에 책상이 몇 개 있어요?”


  “교실에 책상이 열세 개 있어요.”


  “시몬 씨 책상에 펜이 몇 개 있어요?”


  “시몬 씨 책상에 펜이 두 개 있어요.”


  “우리 반에 아제르바이잔 사람이 몇 명 있어요?”


  “우리 반에 아제르바이잔 사람이 한 명 있어요.”



  1급 학생들은 한국어 수업 2주차에 단위명사에 대해 학습한다. 1주차에 한글 자모음을 떼고, ‘저는 크리스입니다.’ ‘저는 독일 사람입니다.’ ‘프랑스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쉬운 문장들만 공부하다가 갑자기 암기의 늪에 처음으로 살짝 발을 담그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물은 ‘개’, 동물은 ‘마리’, 사람은 ‘명’, 나이는 ‘살’. 2주차에 외워야 하는 단위명사는 이렇게 네 개가 전부이다. 나중에 사물 단위명사도 ‘권, 병, 벌, 장, 잔, 송이, 줄, 판, 조각’ 등으로 나뉘어 제시될 때에는 미국, 독일, 이탈리아 등의 서양어권 학생의 다수가 공부 포기하고 싶어서 책상에서 헤드뱅잉을 한다. 단위명사 수업은 그동안 조용히 자신의 책상을 지키며 대답만 하던 중국 학생들이 빛을 발하는 시간이다. 한국어 단위명사는 대부분 한자어이기 때문에 중국어 단위명사와 동일한 것이 많고, 동일하지 않더라도 매우 유사한 시스템을 보이기 때문이다.



  1급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파트 중 하나이기에, 2주차부터 중간시험 전까지 교사는 ‘몇 개 있어요?’, ‘몇 명입니까?’, ‘몇 마리예요?’ 등의 단위명사 질문을 수업 중간중간 섞어 주는 것이 좋다. 몇 주 연속으로 수업 시간마다 그런 질문들을 반복하고 있으니, 집에 있는 토종 한국인 남편에게도 자꾸 묻는 거다. 오빠, 메추리알 몇 개 먹을 거야? 샤인머스캣 몇 알 씻어 줄까?




  단위명사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야 두뇌 풀가동 상태일 테지만, 수업을 하는 교사는 사실 좀 지루할 때도 있다. 초반에는 하나, 둘, 셋, 넷 숫자 연습도 계속 시키기 위해서, 대답이 두 마리든 다섯 명이든 서른다섯 살이든 무조건 ‘하나’부터 숫자 세기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식으로.



  “토모코 씨 나이가 몇 살이에요?”


  “저는 서른다섯 살이에요.”


  “여러분, 토모코 씨 나이가 몇 살이에요? 같이 시-작! 하나, 둘, 셋, 넷 …… 서른셋, 서른넷, 서른다섯 살이에요.”



  유치원에 들어가기도 전에 완벽하게 마스터한 한국어 숫자 세기를 다시 시작하는 이 기분이란. 좋게 말하면 새롭지만, 전날 잠이 조금이라도 부족했다면 숫자 세다가 하품 나오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그런데 딱 한 번, 지루한 숫자 세기를 하다가 상쾌하고 짜릿하게 정신이 깨어난 경험이 있다. 몇 년 전에 만난 우크라이나 여학생이었는데, 종이에 영어로 ‘tail’을 적고서는 한국어로 이걸 뭐라고 하냐고 물었다. ‘꼬리’라고 한다고 가볍게 알려준 후 돌아서려는데, 이어진 질문이 내 언어관을 뒤흔들었다.



  “우리 집에 개가 있어요. 우리 개 꼬리가 귀엽습니다. 한 마리, 두 마리, 아니요. 개 한 꼬리, 두 꼬리, 세 꼬리…… 안 돼요?”



  수업 시간에는 쾌활하게 웃으며 너무 귀여운 말이지만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강아지는 동물이니까 ‘마리’를 사용해서 세어야 한다고 대답해 주었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끔가다 한 번씩 머릿속에서 ‘안 돼요?’ 하는 음성이 들린다. 우리 집에 강아지 두 꼬리가 있습니다. 진짜 안 돼요?     







  학부 1학년 때 수강한 언어학개론 첫 시간에는 언어의 여섯 가지 특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 중 하나인 언어의 사회성은, 언어는 사회적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사회적 약속이니 어느 한 개인이 마음대로 바꾸어 말할 수 없다는 개념이다. ‘공책’이라는 단어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멋대로 ‘오늘부터 ‘공책’을 ‘팔랑파랑’으로 바꾸겠노라’와 같은 선언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분명 지당한 말씀이시다.



  알랭 드 보통의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주인공은 자신의 연인 클로이에게 ‘너무 남용되어 닳고 닳아버린 사랑이라는 말 대신’ ‘나는 너를 마시멜로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클로이는 그의 말뜻을 완벽하게 이해한다. 하정우와 공효진이 출연한 영화 《러브 픽션》에서도 같은 의미로 ‘나는 너를 방울방울해’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말을 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 이 파격적인 언어학적 반항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직 그 단어였기에’, ‘오직 그 단어로만’ 그 순간의 마음 표현이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종일 이리저리 치인 날의 퇴근길이면 내 휑한 마음속을 모두가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너무 지친 날은 하지 못하지만, 기운이 조금 남아 있을 때엔 가끔씩, 나만의 단위명사를 만들어 본다. 우리 반 학생들의 동그란 머리들은 꼭 알감자가 모여 있는 것 같으니까 학생 한 감자, 두 감자, 세 감자. 우리 집 강아지 두 마리는 오늘 내가 늦었다고 분명히 째려볼 거니까 한 삐침, 두 삐침……



  조금 전까지만 해도 냉장고에 들어갔다가 나온 메추리알장조림 중 한 알로 맥없이 지하철에 실려 가고 있었지만,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언어학적 반항으로써, 방금 만든 뜨거운 메추리알장조림이 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달콤 짭짤한 메추리알장조림. 5분 후에도 이렇게 뜨겁고 맛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메추리알 한 아보카도, 두 아보카도, 세 아보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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