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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리하는 김선생님 Mar 02. 2024

김치볶음밥 위에 계란후라이가 있어요

오늘 반찬은 한국어입니다   제4화  김치볶음밥




[ 오늘의 반찬 ] 

위치어 [위, 아래, 앞, 뒤, 옆, 오른쪽, 왼쪽, 안, 밖]

N(명사)1 [위치어]에 N(명사)2이/가 있다/없다


 김치볶음밥 에 계란후라이가 있습니다.     

 제 휴대폰 에 어머니가 있어요.     

 네 위, 아래에 사람 없다!




  “취미가 뭐예요?”


  “아, 저는 요리하는 걸 좋아해요.”


  “와, 그럼 맛있는 음식 매일 만드시겠어요. 남편 진짜 좋겠다.”


  “어……. 매일은 아닌데…….”



  취미가 요리라고 해서 매일 요리를 하고 싶어지는 건 아니다. 나도 요리하기 싫은 날이 있다. 썰기, 다지기, 삶기, 끓이기 등의 과정이 번거롭거나 귀찮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의 수고로움을 요구하는 메뉴는 만드는 과정에서 오는 뿌듯함이 커서 그런지 오히려 더 재미있다. 나에게 요리하기 싫은 날은, 그저 입맛이 없는 날이다.



  사람들은 왜 요리를 할까? 요리엔 전혀 흥미가 없는데도 단지 의무감 하나 때문에 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우리 엄마가 그렇다. 부엌에서 가족들의 식사를 준비하시는 엄마의 모습은 어려서부터 쭉 익숙했던 풍경이었다. 엄마가 만들어 주신 음식들도 대다수가 맛있었기에, 항상 우리 엄마는 요리를 잘하고 좋아하신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나도 성인이 된 후 엄마를 따라 요리를 시작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 이런저런 음식을 만들며 즐거워하는 딸아이를 가만히 보며 엄마는 물으셨다. 정말 순수하게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넌 그게 재미있니? 진짜 신기하다.”



  엄마는 지금껏 한 번도 요리가 재미있게 느껴진 적이 없다고 하셨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라 좀 놀랐고 퍽 슬펐다.




  영어권에서 온 학생들은 한국어 문장 서두를 ‘불행히’로, 좀 어색하게 시작할 때가 있다. 영어의 ‘Unfortunately,’를 한국어로 그대로 직역한 데서 오는 실수 아닌 실수이다. 우리 엄마의 이야기는 이렇게 작문할 수 있겠다. ‘불행히, 엄마는 요리를 하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내겐 요리의 의무가 주어지지 않았고, 그 덕분에 순전히 내가 먹고 싶고 만들고 싶은 요리만 하고 살았다. 먹고 싶은 음식을 다른 누구도 아닌 온전히 내 입맛에 맞추어 만들어 먹는 재미는 생각보다 컸다. 그래서인지 입맛 없는 날에는 요리를 하고 싶은 마음도 함께 사라져버리곤 한다. 배는 슬슬 고프고 뭐라도 먹기는 해야 하는데, 딱히 먹고 싶은 음식이 떠오르지도 않는 그런 날. 그런 날마다 김치볶음밥이 우리 집 식탁을 반갑게 두드린다.     








  김치볶음밥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세상은 넓고 입맛에도 호불호가 나뉘니 그런 사람도 당연히 존재하겠지만, 아직까지 나의 자그마한 세계에서는 김치볶음밥에 불호를 외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김치랑 밥만 있으면 언제든 후다닥 만들 수 있는 음식. 묵은 김치로 만들면 오히려 더 맛이 좋아 김치의 숙성 정도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다 식은 밥으로 만들어도 밥알을 생생히 느끼며 먹을 수 있는 음식. 누가 만들어도 맛있고, 대충 만들어도 맛있는 음식. 밥 생각이 없다가도 ‘김치볶음밥’이라는 다섯 글자를 들으면 거짓말처럼 군침이 싹 도는 그런 음식.     



  김치볶음밥의 재료는 김치, 밥, 식용유로 정말 단출하다. 이 세 가지 재료만 가지고 설렁설렁 볶아도 중간 이상의 맛은 보장하나, 이미 김치볶음밥을 생각한 시점부터는 잃었던 입맛을 되찾아버렸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더 맛있게 만들기로 한다. 재료는 다음과 같다. 신김치, 당일 짓고 일부러 식힌 밥, 통조림 햄, 버터, 참기름, 고춧가루, 김가루, 통깨.



  가장 먼저 냉장고 문을 열고 김치를 꺼낸다. 적당히 익은 김치나 신김치를 써야만 제맛이 난다. 신김치는커녕 배추 고유의 맛이 살아 있는 새로 담근 김치만 있다면 그대로 김치통 뚜껑을 닫고 배달 음식을 주문하는 게 현명하다. 조금 전 김치볶음밥은 누가 만들어도 맛있다고 했지만, 새로 막 담근 김치로는 유명 셰프의 어머니, 아니 증조할머니가 와도 실패할 게 뻔하니까 말이다.



  신김치를 적당량 꺼낸 후 1센티미터 너비로 촘촘히 썰어 둔다. 여기에서의 적당량이란 ‘이건 좀 많나?’ 싶을 때까지의 양을 이른다. 김치 양이 너무 적으면 조리 중간에 회생 조치를 취하기가 다소 까다로우나, 필요한 양보다 많이 넣어버렸다면 밥도 더 넣으면 문제가 간단하게 해결된다.



  통조림 햄도 가로 세로 높이 1센티미터의 정육면체 모양으로 썰어 놓는다. 2인분 기준으로 작은 캔 하나면 충분하다. 평소 자극적인 음식을 즐기지 않는 편이라면 염분이 비교적 적은 제품을 고르는 것이 좋다. 베이컨이나 대패삼겹살도 괜찮은 선택지에 속하지만, 학창 시절의 추억의 맛을 제대로 소환하고 싶다면 역시 통조림 햄이 정답이다.



  프라이팬보다는 넓은 웍을 택해야 재료를 볶는 중 밥알이 밖으로 튀어나가 버리는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불을 켜고 웍에 버터를 두른다. 도마에 차곡차곡 썰어 둔 김치와 통조림 햄을 한번에 웍에 쏟아낸다. 나무주걱이나 실리콘 주걱으로 천천히 볶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잘게 썬 재료들에 버터로 만든 옷을 입힌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볶는다. 연기가 오르면 불을 조금 줄이고 좀더 빠르게 달달 볶는다. 버터에 김치를 볶는 냄새는 침실에서 한숨 자고 있던 남편도 깨울 만큼, 끝내주는 식욕 자극제이기도 하다.



  김치가 버터를 완전히 머금고 숨이 죽었다면 이제는 밥을 투하할 시점이다. 밥통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밥이든 냉동실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남은 밥이든, 김치볶음밥의 성패를 좌우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기왕 버터까지 썼다면 밥도 제대로 준비해야 면이 산다. 당일 지었으나 일부러 식혀 놓은 밥이 좀 귀찮더라도 제일 좋다. 신선한 쌀의 단맛과, 찬밥으로 만든 볶음밥의 고슬고슬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어서이다. 다 번거롭게 느껴진다면 즉석밥을 전자레인지에 1분만 돌린 후 사용해도 비슷한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볶아 놓은 김치에 밥을 잔뜩 올린 다음, 그 위에 고춧가루를 살살 뿌린다. 고춧가루를 조금 넣어야 빨간 색감이 살아난다. 예쁜 청담동 레스토랑의 2만원짜리 김치볶음밥 맛을 내고 싶으면 소고기 다시다를 2인분 기준 반 스푼 넣으면 된다. 그렇게 양념을 첨가한 밥과 김치를 팔이 아플 때까지 열심히 볶는다. 혹시나 요리 끝무렵에 밥알이 서로 뭉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면 미온수를 아주 조금 부어 다시 바싹 볶으면 뭉친 밥알이 떨어진다. 불을 끈 후, 참기름을 한번 가볍게 두르고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볶는다.



  음식으로서의 김치볶음밥 만들기는 여기에서 마무리된다. 하지만 조금은 더 욕심을 내어 보자. 김치볶음밥을 번듯한 요리로 탈바꿈시켜줄 수 있는 재료 역시 김치만큼이나 쉽게 손에 잡히는 자리에 있을 것이므로.



  날계란을 두 알 꺼낸다. 납작한 팬에 식용유를 넉넉히 두르고 계란을 깬다. 센 불로 튀기듯 익힌다. 가장자리를 바싹 튀긴 중국집 스타일의 계란후라이. 완성한 김치볶음밥을 접시에 담는다. 아직 지글거리는 소리가 나는 뜨거운 계란후라이를 그 위에 올린다. 계란후라이 옆에 통깨를 뿌리고, 그 아래에 김가루를 자리시킨다.     



  숟가락으로 반숙 상태의 계란 노른자를 과감히 푹 찌른다. 밥알 사이로 길이 하나 트이고 그 길을 따라 노른자가 흘러내린다. 빨간 화산에서 노란 용암이 흘러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백숙 먹으러 간 계곡에서 보았던 작은 폭포를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 계란 용암이 지면에 닿기 전에 서둘러 한술 뜬다. 오래 볶아 신맛이 사라진 김치와 짭짤한 햄은 처음부터 함께 태어나기라도 했던 것처럼 완벽하게 잘 어우러진다. 씹는 동안 알알이 버터 옷을 입은 밥알의 고슬고슬함이 느껴지는데, 좀 짜고 자극적이지 않나 싶을 때쯤 너그러운 노른자가 혀를 감싸며 달랜다.     



  제대로 먹을 줄 아는 사람이 제대로 만든 김치볶음밥 위에는 언제나 계란후라이가 올라가 있다. 김치볶음밥이라는 하나의 제목으로 여러 식재료가 명랑하게 어우러진 모습을 바라다보면 마치 작가의 치밀한 계획하에 완성된 미술 작품을 보는 듯하다. 근경에서부터 원경으로 차근차근 시선을 옮기다 보니, 김치볶음밥 한 그릇으로 한 시간 분량의 한국어 수업을 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치볶음밥 위에 계란후라이, 계란후라이 옆에 통깨, 통깨 아래에 김가루, 밥 안에 햄, 햄 오른쪽에 김치, 김치 왼쪽에 햄…….        








  한국어 위치어는 내가 특히나 좋아하는 수업 재료다. 위, 아래, 앞, 뒤, 옆, 오른쪽, 왼쪽, 안, 밖……. 의자를 하나 놓고 그 근처에서 펜이나 휴대폰 같은 사물 하나를 옮겨 가며 보여 주면, 국적에 관계없이 모든 학생들이 한번에 바로 이해한다. 연습 단계에서는 교사가 학생 사이사이로 자리를 옮겨 다니며 움직일 수도 있고, 학생들도 교실의 사물이나 자신의 몸 등을 이용해 비교적 동적인 공부를 할 수 있으니 흥미로워한다.



  매 학기 보게 되는 상황인데, 외국인 학생들은 다른 위치어는 쉽게 잊어버려도 ‘위’ 만큼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 아마 가장 처음 배운 위치어인 데다가 발음이 쉽다는 것도 한몫 했을 것이다. 위치어를 사용해 문장을 하나씩 만들어 보라고 하면 대다수가 ‘책상 위에 연필이 있어요.’, ‘의자 아래에 가방이 있어요.’, ‘지우개 옆에 공책이 있어요.’처럼 ‘위’, ‘아래’, ‘옆’과 당장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사물들을 이용해 문장을 말한다.   


  

  아주 가끔, 가슴 먹먹하게 하는 문장을 만드는 친구들도 있다. ‘휴대폰 안에 어머니가 있어요.’는 향수병에 힘들어하던 학생이 어머니와의 영상통화를 생각하며 만든 문장이다. 누군가 한 명이 그렇게 가족 이야기를 하면 다른 학생들도 가족과 관련된 추상적인 문장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검지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할아버지가 위에 있어요’라고 말한 학생도 있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낯선 한국어로 말할 때 그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이미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께서 ‘위’에 ‘있다’는 말이, 모순적이면서도 희망적으로 느껴졌다.     




  학생들이 ‘위’만큼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것처럼, 나에게도 몇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 하나 있다. 항상 적극적이고 쾌활했던 독일 남학생이 한 말이다.



  “저는 안에 공, 영이 있어요.”



  외국인이 쓰는 요상한 한국말에 익숙한 나도 무슨 뜻인지 쉽사리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학생에게 부연 설명을 요청했고, 뒤이은 설명에 잠시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저, 안에 공(0), 영(0). empty입니다. 없습니다.”



  그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을 툭 뱉어냈다. 손바닥을 자신의 가슴 위에 얹고서, 자기 마음이 텅 비었다고 말한다. 모두의 앞에서. 그때 내가 어떤 대답을 해주었는지는 도무지 애를 써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순간마저도 언제나처럼 유쾌하게 씩 웃던 그의 미소 위에서 언뜻 엿볼 수 있었던 눈빛이 참 공허했다는 것만큼은 아무리 애를 써도 잊히지가 않는다.




  이건 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우리 반 학생들처럼 나도 꽤 오랫동안 ‘위’를 가장 쉽게 생각하며 살았다. ‘다행스럽게도’인지 ‘불행히’인지, 성적이든 작은 지위든, 스스로 노력한 정도보다 꽤 수월하게 ‘위’를 향해갈 수 있었으니까. 그런 내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교만한 태도를 보일 때마다 엄마는 잔뜩 굳은 음성으로 ‘니 위, 아래에 사람 없다!’ 이렇게 경고하셨다. 그땐 물론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도 잘 안 됐고 설령 부분부분 이해가 됐다 해도 들을 생각이 없었다.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고, 크게 넘어져도 보고 몰래 울음을 터뜨려도 보면서, 중요시하는 위치어의 우선순위가 점차 바뀌게 되었다. ‘공/영(0)’의 순간이 닥칠 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한 건 아직 갖지 못한 ‘위’가 아닌, 늘 나와 함께했던 ‘옆’들 덕분이었다는 걸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언제나 김치볶음밥 ‘위’에 있는 계란후라이 외에도, 그 ‘옆’과 ‘아래’, ‘안’을 지키는 각각의 재료들이 저마다 사랑스러운 구석이 있다는 걸 지금은 알고 있다. 그것들이 하나의 미술 작품처럼 보이기까지는 때때로 처절한 노력이 필요했다는 것 또한. 이제 나는 김치볶음밥을 가득 담은 내 접시 바로 ‘앞’에, 사랑하는 사람 몫으로 준비한 또다른 접시가 놓여 있다는 것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서른 넘어 하는 말로는 퍽 창피하지만, 다행스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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