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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리하는 김선생님 Feb 28. 2024

오늘도 제육볶음을 먹어요

오늘 반찬은 한국어입니다   제1화  제육볶음





[ 오늘의 반찬 ] 

N(명사)도


지난 주말에 제육볶음을 먹었어요. 오늘 제육볶음을 먹어요.     

돼지고기는 삼겹살이 제일 맛있어요. 그리고 앞다리살 맛있어요.     

가: 사랑해.

나: 나.




  “먹고 싶은 거 다 만들어 줄게!”


  6년간의 연애를 결혼이라는 새로운 운명에 맡겨 보기로 결정했을 때, 나는 패기가 잔뜩 넘치는 목소리로 남자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결혼을 꿈꾸고 준비하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사랑하는 사람과 일상을 함께한다는 것에 적잖은 기대감을 품고 있을 테고 ‘당신과 결혼한다면 우리는 아마…….’에 대한 작고 소중한 환상이 저마다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내 환상은 바로 ‘요리’였다. 연애 기간이 꼬박 만 사 년을 채웠을 때즈음 데이트를 위해 억지로 먹고 마셔야 하는 것이 갑자기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집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으니까 카페 가서 케이크나 하나 먹을까?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으니까 맥주나 한 잔 할까?



  언제 가장 행복하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라고 대답하던 나였기에,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억지’로 ‘꾸역꾸역’ 채워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조금은 슬펐던 것 같다. 그래서 더더욱 빨리 우리의 부엌을 가지고 싶었다. 더 이상 억지스럽지 않고 마냥 자연스럽게, 하루에 세 번씩 성실하게 반복될 우리의 식사 시간에 대한 기대감. 그 시간을 내가 만든 음식들로 다채롭게 채워 나갈 거라는 작고 소중한 환상. 음…… 그러니까…… 그 환상에 남편이 매주 똑같은 음식을 먹고 싶어할 거라는 계산은 없었다.     



  “우리 주말에 뭐 먹을래?”

  “제육볶음!”


  한 주도 빠짐없이 반복되는 내 물음에 남편은 한 주도 빠짐없이 똑같이 답한다. 솔직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다. 연애 시절부터 제육볶음에 대한 남편의 사랑이 각별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함께 수많은 음식들을 먹어 왔지만 유독 제육볶음을 먹을 때 그의 영혼이 또렷하게 살아 있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우리가 결혼하게 되면 제일 먼저 차려 먹고 싶은 음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남편은 주저하지 않고 제육볶음과 김치찌개, 계란말이 3종 세트를 외쳤다. 그런 소소함과 한결같음에 반해 결혼까지 한 거지만 설마 정말로 매주 같은 음식을 먹고 싶어할 줄은 몰랐다.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나는 이번 주에도 제육볶음을 만든다. 제육볶음은 간단하게 만들 수 있지만 전체 과정을 고려한다면 생각보다는 복잡한 요리다. 맛있는 제육볶음을 만들기 위해서는 적절한 돼지고기를 고르는 일을 귀찮아하지 말아야 한다. 요즘은 온라인 커머스들이 피튀기는 식료품 새벽배송 전쟁을 치러 주는 덕분에, 잠들기 전 침대에서 손가락 운동 몇 번만 하면 신선한 분홍빛 고기를 다음 날 아침 우리 집 첫 손님으로 맞을 수 있다.



  이런 축복 같은 일을 매일 겪을 수 있다니 역시 현대 사회에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요리를 즐겨 하는 입장에서 새벽배송은 사실 좀 재미없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꼭 프라이팬 앞에 서서 불을 켜야만 요리가 시작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고기 요리를 할 때만큼은 동네 정육점에서 요리를 시작한다. 시작부터 지쳐서 한숨 나오는 일을 겪고 싶지 않다면 꼭 퇴근길에 있는 단골 정육점 하나를 정해 두는 것이 좋다. 집에 가는 길에 빠르게 스윽, 그러나 양질의 고기를 살 수 있는 곳으로 말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정육점 문을 열고 진열대에 가지런히 놓인 먹잇감들을 살피는 것에서부터 오늘의 미션 스타트.



  제육볶음용으로 가장 선호하는 부위는 역시 삼겹살이다. 둘이 먹을 때 집에 다른 반찬이 많다면 간단히 300그램 정도가, 반찬이 별로 없고 메인 요리를 집요하게 공략할 예정이라면 500그램에서 600그램의 양이 적당하다. 비계와 살코기가 적절히 섞여 있어야 맛있다. 기름기가 많을까 봐 걱정이라면 처음부터 삼겹살이 아닌 다른 부위를 고르는 게 낫다. 사장님에게 한입 크기로 썰어서 달라고 요청하면 부엌에서 진행될 과정 중 ‘썰기’라는 귀찮은 하나를 생략할 수 있다. 폭이 너무 좁은 것보다는 4~5센티미터가량의 너비로 썰어야 씹는 만족감이 더해진다.



  집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양념을 만드는 것이다. 고춧가루, 고추장, 다진마늘, 물엿, 굴소스, 맛술을 3:1:1:1:1:1로 섞은 후, 간장과 설탕을 따로 준비해 둔다. 채소는 딱 대파 하나만 있으면 된다. 양파를 함께 넣으면 양파 특유의 달큰한 맛이 추가된다. 나는 익힌 채소에서 단맛이 나는 걸 아주 싫어하기 때문에 볶음요리에 양파는 절대 넣지 않고, 대신 대파의 흰 부분을 넉넉하게 넣는 편이다. 그러면 양파처럼 느끼한 맛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하되 단맛이 나지는 않는다. 양파를 좋아하는 남편이 가끔 볼멘소리를 하면, 영어로 파는 ‘green onion’이기 때문에 양파가 들어간 거나 다름없다고 말할 계획도 함께 세워 두면 된다.



  넓은 웍에 불을 올리고 봉지 안의 삼겹살을 탈탈 털어 넣는다. 삼겹살이 겹치지 않게 대충 펴 둔 다음 삼겹살 위에 설탕을 사르르 뿌린다. 고기가 반쯤 익으면 진간장을 한 스푼 정도 넣고 본격적으로 고기를 뒤적거리며 볶아 준다. 고기가 70퍼센트쯤 익어 단단해졌을 때, 불을 중불 정도로 줄인 후 준비한 양념을 모두 넣고 휘휘 볶는다. 양념이 고기에 스며들고 둘이 꽤 친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면 대파를 넣고 더 신나게 볶는다. 대파의 숨이 죽으면 불을 끈다. 참기름을 빠르고 둥글게 휘릭 두르고 몇 번 더 뒤적거리면 끝! 접시에 예쁘게 담아 깨를 솔솔 뿌려 식탁에 내어 놓으면 함께 식사하는 사람의 기쁜 탄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제육볶음을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은 쌈밥으로 먹는 것이다. 괜히 식당에 제육쌈밥이라는 메뉴가 있는 게 아니다. 깨끗하게 씻은 푸릇푸릇한 청상추에 모락모락 김이 나는 뜨거운 쌀밥 한 숟가락과 빨간 제육볶음을 듬뿍 올리면 그 색감의 조화만으로도 절로 입맛이 돈다. 입천장이 데지 않도록 두어 번 호호 불어 보고, 복주머니 모양으로 야무지게 만들어 복스럽게 한 입에 와앙. 눈을 감고 오물오물 씹으면 매콤 달달 짭짤한 양념과 도톰한 살코기, 삼겹살 특유의 녹진한 기름기의 하모니가 기가 막힌다. 삼겹살은 특히나 비계가 많기 때문에 맛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아쉬움을 막기 위해서라도 꼭 상추와 함께 먹는 것이 좋다.      






  열심히 삼겹살 예찬론을 펼쳤지만, 사실 우리 집에서 삼겹살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남편이 고집하는 부위는 돼지 앞다리살이다. 삼겹살은 생고기로 구워 먹기는 괜찮지만 볶음요리로 해 먹으면 유난히 지방기가 많이 느껴져 좀 애매하고, 앞다리살이 비계도 적을 뿐더러 쫄깃한 식감까지 갖추고 있어 질리지 않는 맛이라나. 남편의 의견을 받아들여 우리 집 제육볶음은 앞다리살을 훨씬 자주 택하게 되었다. 제육볶음 하나 만드는 데 굳이 고기를 두 부위로 나누는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구이용 앞다리살은 편하게 새벽배송으로 주문해도 대충 맛있기도 하고, 가격도 삼겹살에 비해 훨씬 싸고, 그리고 뭐…… 앞다리살도 맛있으니까.



  그래, 앞다리살도 맛있다. 남편이 “제육볶음 만들어 줘, 고기는 앞다리살로.” 라고 말하면 나는 “삼겹살은 별로야?” 하고 되묻는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잠시 고민하다가 “삼겹살도 맛있지. 삼겹살 먹고 싶으면 삼겹살로 하자.” 이렇게 대답한다. 그러면 나도 조금은 고민하는 척하다가 답한다. “아니야. 앞다리살도 맛있으니까.”


     


  연애 육 년에 결혼한 지 만 2년이 넘었으니까 우리는 도합 팔 년의 시간을 함께하고 있다. 그 시간 동안 아직까지 한 번도 둘이 싸운 적은 없다. 선호하는 돼지고기 부위만큼이나 성격도 취향도 많이 다른 우리 두 사람이 여태껏 다투지 않고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로 지낼 수 있었던 데에는 뭐니 뭐니 해도 ‘도’의 역할이 가장 컸다고 생각한다.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설명하는 보조사 ‘도’의 의미는 이러하다. ‘이미 어떤 것이 포함되고 그 위에 더함.’, ‘둘 이상의 대상이나 사태를 똑같이 아우름.’, ‘양보하여도 마찬가지로 허용됨.’      






  초급 한국어 수업을 할 때 매일 오전마다 유난히 자주 사용하게 되는 질문 레퍼토리가 있다.

 

  “어제 뭐 했어요?”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간단하고 쉬운 문장이라 뭐 어려울 게 있나 싶겠지만 초급 학생들에게는 문법적으로 굉장히 도전적인 질문이다. 자신이 어제 한 일들에 대해 떠올리며 그에 맞는 명사와 동사를 짜맞추고, 하필 과거형 ‘-았/었/였-’으로 대답해야 하니 동사의 불규칙 형태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교사만큼이나 학생들도 어제 뭐 했냐는 질문에 유난히 자주 사용하는 대답이 있다.


  “잠을 잤어요.”

  “라면을 먹었어요.”



  유명한 관광지에 갔다, 친구를 만났다,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를 봤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처럼 좀 후속 질문을 만들기 편한 대답을 해 주면 좋으련만. 열심히 탐독한 교육학 책이나 설레는 마음으로 작성했던 수업 지도안에서는 가짜 학생들이 참 휘황찬란한 대답을 해 주었는데. 실제로 수업에서 만나게 되는 진짜 학생들은 이렇게도 야속하다. 그래서 쉬는 시간이면 강사실에서는 한국어 수업을 이제 막 시작한 후배 교사들의 답답함이 터져 나온다. 아유 진짜, 뭘 물어봐도 맨날 잠만 잔대서 김 새요. 뭐 맨날 라면만 먹는다고, 어휴.



  나 역시 학생들의 저런 대답을 들을 때면 당황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괜히 속으로만 삐죽거렸던 시절이 있다. 특히나 저런 대답을 하는 학생들은 수업 태도도 좋지 않고 퀭한 눈빛과 축 처진 자세로 온몸으로 수업이 지루하다는 걸 나타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학생들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건 수업을 시작한 지 한 3년차쯤 됐을 때부터였다. 교재에서 소개되는 유학생의 가짜 생활과 자신의 진짜 유학 생활의 차이가 야속할 만큼 큰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으로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에 먼 타국에 와서 가족도 친구도 없고 말은 안 통하니 그냥 집에서 잠만 자고, 심지어 용돈도 부족해서 어제도 오늘도 라면을 먹었는데 선생님은 맨날 어제 뭐 했냐고 뭐 먹었냐고 물어 보고, 어휴.     



  가짜와 진짜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어려워 숱한 고민을 해본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단 한 마디로 학생들도 나도 배시시 웃게 만들 수 있는 마법의 문장을 찾아 냈기 때문이다.


  “아, 정말요? ‘저도요.’”



  저도요, 이 세 글자가 우리를 웃게 한다. 잠만 자고 라면만 먹는 지루한 생활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나와 같은 사람이 한 명쯤 더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냥 배시시 웃게 된다.



  인간관계를 포근하게 안아주는 우리말 중 가장 효율적인 단 한 글자, 보조사 ‘도’. 정확히 모르긴 몰라도 ‘앞다리살도 별로야.’와 ‘앞다리살도 맛있어’ 사이엔 가짜와 진짜 사이보다도 훨씬 큰 차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찌 되었건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아무튼 싸우지 않게 하고 히죽 웃게 하는 마법의 한 글자. 이렇게 한 글자씩 마법의 발걸음을 내딛다 보면 언젠가 나도 “양파도 맛있어!”라고 신나게 외칠 수 있지 않을까?




※ 주의: “나도 힘들어”는 금지할 것. 싸움에 이르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알고 싶은 게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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