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반찬은 한국어입니다 제9화 치킨스테이크
달걀이 병아리가 돼요. 병아리가 닭이 돼요. 닭이 스테이크가 됐어요.
저는 한국어 선생님이 됐어요. 우리 가족의 요리사가 되고 싶어요.
유명한 화가가 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괜찮습니다.
건강과 환경을 생각하며 채식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채식주의자들을 칭하는 용어도 여러 가지로 나뉜다. 이탈리아에서 사시는 우리 이모는 생선이나 조개 등의 어패류를 허용하는 페스코 베지테리언이다. 이모가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한두 번씩 함께 식사를 하는데, 육식주의자인 나와 채식주의자인 이모의 입맛을 모두 만족시킬 만한 메뉴를 고르는 것이 늘 쉽지가 않다. 외식을 기준으로 생각했을 때 우리나라는 채식주의자들에게 친화적인 식당이 그리 다양하지가 않은 것 같다.
우리 부부는 육식주의자다. 육식주의자들끼리 외식 메뉴를 고르니 별다른 갈등 없이 평화롭기만 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고기를 좋아하는 만큼 가장 사랑하는 육류에 대한 고집도 강한데, 서로 다른 고기를 예뻐한다면 둘 사이에서 긴장감 가득한 충돌이 발생할 때가 있다. 남편은 보통 돼지고기에 온 애정을 쏟는 편이다. 돼지고기로 만든 음식이라면 다 좋아하지만 특히 제육볶음과 돼지갈비를 사랑한다. 나는 일생을 바쳐 닭고기에게 열렬한 구애를 펼치고 있다. 닭고기로 만든 음식이라면 역시 다 좋아하지만 프라이드 치킨과 백숙에 특히 가슴이 뛴다.
“결혼하고 나서 오빠 때문에 돼지고기 너무 많이 먹어. 돼지갈비 같은 건 난 원래 거의 먹지도 않았거든.”
불판에서 달달하게 구워지는 돼지갈비를 보며 중얼댄다. 본인이 육식주의자라고 하고서는 돼지갈비를 거의 안 먹어왔다고 하니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정말이다. 양념에 절인 고기보다는 삼겹살이나 목살 같은 생고기를 구워 먹는 게 더 좋다. 그래서 집에서 제육볶음이나 불고기처럼 양념이 메인인 요리를 할 때도 절대로 고기를 양념에 미리 푹 재우지 않고 불판에서 바로 양념옷을 얇게 입히곤 한다. 그래야 생고기 같은 육질을 함께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그래. 살면서 닭고기를 이렇게 자주 먹게 되다니. 진짜 몰랐지.”
넓적한 돼지갈비를 한번에 뒤집으면서 남편이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있다 보니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화가 떠올랐다. 엄마의 부엌에서 독립해서 처음으로 메뉴 결정권과 내 마음대로 장보기 쿠폰을 얻자마자, 그동안 조용히 지내며 본색을 드러내지 않고 있던 닭고기에 대한 내 사랑이 고삐 풀린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마트에서 장을 봐올 때마다 내 손엔 항상 닭고기가 하나 이상씩은 들려 있었다. 삼계탕용 생닭, 닭볶음탕용 절단닭, 닭다리 북채, 윙, 봉, 닭가슴살, 닭안심살, 순살 닭다리살, 닭근위……. 종류는 매번 바뀌었지만 어쨌든 닭이라는 거 하나로 귀결되었다. 그렇게 몇 주쯤인가 지났을 때, 이제껏 한 번도 메뉴 선택이나 음식에 대한 불평을 하지 않았던 남편이 처음으로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주장했다.
“제발 닭 좀 그만 먹자!”
허허, 좀 심했나…….
그때 이후로 장바구니에 닭고기가 담기는 빈도가 확 줄었다. 처음에 비해 빈도가 줄었다 뿐이지 닭고기를 잘 먹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차이가 있다면 전엔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을 때도 그냥 닭고기부터 담고 봤지만 지금은 닭 요리를 하고 싶을 경우에만 닭고기를 산다. 그리고 부부 갈등 없이 닭고기를 행복하게 먹는 지혜도 터득했다. 찜닭이나 닭볶음탕처럼 양념이 강한 요리는 남편도 환하게 웃으며 환영한다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날은 평소 자주 먹는 한국식 닭 요리 말고 조금 특별한 걸 만들어 보고 싶었다. 뭘 만들까 잠시 고민하던 중 대학생 때 자주 찾았던 자그마한 식당 하나가 문득 생각났다. 저렴한 가격을 내세워 주머니가 가벼운 학생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곳이었는데 주력 메뉴는 1인용 치킨스테이크였다. 데리야끼 양념 맛이 나는 치킨스테이크와, 양념치킨 소스 맛이 강한 양념스테이크. 두 메뉴 모두 닭다리살을 얇게 펴서 스테이크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까맣고 뜨거운 돌판 위에서 그릴 자국을 자랑하며 지글지글 소리를 내는 모습에 군침이 절로 돌았다. 남녀노소 누구나 호불호 없이 좋아할 만한 대중적인 맛이었기에 학교 앞에서 가장 자주 갔던 식당 중 하나로 기억에 남아 있다.
생각만으로도 대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은 즐거운 추억에 잠길 만큼 좋아했던 곳이지만, 맛에 대해서는 한 가지 아쉬움을 떨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치킨스테이크의 데리야끼 소스도 양념스테이크의 양념치킨 소스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대중적인 맛이어서인지, 두 소스가 반씩 딱 섞인다면 익숙하면서도 독특한 맛이 되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나 하나뿐이었는지, 영업 종료를 하는 그 순간까지도 그곳의 메뉴 구성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 자연스럽게 결정이 내려졌다. 오늘 우리 집에 추억의 치킨스테이크 2호점을 차리기로!
순살 닭다리살 500그램을 샀다. 밀봉된 비닐을 뜯어 낸 후 생닭의 핑크빛 표면에 코를 가까이 대고 냄새를 킁킁 맡는다.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으니 안심하고 사용하기로 한다. 닭고기는 소고기나 돼지고기에 비해 쉽게 상한다. 소비기한이 며칠 남아 있더라도 백 퍼센트 안심할 수는 없다. 상한 닭고기에서는 메탄가스 냄새가 난다. 가까이에서 냄새를 맡았을 때 조금이라도 이상한 냄새가 난다면 그냥 버려야 한다.
생닭에는 살모넬라 균이 있기 때문에 조리 전에 세척하지 않는 것이 좋다. 물로 씻어내는 과정에서 주변의 그릇이나 조리 도구 등에 균이 튀어 버리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요즘 시중의 닭 정육 제품들은 대부분 매우 깨끗한 상태이기에 제대로 익히기만 한다면 따로 씻어내지 않고 사용해도 무방하다. 정 찝찝한 기분이 든다면 끓는 물에 살짝 데쳐 사용하는 걸 추천한다.
닭다리살을 도마 위에 펼쳐 두고 덩이마다 맛술을 한 스푼씩 적셔 놓는다. 닭비린내를 잡기 위해서이다. 닭껍질이 붙어 있지 않은 면에 칼집을 크게 넣는다. 양념이 잘 밸 수 있도록 포크로 찍어 전체적으로 작은 구멍을 송송 뚫어 준다. 소금을 살짝 뿌려 밑간을 한다.
소스는 늘 그렇듯 당장 손에 잡히는 밥숟가락으로 계량한다. 조림용 간장과 설탕, 맛술을 각각 두 숟갈씩, 굴소스 한 숟갈, 고춧가루 삼분의 일 숟갈을 잘 섞어 준비한다.
팬에 버터를 듬뿍 두른다. 버터가 타지 않도록 불은 너무 세지 않게 관리해야 한다. 버터가 잘 녹은 것을 확인한 후 닭다리살을 올린다. 고소한 버터 냄새가 싸악 올라올 때쯤 고기를 뒤집는다. 물컹했던 육질이 살짝 단단해진 듯한 느낌이 들면 준비한 양념을 한번에 붓고 불을 중약불로 줄인다. 양념이 들어간 순간부터 휴대폰은 저 멀리로 치우고 잠시 잊어버려야 한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양념이 쉽게 타 버리고 마니까.
닭다리살 앞뒷면을 번갈아서 자주 뒤집어가며 천천히 굽는다. 뒤집을 때 닭 껍질이 훌렁 분리되지 않도록 부드러운 실리콘 재질의 조리 도구를 사용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반복해서 여러 번 뒤집다 보면 양념이 걸쭉해지며 버터와 함께 고기에 스며든다. 가니쉬로 쓸 브로콜리를 프라이팬 한쪽에서 굽는다. 버터에 브로콜리를 타기 직전까지 바싹 구우면 담백하면서도 풍미 있는 맛이 난다.
완성한 치킨스테이크를 넉넉한 접시에 샐러드 채소와 함께 낸다. 닭다리살 덩이들을 서로 불규칙하게 살짝씩 겹쳐 놓으면 더욱 먹음직스럽게 보일 것이다. 약간의 향과 장식을 위해 고기 위에 파슬리 가루와 파마산 슈레드를 조금 뿌린다. 오늘의 디너 디쉬에서 완전히 손을 떼기 직전, 미슐랭 레스토랑의 셰프가 된 것마냥 꼼꼼한 눈초리로 접시를 다시금 한눈에 조망해 본다. 갈색과 붉은색이 섞인 양념이 꼼꼼히 발린 치킨스테이크. 구운 브로콜리와 샐러드 채소 모두 초록빛으로 색상이 동일해서인지 무언가 심심한 느낌이다. 여기에서 색상이 딱 한두 개 더 들어가면 훨씬 예쁠 텐데. 고기가 식기 전에 서둘러 판단을 끝마쳐야 한다.
추가적인 조리 없이 바로 올릴 수 있는 재료가 무엇이 있을지 생각을 조금 이어나가다가, 아침 식사용으로 냉장고에 늘 보관 중인 삶은 계란을 꺼낸다. 재빠르게 계란 껍질을 벗기고, 정확히 반을 갈라 접시에 올린다. 계란 흰자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흰색, 그 안의 노른자는 샛노랗게 빛나며 작달막한 포인트 색상이 되어 준다. 급하게 한 판단치고 나쁘지 않아 만족스럽다.
치킨이지만 스테이크라는 명칭을 달고 태어났으니 구색을 갖추어 포크와 나이프도 꺼내 놓는다. 가장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닭다리살 한 덩이를 슬쩍 옆으로 빼서 칼질을 한다. 살코기와 껍질이 떨어지지 않도록 포크로 꾹 집어 맛본다. 혀끝 주변에서 살코기의 동글동글한 모양새가 느껴진다. 한번 씹자 간간하게 졸인 간장 베이스의 양념이 제일 먼저 느껴지고, 두 번 씹으니 살짝 매콤하고 달짝한 양념치킨 맛이 치고 올라온다. 세 번 씹으니 앞서 느껴진 둘의 다름을 풍부한 버터 향이 살살 어르고 있는 게 보인다.
양상추를 두어 개 먹으며 입안을 가볍게 만든다. 그리고 접시 아래쪽에 놓인 브로콜리를 집는다. 물기 없이 바싹 구운 브로콜리는 빠짐없이 탄탄한 질감과 밀도를 뽐낸다. 이번에는 스테이크를 큰 조각으로 잘라 입에 넣는다. 넓적한 닭다리살이 혓바닥 뒤편에서까지 넉넉하게 느껴진다. 양념이 찰지게 밴 닭 껍질은 마지막까지 졸깃하게 입에 남아 감칠맛을 더한다.
치킨 스테이크와 양상추를 몇 번이고 번갈아 가며 먹다가 문득 기분이 단조롭다. 이럴 땐 미리 준비한 다른 맛으로 포인트를 삼아야지. 샐러드 위쪽에 살포시 놓아둔 삶은 계란으로 눈을 옮긴다. 몽글몽글하고 촉촉한 노른자에 포크를 딱 꽂으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멈칫한다.
치킨스테이크와 삶은 계란. 닭고기와 계란. 닭과 알. 닭과 병아리. 엄마……와 아이…….
포인트 색상으로 삶은 계란을 준비한 것이 급하게 한 판단치고는 나쁘지 않았다는 말을 취소하고 싶다. 스테이크가 된 닭이라니. 심지어 그 옆엔 계란이라니. 이건 좀……. 신나게 잘만 먹고 있었으면서 이런 말을 하면 더 우스운 꼴만 된다는 걸 알지만, 좀 미안하다.
한국어 선생님을 하면서 가장 경악했던 경험을 꼽으라면 단연 ‘N(명사)이/가 되다’를 처음 가르칠 때였다고 소리 높여 이야기할 수 있다. 왜 그런지는 교재에 실려 있는 예시 문장을 옮기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달걀이 병아리가 돼요. 병아리가 닭이 돼요. 닭이 치킨이 됐어요.
초임 교사 때 수업 준비를 하며 책에서 처음 이 문장을 봤을 땐 뭘 잘못 본 줄 알았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그러니까, 의미를 딱 제대로 전달해 주는 좋은 문장인 건 맞는데……. 우리 이모 같은 채식주의자가 본다면 마음 아파하기 딱 좋은 문장이기도 하다. 베지테리언인 학생들도 가끔 있기 때문에 교육 내용적으로 적절한 예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많은 학기를 거치며 실제 수업에서 학생들의 반응을 살피고 나니 이해의 측면에서만큼은 교육 효과가 대단한 예문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일종의 충격 요법이 되어 잠을 확 깨워 주면서도 오늘 배울 표현인 ‘N(명사)이/가 되다’의 의미도 단 세 개의 문장으로 단번에 파악하게 해주니 말이다. 만약 저 세 개의 문장 중 마지막 문장을 빼 버린다면 학생들이 ‘되다’를 ‘자라다’와 동일한 의미라고 오해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채식주의자인 학생들도 다른 친구들처럼 한번 가볍게 픽 웃으며 즐겁게 공부를 이어나가곤 했으니 처음부터 괜히 기우가 심했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참 아이러니하다. 지금껏 한국어 선생님으로 살아가면서 나에게 가장 큰 가르침을 주었던 문장에도 ‘N(명사)이/가 되다’가 쓰여 있으니 말이다. 학기 말에 진도를 나가는, ‘꿈’에 대한 짧은 글이다. 그 글의 이야기는 이렇게 흘러간다.
어렸을 때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던 한 아이가 있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연습했지만 아무리 연습해도 예술가로 살기엔 그림 실력이 부족했다. 아이는 결국 화가의 꿈을 포기하고 미술 선생님으로 진로를 변경한다. 아이는 자라 대학생이 되었다. 지금은 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있다. 그에게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그림을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학교를 다니던 중 마음속에 옛꿈이 다시 피어오른다. 그는 깨닫는다. 자신은 아직 화가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을. 그리고 스스로에게 약속한다.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면서도 화가의 꿈을 위해 계속 노력해 보겠다고. 그러면서 생각한다. 유명한 화가가 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괜찮다고.
‘유명한 화가가 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괜찮습니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조금 생경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껏 봐온 교재들에 실린 꿈 이야기들은 대개 이러저러한 역경을 겪었지만 곧잘 극복하고 멋지고 빛나는 성공을 이루는 내용이었다. 별생각 없이 그냥 독특하다고만 여겼다. 다음 날 수업 시간에 내 음성으로 한 줄씩 이야기를 읽어 주는데, 같은 문장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눈이 조금 뜨거워졌다. 목소리에까지 영향이 가지 않도록 얼른 마음을 가다듬고 수업을 잘 마쳤다.
며칠 후엔 기말 발표가 있었다. 기말 발표 주제는 ‘나의 꿈’이었다. 학생들은 한 명씩 앞에 나와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제 꿈은 승무원입니다. 저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나의 꿈은 사장님입니다. 수업 시간에 나눈 쉽고 단순한 말들만으로는 알 수 없었던 그들의 진짜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어서 즐거웠다. 저마다 다른 꿈과 내용들이었지만 발표 끝 무렵엔 모두 이런 문장을 덧붙이고 있었다.
“의사가 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괜찮습니다.”
“큰 회사의 승무원이 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괜찮습니다.”
“유명한 작가가 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괜찮습니다.”
“부자 사장님이 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괜찮습니다.”
그날 꿈 이야기를 배우는 동안 우리는 글을 읽은 후의 감상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그 시간, 우리가 같은 문장에 잠시 머무르게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순간, 같은 생각을 나누었다는 것 또한.
살다 보니 인생이 다 그렇다. 어릴 적엔 되고 싶은 것들이 참 많았다. 유치원생이 되고 싶었고, 빨리 초등학생이, 중학생이, 고등학생이 되고 싶었다. 그런 바람들은 달걀이 병아리가 되고 병아리가 닭이 되는 것마냥 쑥쑥 이루어졌다. 좀 커서는 가고 싶었던 학과에 진학해 대학생이 되었고, 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값싼 치킨스테이크를 자주 먹으면서 빨리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선생님이 됐다. 몇 년 후에는 남자친구의 여자친구 말고 아내가 되고 싶어졌다. 아내가 됐다. 그리고 이제는 되고 싶은 게 별로 없다.
이제 될 만한 건 다 된 것 같은데 주위의 어른들은 아직도 자꾸만 내게 뭐가 되고 싶냐고 묻는다. 더 큰 학교의 선생님이 되라거나, 외국의 강사가 되라거나, 강사 말고 교수를 꿈꾸라거나,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등의 애정 어린 잔소리도 많이 듣는다.
나는 그냥 닭으로 지내며 모이도 먹고 털 관리도 하면서 잘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남들 눈에는 내가 닭이 아니라 포장을 막 뜯은 생닭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어렸을 때와는 다르게 지금부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무엇이 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여기에서 지금의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고 싶다면 무언가 다른 선택과 노력을 더해야 한다. 머릿속에서 여러 명이 열심히 묻는 듯하다. 너는 데리야끼 소스의 치킨스테이크가 될래? 양념치킨 소스의 치킨스테이크가 될래? 죄송한데 저는 그 둘로는 만족이 안 돼서 그냥 색다른 소스를 만들어 버렸는데요…….
나에게도 꿈이 있다. 아줌마 닭도 되고 싶고 할머니 닭도 되고 싶다. 그러는 동안 내 옆에는 계속 남편 닭, 엄마 닭, 아빠 닭, 동생 닭들이 있어 줬으면 좋겠다. 그거야 달걀이 닭이 되는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럴 수 있으려면 사랑도 행운도 따라 줘야 한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다.
내게 따뜻한 행운이 지금처럼 계속 찾아와 준다면 색다른 선택과 노력을 해볼 의향도 있다. 작가가 되고 싶다. 남편 닭, 엄마 닭, 아빠 닭, 동생 닭, 친구 닭들이 여기저기에서 얼굴을 내미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쓰고 싶다. 유명한 작가가 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괜찮다. 그리고 요리사도 되고 싶다. 우리 집 요리사 말이다. 특별하고 대단한 음식을 만들어내지는 못할 수도 있지만 괜찮다. 쭉 이렇게 살고 싶다. 파파 할머니 닭이 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