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항상 긴장의 연속입니다

세번째 이야기

우리는 항상 긴장의 연속입니다



내가 처음으로 장애아동을 만난 것은 장애유아동이 있는 어린이집이었다. 물론 나의 경험과 이력으로 페이를 받으면서 활동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내가 담당하는 친구는 뇌병변장애 유아동 4명이었다. 완전히 누워 있는 친구. 앉아있는 친구, 왼쪽이 불편한 친구, 하반신이 불편하고 시력이 거의 없는 상태인 친구이다. 현재 어린이집에서는 3명에 1인의 교사이지만 그 당시에는 보육교사 1인이 담당하는 장애유아는 더 많았다. 보육교사가 얼마나 힘들었겠나, 아니 많이 힘들었다. 특히 점심시간에. 밥 한숟가락, 반찬 한젓가락도 일일이 떠먹여주어야 하는 상황에서 나의 두 손과 두 눈을 가진 몸 하나가 얼마나 바쁘게 움직였겠는가. 장애 어린이집에서의 1년 6개월은 재능기부, 자원봉사와는 확연히 다른 세계였으며 내 아이의 교육과 케어와는 다른 영역이었다 누군가에게 돈을 받으니까.



아이의 교육과 치료를 위한 치료사 자격을 활용할 기회가 왔다. 치료실에서 나와 일하기를 원했고 그렇게 치료사가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장애친구와 만나는 날은 항상 긴장을 하게 된다. 더구나 처음 만나는 친구는 더 긴장을 한다. 아이들과의 기싸움은 항상 일어나고 그 싸움에서 밀리는 날에는 40분간은 아수라장이 된다. 이 엉망진창 수업은 다음 회기에 잘하면 된다는 누군가의 위로에도 진정이 되지 않는다.



우리(치료사)는 안다. 처음의 기싸움이 일년을, 아니 그 친구가 종결하기까지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나는 그 아이에게 질질 끌려 다닌다고 표현함이 적당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끼리 사용하는- 그래서 열심히 준비하지만 언제나 긴장을 붙잡고 현장에 임하고 있다. 치료사로 아이들을 만날 때에 느낀 것이다.



처음 오는 아이들은 치료실에서 만나는 선생님과 낯선 환경을 힘들어했다. 늘상 다니던 아이도 올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듯 긴장하고 불안해 하는 모습을 보았다. 내 아이를 교육하던 그 때나 15,6년이 지난 시절에나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은 있었다. 시간에 맞춰 와야 하는 학습자와 시간 내에 교육(치료)을 담당해야 하는 선생님(치료사).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부모님(주양육자) 그리고 조그마한 공간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환경이다. 아이들이 즐겁게 활동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무엇일까?



선생님은 교육과 치료지원을 하는게 목표이지만 우리 친구들에게 흥미롭고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놀이로 접근할 수 있는 그 무엇에 대한 고민을 했다. 그래서 미술에 필요한 도구를 식재료로 바꿔 보았다. 찰흙 대신 밀가루 반죽을, 물감대신 천연 야채즙으로, 도화지 대신 부침개로, 색종이 대신 김으로 대체를 했다. 장애아동의 특성상 뭐든지 입으로 먼저 느껴 보는 것도 긍정적으로 해결이 되었다. 아이들이 치료실에 오는 즐거움은 덤으로 얻음으로써 나의 긴장감은 조금 느슨해졌다.



식빵 한조각을 먹더라도 잼을 바르고 달걀후라이를 하고 치즈를 얹어 먹을 수 있게 하자. 식재료로 하는 미술을 뛰어 넘어 그들에게 먹거리를 제 손으로 할 수 있게 한다는 오만한 생각(?)으로 현실적인 요리를 하면서 나의 긴장감은 최고에 이르게 되었다. 현장에서는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엉망진창이 된다. 현장에서는 마음을 늦추면 사고가 난다. 그들과 함께 하는 동안 내 등줄기에 흐르는 축축한 땀에서 내가 얼마나 긴장 속에서 열정을 쏟았는가를 알 수 있다. 혼자만 알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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