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발신기록
아내의 외도를 알고부터 몸에 변화가 있었는데, 잠을 제대로 자는 날이 없었고 식욕이 없어 회사에서 매일 먹던 아침은 거르게 되었고 점심도 반공기도 먹지 않았었다. 팀원들끼리 먹기 때문에 매번 빠지기가 뭐해 구내식당으로 내려갔지만 안 먹고 있을 수는 없으니 조금씩 우겨 넣었다.
그래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유일하게 먹는 건 아이와 함께 먹는 저녁, 그리고 주말 뿐.
그러다 보니 살이 빠졌고, 심적 고생을 하고 있으니 어느정도 당연하다 생각해서 냅뒀는데 1월말이 되자 10kg가 빠져 있었다. 고작 두 달 만에 10kg라니.. 이러다 갑자기 아프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이렇게 죽는다 한들 아내는 슬퍼하지 않을 것이고 힘든 건 부모님과 아빠를 잃은 아들 뿐이다. 내 남아있는 가족을 위해서라도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살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
출퇴근은 지하철이 아닌 자전거로 다녀서 출근 35분, 퇴근 35분씩 자전거를 탔고 점심은 운동한다 하고 스킵 한 뒤 회사 헬스장에서 근력을 키웠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운동을 하니 부정적인 생각이 거둬지는 효과가 있었다.
그렇다고 긍정적이 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러다 죽을 것 같다는 것에서는 벗어나서 만족했다. 새로운 몸에 맞춰 옷들도 샀다. 피폐해진 몸을 정화하고 있었다.
그 즈음, 나는 우연히 누군가를 만나게 되었다.
지독히 차가운 시절 속에서도 사람의 온기는 뜻밖의 곳에서 찾아왔다. 처음엔 단순한 대화였고, 그저 웃음을 잃은 내가 잠시 미소 짓게 된 계기였다.
“어, 내가 웃고 있네.” 그 사실만으로도 놀라웠다.
변호사와 통화하던 날,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변호사님, 제가 소송 진행 중에 이성 만나면 문제 될까요?”
“이미 소장이 접수된 시점부터는 법적으로 혼인관계 파탄으로 봅니다. 영향 없습니다. 반대로 아내도 지금 상간남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도 영향이 없습니다.”
그 대답이 면죄부가 된 건 아니었다. 다만, 스스로를 잠깐 숨 돌리게 해준 말이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특별한 이벤트도, 격정적인 감정도 없었다.
누군가 내 말을 들어주고, 묻지도 않고 웃어주었다. 나는 오랜만에 사람 냄새가 나는 저녁을 보냈다. 다만 그 평온함 뒤에는 늘 미안함이 깔려 있었다.
결국 내 상황을 그녀에게 털어 놓았다. 그녀는 이해해주었고 응원해주었다.
그녀의 위로는 고마웠지만, 더 만남을 지속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솔직히 마음을 털어 놓았다.
“지금의 나는 누구와도 행복할 준비가 안 된 사람입니다. 당신에게도 미안하구요.”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그날 이후 다시 만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 한 켠이 쓰라렸다.
그녀에게 미안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 나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다시 마음을 내밀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내 안에 아직 남아 있음을 느꼈다.
그래, 나는 완전히 무너진 게 아니었다.
한 번 부서졌지만, 그 부서진 조각들 사이로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 짧은 만남이 내 삶을 바꿔 놓은 건 아니다. 다만, 끝없는 절망 속에서도 사람은 다시 따뜻해질 수 있다는 걸 가르쳐주었다.
나는 이제 다시 아이를 향해 걷기로 했다.
복수나 미련 보다는, 아이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로 살기 위해.
사람에게 받은 온기로, 다시 사람으로 살아가기로 했다.
출근해서 9시까지 보고자료를 마무리하고 회의에 들어갔다 오니 열 시 반이었다. 변호사에게 메세지가 와있었다.
[통화 가능하세요?]
바로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가사조사관의 출장에 대해 집에 와서 무엇을 하는 지와 카카오톡 수발신 내역 신청한 것이 승인되었고 나왔다는 이야기었다.
제출할 증거자료 중에 아내와 상간남의 카톡 내용은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두기로 했기에 다른 방법을 썼다. 녹취록과 함께 둘 사이의 카카오톡 수발신 내용을 증거로 내기로 했다. 변호사가 파일을 보내주었다.
[제출명령 회신]
이라는 제목으로 아래는 사건 번호와 원고, 피고들이 쓰여있고
[귀원의 제출명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회신을 드립니다.]
- 다음 –
- 귀원에서 요청하신 문서 접수일 (2024.XX.XX.) 기준 최근 90일간 의뢰하신 이동전화(아내번호)와 대화상대방 이동전화(상간남 전화번호) 사이의 카카오톡 수발신 로그 기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대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단지 아내와 상간남 번호들로 메시지를 주고받은 시간만 초 단위로 보여주었고 첫 장부터 이어진 내용은 181페이지에 가서 끝이 났다.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 진즉 신청했다면 좋았겠지만 독단적으로 신청할 수는 없고 소송이 공식적으로 제기된 뒤에 요청하면 판사가 이 자료가 필요한 것이 타당한지 검토 및 승인 후 법원의 명령까지 받아야 했다.
그리고 법원에서 카카오에 명령문이 가기에 위 문서의 기준일은 2월 말이었다. 따라서 최초 수발신 기록이 12월 1일부터였고 이미 아내가 외도를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내가 한창 따지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이상한 건 둘의 대화가 1월 초에 끝났다는 것이다.
181페이지의 마지막까지 내려도 1월 초가 끝이었다. 따라서 둘은 카카오톡이 아닌 다른 메신저를 사용해서 대화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통신사에도 통화 수발신 내역을 신청할까 싶었는데 변호사가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해서 그건 하지 않았다. 아내와 상간남의 끝없는 수발신 내용을 보고나니 또 화가 나고 복수심이 폭발한다.
며칠 뒤 친구들이 있는 단톡방이 울렸다. 많은 남자들이 그렇듯 워낙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많이 하는 방이라 보통은 나중에 봤는데 그 날은 이상하게 바로 읽었다.
[야 그 새끼 이직했나 보다.]
여기 있는 친구들은 중학교때부터 친구인 녀석들로 내 사정을 알고 있다.
상간남이 인스타를 비공개로 돌렸었는데 그 전에 한 친구가 다른 계정으로 팔로우를 해두었었다. 가끔 상간남이 올리는 피드나 스토리를 전해주었는데 안 궁금하니까 보내지 말라고 했다.
솔직히 무언가를 알게 되면 받는 스트레스가 싫었다. 친구들이 상간남의 인스타를 아는 이유는, 내가 아무리 상간남의 여자친구 정보를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어 사실을 알고 있는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상간남의 여자친구에게 알리고 복수하고 싶었다. 친구들이 같이 찾으려 노력했지만 결론은 여자친구는 인스타를 아예 안 하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몇몇은 페이스북도 뒤졌는데 아무 정보도 나오지 않았다.
어느 날 상간남은 모든 피드(게시사진)들을 내렸고 비공개로 전환했다. 다만 이 친구는 그 전에 팔로우를 해놨기에 올라오는 스토리를 볼 수 있었다.
친구가 보내준 사진에는 경기 중부 지방의 새로운 회사로 이직했다는 글과, 회사 근처 자취방 구했다며 올린 내용이 있었다.
비겁한 새끼. 도망쳤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했다.
그리고 며칠 뒤 그 친구는 상간남 인스타에서 차단당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나 토요일에 차 좀 쓸게.”
이번 주 토요일은 아내가 친구를 만난다고 해서 내가 육아를 하기로 했다. 아직 뭘 할지 정하지는 않았는데 보통 이 경우에는 아이와 함께 있는 사람이 차를 썼다. 아내가 차를 가져 나간다고 하자 내가 아이랑 어디 갈 수 있는 반경이 확 줄어들었다.
“왜? 나 애랑 동물원 갈까 했는데.”
동물원은 그냥 후보로만 있었지만 그런 것처럼 이야기했다.
“친구랑 보기로 한 데가 용인이라 대중교통으로 가기 어려워서.”
용인이라...
상간남이 이직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