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성욕
“안아줘”
갑자기 아내가 안겼고 나는 감싸지 않았다. 혼자만 나에게 안겨 있었다. 그러다가 얼굴을 들어 나를 보는데, 술 때문인지 눈이 살짝 풀려 있었다.
‘왜 그렇게 바라보는 거야? 왜 연애할 때처럼 바라보는 건데.’
곧 아내 입에서 믿기 힘든 말이 나왔다.
“하자. 하고싶어.”
갑자기 아내가 이런 소리를 하니 황당했다.
아내는 안긴 상태에서 왠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표정…
“하고싶어.. 해줘.”
아내가 다시 원래의 아내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지금은 아내는 예전처럼 다시 오롯이 내 여자로서의 모습이었다.
“당신이 잘못한 건 생각 안 해?”
“미안해. 해줘… 안아줘.”
어떤 이유에서든 아내가 나를 원한다.
멍청하게도 이제야 아내가 뉘우치고 주도권이 나에게 왔다고 생각했다.
너 원래 내 여자잖아.
내꺼였잖아.
순간 아내가 내 목에 입을 맞췄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무너져서는 안 된다고, 이건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계속 마음속에서 신호가 울림고 동시에 묘한 충동이 온몸을 휘감았다. 분노와 상처, 그리고 오랜 그리움이 한꺼번에 섞여서 설명할 수 없는 갈망으로 변했다.
“그만해..”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입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내의 얼굴은 울 것처럼 떨리고 있었고, 그 표정은 오래전에 내가 가장 사랑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이성적일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아내를 뿌리치지 못했다.
서로의 체온이 가까워지는 순간, 오래 전 우리가 함께였던 기억들이 불쑥 되살아났다. 속으로 ‘안 된다’고 수없이 다짐했는데, 몸은 이미 기억을 따라가고 있었다. 우린 어느새 드레스룸으로 이동했고 최근의 기억을 지워버렸다.
몸이 포개어졌다.
“좋아..”
맞아, 이렇게 좋았지.
함께 웃고, 기대고, 서로를 필요로 했던 그때. 그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하지만 그건 결코 예전처럼 순수한 사랑이 아니었다. 지금은 상처 위에 덧칠된 그리움, 그리고 되찾고 싶다는 절박한 욕망일 뿐이었다.
내꺼야. 내꺼라고.
그 순간만큼은 분노도, 배신감도 잠시 잊혔다.
단지 ‘내 것이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나도 아내도 모든 걸 잊고 서로를 탐했다.
아내는 먼저 씻고 방에 들어갔다. 정리하고 방문을 열어보니 피곤했는지 아내는 아이 옆에서 잠들어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거실로 나왔다.
아까 마시다 남긴 위스키 잔이 있었다. 얼음은 다 녹아버려 맹맹한 맛만 느껴진다. 방금 전의 뜨거웠던 감정이 싹 가라앉고, 차갑게 식어버린 내 마음처럼 허무하게 느껴졌다.
‘이상 성욕’
포탈 사이트에 들어가서 예전에 검색했던 단어를 다시 찾아보았다.
이혼 초기에 성적인 것에 대한 혼란이 있었다. 아내와 자고 싶다는 생각이 예전보다 강하게 들었다. 포탈사이트에서 확인한 내용은 ‘이상성욕’.
배우자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분노와 상실감 사이에서 오히려 다시 육체적 소유를 확인하고 싶어지는 기묘한 욕망이라고 했다. 실제로 많은 사연 글 속에 되려 배우자와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관계를 갖게 된 케이스가 많은 것을 보았다.
난 그러고 싶지 않아 혹시라도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길 계속 마인드 트레이닝 해왔는데 오늘 무너졌다.
딱지를 긁으면 당장의 시원함은 있지만 결국 더 늦게 낫거나 균에 감염될 수도 있는데 참지 못하고 딱지를 긁어버렸다.
이건 화해도, 사랑도 아니다.
그냥 무너진 마음이 만들어낸 본능적인 충돌이었다.
끝나고 나서야 알았다.
그건 욕망이라기보다, 잃어버린 나를 되찾고 싶었던 몸부림이었다는 걸.
그 날 이후로 우리가 관계를 가진 적은 없었다.
과거에서부터 이어진 익숙함은 다시 타오르지 않았고 우리 모두 실수라고 생각했었는지 그 날에 대한 언급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금융기관에 제출명령이 들어갔습니다.”
변호사에게 온 전화는 다시 우리가 전쟁 중임을 깨닫게 했다.
흔히 알고있는 메이저 은행, 증권사, 보험사에 명령서가 갔고 이혼소송을 제기한 시점까지의 최근 N년간 입출금 기록이 나온다. 주식보유를 얼만큼 하고 있는 지와, 어떤 보험에 가입했고 예상 수령액도 나온다. 이걸 토대로 재산 분할에 들어갈 것이다.
작년 12월에 공식적으로 시작된 이혼소송의 2차 재판은 7월 말로 잡혔다. 오래 걸린다는 것은 알고 시작했지만 진척이 늦어도 너무 늦다.
회사에서는 다시 주재원 이야기가 올라왔다. 12월에 가라는 말이 나왔는데, 이 속도로는 12월에 끝날 것 같지가 않다. 변호사에게 다시 양육권 관련 문의를 했는데 여전히 비관적이다.
곧 출장이다.
부득이하게 안된다는 고객사들이 몇 있어서 다행히 이번 출장은 길지 않게 잡혔다. 그래도 2주 가까이라 가기 싫었지만 혼자 가는 게 아니라 팀장님이랑 가서 다행이다.
기억에서 지우고, 아내도 이미 헤어졌다 했지만 혼자 출장을 갔다면 출장간 사이에 또 무슨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PTSD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팀장님과 함께라면 저녁 먹으면서 한 잔 할 테니 잡생각을 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출장지에서 다음 업체 미팅까지 시간이 남아 스타벅스를 들렸다.
회사 사람들 중엔 출장을 다니며 스타벅스 텀블러를 모으는 분이 있어 그게 생각이나 굿즈를 둘러보다가 백팩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어디를 나갈 때 항상 가방에 아이관련 용품을 많이 쟁인다. 필요하지도 않을 것 같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바리바리 싸들고 다니는 편이다.
그 가방 많이 낡았던데.
이 가방이 아내와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이혼하는 마당에 무슨 선물이냐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만날 업체 일본계라 정장입고 가야 하는데 허리띠랑 다 챙겼지?”
팀장님이 말을 걸었다.
팀장님과 출장을 갈 때, 내가 허리띠를 깜빡하여 팀장님 여분 허리띠를 빌린 적이 있어 우스개 소리로 농담을 던지신 거였다.
정장 챙겼고 구두는 신고 있고, 넥타이는.. 넥타이를 생각하자 이혼 소송 중에 아내가 본사 출장(외국계) 갈 때 넥타이를 사다 준 게 생각났다. 꼴 보기 싫어 구석에 넣어뒀지만 가끔 넥타이를 고를 때 생각이 나긴 했다. 하지만 포장 상태 그대로 두었고 앞으로도 찰 생각은 없다. 그건 아내의 최소한의 미안함 이었을까.
생각이 그렇게 미치자 그냥 가방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죄지은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뭘 받고 끝내고 싶지 않다.
나도 이거 사주고 그냥 마음의 짐을 덜자.
나도 알고 있다 이건 자기 합리화라는 것을.
그걸 알면서도 가방을 결제했다.
아내가 매면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