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재판
“양육권과 상관없이 나가지 않겠습니다.”
이 대답의 파장은 꽤나 컸나보다.
대표는 그 말을 듣고 바로 자리를 정리했다.
그날 오후부터 각 해외 법인장에게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모두 나를 설득하는 내용이었고, 연 1회 회사가 제공하는 항공권으로 가지 않더라도, 고객사와 공장 심사나 다른 출장거리를 만들어서 한국에 방문하면 된다는 것으로 위로하는 분들도 있었고, 회사가 사정을 아는 상태에서 단신부임이니 년 1회 항공권을 반기로 요청해보라는 분도 계셨다. 유일하게 전화가 오지 않은 건 미국 법인장 뿐이었다.
10월 어느 날, 변호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상대측 서면이 왔습니다.”
지난 서면에서 내가 녹취록 증거까지 냈으니, 이제라도 시인했으려나 하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으나 서면을 열자마자 또 거짓으로 반박하고 있는 게 첫 장부터 보였다.
카카오톡 기록을 제출한 것에 대해서는 상간남과 진행하는 프로젝트 때문에 밤낮없이 업무상 연락을 했던 것 뿐, 다른 직원들과도 카카오톡으로 마찬가지로 업무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라 반박했다.
녹취록에 대해서는, 원고가 의처증이 심해 어느 순간부터 너무 지친나머지 원고의 말에 적당히 반응해주고 편안해지자는 마음을 먹게 되었고, 원고와 대화를 할 때마다 원고가 원하는 답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원고가 제출한 녹취록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기억하고, 이와 같은 원고의 의심과 추궁에 지쳐 원고와의 혼인생활을 마무리하기로 결심했다고 썼다.
마지막으로 조정이혼으로 회부해달라는 말이 있었고 소결과 결론은 합쳐서 반 페이지도 되지 않았다. 총 5페이지 밖에 안되는 짧은 서면이다.
그 뒤로 피고2(상간남)가 얼마나 국내 출장을 자주 다니는지에 대해 당사자 내부 출장기안서들을 쭉 증거로 붙였다. 또한 아내도 녹음을 했는지 약 25페이지에 달하는 속기 딴 서류를 제출했다.
당시의 주제는 부사수의 결혼식에 가겠다는 것이며 그 당시 약속했던 서로의 자유시간 두 시간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에 대한 내용이었다. 제출한 녹음일자는 1월 중순으로 이미 아내가 외도를 걸리고 상간남과 헤어질 생각이 없다고 선언한 상태이고 우리가 어떻게 할 지 정리할 때 까지 일단 상간남을 사적으로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한 시점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부사수의 결혼식에 못 가게 한다는 건, 케이스가 어쨌든 나도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여 결혼식 가는 것에 대해 반대하진 않았는데 상간남도 오는 자리에 식사까지 하고 올 필요가 있냐는 것에 대해 나의 집착이고 의처증이라는 것에 대한 증거로 제출한 것 같았다.
내 변호사는 상대가 인정하긴 싫고 그렇다고 말을 더 장황하게 지어내기 어려울 테니 간단하게 쓰고 의미 없는 증거들을 제출한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거짓은 너무 익숙했다.
그들의 글은 짧았지만, 그 안에는 사과도 양심도 없었다. 나는 다시 싸움을 준비해야 했다.
변호사와 함께 반박서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첫 체이지는 카카오톡 대화가 단순 업무 때문이었다는 것에 대한 반박을 썼다.
12월 1일부터 1월 9일까지의 메시지 개수가 약 9천개에 이르는 점을 토대로 단순한 직장 동료사이에서 주고받을 양이 아니며, 시간대도 근무시간이 아닌 아침이나 늦은 밤, 새벽까지 수없이 많은 메시지가 오간 점에서 피고들이 여느 교제하는 연인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사이로 지냈다고 썼다.
둘이 숙박업소에서 밤을 보낸 것에 대해 실토한 것을 추가로 언급하였고, 이미 관계가 원고에게 들통난 상태에서 인근 소재 빌라(에어비앤비)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였다는 것을 쓰고 둘이 팔짱 끼고 들어가는 사진을 증거로 넣었다.
피고2는 사과는 커녕 원고를 향해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면서 업무적으로 만났다는 등의 변명을 했다는 것과 함께 녹취록도 증거로 첨부했다.
그 밑으로 반차까지 써가면서 대낮에 사무실도 아닌 곳에서 투숙하며 업무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말이 되지 않는다는 내용을 썼고, 웃기게도 아내가 3차 서면으로 제출한 상간남의 출장 기안들을 보면 원고에게 현장에서 잡힌 해당 날짜는 피고2가 오후반차를 낸 날인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도 추가했다.
아내가 제출한 녹취록에 대해서도 변호사의 가이드를 받아 반박했다. 녹음일자가 이미 원고가 부정행위를 알게 된 후 이혼소를 제기한 이후 인 점, 그 와중에 회사 동료 결혼식에 간다고 하니 피고2도 같은 회사에 근무함으로 당연히 구체적으로 물어볼 수 밖에 없었던 것에 대해 의심하고 추궁한다고 왜곡해서 혼인생활의 파탄을 원고에게 전가하려 하고있다고 썼다.
이미 혼인관계가 파탄이 나있었다는 피고의 주장에 대해서는, 부정행위가 발각되기 전까지 원고와 피고, 사건 본인은 함께 가족 여행을 수시로 다녔고, 사건본인 없이도 데이트를 하면서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 쓰며 증거로 가족끼리 여행 다닌 사진들과 부부사진, 부정행위를 알기 약 2주 전 아내와 데이트로 콘서트를 보러가서 함께 사진 찍은 것도 제출했다.
이 부분을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당시 아내는 학창시절 본인이 가장 좋아하던 그룹의 콘서트라 같이 가자며 졸랐고, 나도 좋아하는 그룹이라 그러자고 했다. 아이는 처가에 맡기기로 했었다. 그런데 일주일 전부터, 그냥 안 가고 싶다고 표 취소하자고 했는데 그 때는 이유를 몰랐다. 지금생각하면 그날도 아내는 나와의 발걸음을 지워 나가고 있었다.
당신만 가고 싶은 게 아니라 나도 기대하고 있었으니 그냥 가자. 특별히 뭘 할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아이도 처가에서 봐주기로 하지 않았냐 했는데 그냥 아이는 아들이랑 시간 보내자고 했었다. 추측하 건데 상간남이 아내가 나와 공연 보러 가는 것에 대해 탐탁치 않아 했기에 그랬던 게 아닐까 싶다.
그 밑으로는 재산분할표를 집어넣었다. 다행히 내 쪽에서는 은행, 증권사 등에서 모든 서류가 왔기에 내 것은 제출할 수 있었고 아내는 한 곳에서만 오지 않았으나 그 금액이 크지 않을 것을 알기에 변호사가 나중에 보충하면 된다하였다. 나는 조정의사가 없기에 판결에 따르겠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그리고 친권 및 양육자 지정에 대해서는 아내가 아이의 양육자로 부적합함을 언급했다.
쇼윈도 부부로 지내자면서 사건 본인에게 피고2를 삼촌으로 부르게 하자는 등 도저히 엄마로서 해보일 수 없는 비정상 적인 태도를 언급하며 녹취록 부분을 발췌했다. 또 다른 증거로 아내가 주말에 낮술을 하고 와서 인사불성인 상태로 아이를 방치하고 잠에 들어 아이가 계속 엄마 주변에서 머물러 있었던 홈캠 영상을 첨부했다. 저녁에 원고가 약속이 있어 나가기로 했는데 괜찮다고 자기가 아이 볼 수 있다해서 나갔다가 홈캠을 보고 도저히 안될 거 같아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썼다.
그리고 왜 내가 친권자 및 양육자가 되야하는 지도 어필했다.
아이와 평소에 얼마만큼의 시간을 보내고 같이 노는지, 이 사건이 진행되는 중에도 아이와 필리핀, 몽골, 일본 등 해외여행을 다니며 아이의 정서적인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고 부자간의 유대관계가 끈끈하다는 것을 썼다.
회사에 주재원을 나가지 않겠다고 의사를 밝힌 점과, 앞으로 국내업무로 전환할 것으로 예정된 점, 부모님이 양육을 도와 주실 수 있는 점에 대해 썼다.
마지막 입증밥법으로는 피고들이 팔짱끼고 있던 사진, 상간남과 대화한 녹취록, 가족사진, 아내와 찍은 사진, 재산에 대한 서류들(KB시세, 대출 잔액 확인서, 아파트 구입내역, 생활비 지급내역)과 홈캠영상, 아이와 둘이 여행간 사진들, 본가 식구들과의 사진들, 어머니가 육아를 함께해주시겠다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넣었다.
제출은 지난 번처럼 재판 1주일 전에 냈다.
“오셨어요?”
변호사가 법원 1층의 카페에서 날 발견하고 인사했다.
“네, 먼저 와계셨네요.”
“들어가기 전에 기록들 다시 보고 저희 준비서면도 다시 보고 해야 하니까요.”
오늘은 3차 재판일이다. 이번엔 나도 출석했다.
출석요구가 있던 것은 아니지만 사건을 담당하는 판사도 보고 싶었고 가능하면 억울함에 대해 토로도 하고 싶었다.
날씨 탓인지 법원의 분위기는 쌀쌀했다.
우리는 재판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는 이미 여러 변호사들과 소송인들이 자기 재판 차례를 기다리며 앉아있었다. 누군가는 분주하게 전화를 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울고 있었다.
“사건번호 2023드단 XXXXXX 들어오세요.”
내 차례였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심장이 요동쳤다.
문이 열렸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