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외도. 그래서 나는 법정에 섰습니다.]-27화

무너진 우주

by 첩극


처음으로 판사를 보았다.


중년의 여자였다. 긴 머리를 단정히 묶은 모습이 차가웠다기 보단 기계 같았다.

이미 수백 개의 가정을 무너뜨리고 다시 세워본 사람의 얼굴이었다.


판사는 처음 들어올 때 빼고는 내 얼굴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당사자 출석을 확인하며 내 이름을 부르고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피고석 자리에는 젊은 남자 변호사가 앉아있었다. 그의 손에는 두꺼운 서류철이 들려 있었지만, 표정은 놀라울 만큼 가벼웠다. 아까 바쁘게 전화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판사가 재산 분할 관련하여 질문했는데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지금 들고 있는 그 서류 속에 내가 지난 몇 달간 견뎌온 밤들과, 증거들이 들어있는데 저 사람에게는 그저 하나의 업무일 뿐이었다.


“긴장하지 마세요. 오늘은 짧게 끝날 겁니다.”

내 변호사는 내 옆에서 조용히 속삭였다.



그 말은 사실 위로가 아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재판처럼 잔인한 게 없다.


판사와 변호사들이 오가는 모든 말들이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서류와 숫자, 도장과 절차, 그 안에 내가 없었다. 나는 단지 사건번호와 원고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판사는 빠르게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양 측의 서면과 제출 증거는 모두 확인하였습니다. 피고 측은 재산분할표가 아직 미제출 상태이니 다음 서면까지 반드시 제출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전부였다. 10분도 지나지 않았다.

판사는 단 한 번도 내게 묻지 않았다.


‘왜 이 싸움을 시작했는지’, ‘무엇을 잃었는지’, 혹은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그 어떤 질문도 없었다.

재판이 끝나자, 모두가 동시에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


나만 자리에 남아 무릎 위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입을 열지 못했고 열 기회도 없었다.

재판이 끝났는데 판사도 내 변호사도, 피고 변호사도,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


나도 외투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기 전에 법정을 다시 바라보니 공기가 전혀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가벼워서 불안했다.



법정을 나서는데,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쳤고 가을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3차 재판이 끝났다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


지하철 역으로 향하는데 어느 건물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사람들이 웃으며 대화하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내 귀에선 노이즈처럼 번졌다.


지하철역 입구로 내려갔다.


계단 아래로 내려갈수록 공기가 차가워진다. 개찰구를 통과하고, 플랫폼 끝에 서니 선로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 안내 방송, 사람들의 웅성임. 모두 소음이다. 내가 속하지 않은 세상 같았다.


아직 퇴근시간이 아니기 때문인지 좌석 대부분 비어 있었고 나는 문 옆에 앉았다.

너무 허무했다. 누군가와 싸웠다는 게 아니라, 내 안의 어떤 것이 부서진 느낌을 받았다.


열차가 한 정거장을 지나자, 맞은편 좌석에 내 아들 또래의 어린아이와 엄마가 앉았다. 아이는 엄마 손을 잡고 장난을 쳤고 엄마는 아들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우리 아들도 엄마 손잡고 저렇게 장난 치는 것을 좋아하는데.


휴대폰 진동이 느껴져 열어보니 회사 메일이었다.


‘납기 확인 문의관련 회신 드립니다.’

‘결재 문서가 승인처리 되었습니다.’


모두 평범한 것들인데, 그 평범함이 잔인하게 느껴진다.

그들에겐 아무렇지 않은 하루였구나.





3차 재판이 끝나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12월 초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처갓집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당연히 나는 안된다고 말했고 카톡으로도 해당 내용을 보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변호사에게 물어봤고 변호사는 판결이 얼마 안 남았으니 그 뒤에 움직이자, 나갈 거면 혼자 나가라는 내용으로 기록을 남기라고 하였다.


당시는 계엄령으로 나라가 떠들썩한 시점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런 시기에 지금 진행 중인 건 잠깐 미루더라도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었다. 다행히도 내가 우려하던 일은 없이 시간이 흘렀다.


연말이 다가오며 회사, 친구들, 군대 모임 등 송년회 이야기가 단톡방에서 계속 나왔다. 애매하게 12월 12일 목요일에 친구들 송년회가 잡혔지만 차라리 주말 보단 나았다. 주말엔 아이와 온전히 시간을 보내고 싶었으니까. 아내에게는 날짜를 이미 알려주었고 아내도 알겠다고 하였다.


친구들과 이태원에 모였다.

20대 초에는 정말 자주 왔던 곳인데, 나이를 먹으니 오히려 오지 않게 되었다. 추억의 삼겹살 집에서 소주와 함께 친구들과 회포를 풀었다.


곧 창업을 준비하는 친구도 있었다. 어렸을 때는 창업이 쉬운 줄 알았다. 지금은 거래처의 작은 중소업체 사장님들을 만나면 대단해 보인다. 이 친구가 얼마나 큰 결심을 하고 창업을 하는 지 한참을 들었다.


2차로 노가리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군가 계산을 했고 밖으로 나가니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본 친구들과 기분 좋게 취한 상태에서 눈을 맞으니 저마다 감상에 잡혔다. 누구는 택시를 타고, 누구는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지하철을 기다리며 자고 있을 아이를 생각했다. 술 냄새도 나고 늦게 들어왔으니 당연히 거실에서 자야겠지만 잠깐이라도 안방에 들어가서 아이 자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와야지 하는 생각이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 눈은 어느새 그쳐 있었다. 겨울이라 다들 일찍 잠에 들었는지 아파트 창문들이 대부분 어두웠다.


밑에서 우리 집을 올려다보았는데, 우리 집도 불이 꺼 있었다. 보통은 한 명이 늦게 들어오는 날엔 거실 불을 켜두고 잔다.


집 앞에 도착했다.

현관을 들어서는 순간 느껴지는 공기가 달랐다. 어째서인지 찬 기운이 가득하다. 설마 환기한다고 창문 열어놓고 안 닫았나? 현관에는 내 신발들이 나뒹굴어져 있었다. 아내의 신발과 아이 신발이 보이지 않는다.


현관 불에 의지해 신발을 벗는데 거실이 보였다. 뭔가 이상하다.

아이의 놀이 텐트가 안보인다. 놀이방으로 옮겼나 했다. 그런데 그 옆으로 티비가 있어야할 자리에 티비가 없다.


이상함을 감지하고 후다닥 거실로 들어왔다.


아이 있는 집 답게 아이 용품으로 꽉 차있던 거실엔, 소파 하나만 놓여있었다. 그러고보니 에어컨도 없다. 베란다 창문은 활짝 열려 있고 방충망 조차 닫혀 있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주방을 보았다.


식탁과 의자는 있는데, 냉장고가 없다. 오븐과 에어프라이기도 없다. 식기함을 열어봤는데 아이 숟가락, 젓가락 그리고 포크가 안보인다.


아니겠지,

아니겠지.


안방 문을 열었다.


자고 있어야 할 아이도 아내도 없었다.

우리 침대와 아이침대, 그리고 아이 옷장까지 남아있는 게 없었다.

침대 위에 있어야 할 벽걸이 에어컨도 없다.


“이게 뭐야..?”

너무 당황스러워서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르겠다.


아이 놀이방으로 가보니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의 모든 장난감은 다 이곳에 있어야 하는데 텅 비어 있었다. 창문에 붙어있는 스티커와 문에 붙어있는 아이 키 재는 대형 기린 스티커만 이곳이 아이 방이라는 흔적을 나타내었다.


한 군데씩 확인할 때 마다 아니겠지 하는 말도 안되는 기대를 가졌다.

드레스룸으로 가니 내 옷만 걸려 있다.

베란다로 가보니 세탁기도 없다.

현관의 신발장을 열어보니 마찬가지로 내 신발만 있다.


다시 거실로 나왔다.

거실과 모든 방의 불을 다 킨 상태라 비어 있는 집이 더 크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없다.

침대, 스타일러, 세탁기, 에어컨, 장난감, 그리고 가장 중요한 아이까지. 모든 게 사라져 있었다.


도둑이 와서 다 털어갔다 하더라도 이렇게 당황하진 않았을 것 같다.


나는 무릎이 꺾이듯 주저앉았다.

허망하게 빈 공간이 나를 집어삼켰다.


그냥 떠난 거다. 모든 걸 다 가져가면서.


아내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재판이 거의 끝나가는데.. 그걸 기다리지 못하고 이렇게 나가버렸다.


바닥에는 가구가 있던 자리의 자국들이 희미한 그림자처럼 남아 있었다.

손끝으로 그 자국을 따라 그렸다. 이게 우리가 살던 흔적이었다.

그 흔적 위에 벌써 먼지가 쌓여 있었다.


손이 떨리고, 숨이 가빠진다.


밤 늦은 시간이지만 인터폰으로 경비실에 전화를 걸었다.

몇 호 세대주인데, 혹시 오늘 이사했냐고 물어보니까 “아까 낮에 사다리차 와서 나갔잖아요. 이사간 거 아녔어요?” 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대답 없이 인터폰을 종료했다.



"으아아!! 으아아아!!! 아아아!!!"



가슴 깊숙한 데서 무언가 끓어올랐다.

당장 소리치지 않으면 내 몸이 터져버릴 것 같아 몇 번을 소리쳤다.


화를 주체하지 못해 뭐라도 잡아 던지거나 부셔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라도 해야 내가 진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눈 앞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를 잡을 것도, 부술 것도 없다.


집 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내가 모든 걸 가져갔다.

이 분노조차 해소 시키지 못하게 나의 모든 걸 앗아갔다.


이건 단순한 분리나 싸움이 아니라,


관계의 사망선고였다.



"으.. 으어.."


짐승이나 낼 법한 소리가 눈물과 함께 터져나왔다.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려 한참을 쏟아냈다


변호사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은 인간의 말을 할 수 없었다.



바닥에 누웠다.


열려져 있는 창문과 추운 겨울바람 때문에 바닥을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 집엔 가족의 온기가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


아내의 외도를 알고 재판이혼을 하면서 삶이 무너졌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내가 진짜 무너진 날은 오늘이었다.

사람은 울다 가도 울 곳 마저 사라지면, 그제야 진짜 무너진다는 걸 알았다.


아이가 보고 싶다.

왜 언제든 볼 수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했을까.


아이에게만 부모가 우주가 아니었다.

아이 역시 나에게 우주였다.


오늘 그 우주가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