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외도. 그래서 나는 법정에 섰습니다.]-28화

잔해 위에서

by 첩극


움직여야 했다.

움직이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았다.


일단 창문부터 닫고 난방을 켰다.

대충 치우고 잘 때 쯤이면 따듯해지려나.

잘 수는 있으려나.


청소용품을 찾는데, 밀대와 청소포가 없었다. 이것도 가져갔구나.

자세히 보니 신발자국이 거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긴 짐 옮기는 사람들이 왔다하니 거실에만 발자국이 있는 것도 이상하지.


그나마 다행인 건 아이 물티슈가 있었다.

일단 급한대로 이거로 닦고 부족하면 수건을 걸레로 써야지.


아, 근데 수건은 있을까? 화장실로 가보니 다행히 수건은 있었다.

커다란 샤워타올은 가져갔나 보다.

어차피 나는 쓰지도 않았고 아내와 아이가 주로 쓰던 거니 그러려니 했다.


바닥을 한참 닦고 있자니 휴대폰 배터리가 부족하다는 알람이 울렸다.

충전기를 찾다가 충전기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랑 단자도 다른 모델을 쓰면서 이건 왜 가져간 걸까.

거실 바닥을 닦고 안방에 들어갔다.

아이 옷장과 우리 침대, 그리고 아이 침대가 있던 자리에 어지럽게 신발자국이 새겨 있었다.


"하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일단 이걸 닦긴 하는데.. 여기서 잘 수는 있을까.

다행히 이불 하나는 붙박이 장에 있었다.

이불밖에 없으니 소파에서 자야 한다.

일단 집에서 잘 수는 있게 되었다.


충전기를 사러 편의점으로 나왔다.

아까 그쳤던 눈이 다시 내리고 있었다.

가로등에 비치는 풍경은 내 마음과 달리 아름다웠고 그래서 더 슬펐다.



대체 아내는 왜 그랬을까.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어느새 새벽 두 시가 넘었으니 자고 있겠지.

오늘 무슨 생각을 하다 잠에 들었을까.

아이에게는 뭐라고 했을까.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차라리 실종신고를 해버릴까 하다가 접었다.


집에 돌아와 충전기를 휴대폰에 연결했다.

아직 집은 추웠다.


내일 도저히 회사에 갈 수 없을 것 같다.

팀장님께 늦은 시간에 연락 드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내일 개인 사정으로 연차를 쓰겠다고 메시지를 보내 두었다.

다행히 내일은 급한 일이 없고, 정 급한일이 생기더라도 집에서 처리하면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이 와중에 업무 걱정을 하고 있는 내가 우스웠다.

망가진 가정과 잔해밖에 없는 집에서 그런 걸 걱정하고 있다니.


샤워를 하고 잠옷을 꺼냈다가, 아직 집이 추워 더 따듯한 잠옷이 필요했다.

기모가 있는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이불을 들고 소파로 이동했다.

난방을 켠 지 두 시간은 됐을 텐데, 아직 집에 온기가 없다.


냉기와 함께 이불을 덮었다.

이 집에 온기가 돌아오기는 할까.


어제 알람을 꺼두고 잤기에 일어난 건 아홉시가 다 되어서였다.

시계를 보고 깜짝 놀라 재빨리 일어나 씻으려다가 자기 전에 팀장님께 연차를 쓰겠다고 메시지 보낸 것이 생각났다.



아내에게 장문의 메시지가 와있었다.


이혼 중에, 내가 나가라고 했음에도 나랑 살고 주말에도 최대한 같이 다니려고 한 건, 아이의 유치원 생활과 일상을 지켜주고 싶어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기 위함이었고 틀어진 우리 관계 회복을 위한 게 아니었다는 것과 내가 그것을 이용했다는 내용이었다.


대체 내가 뭘 이용 한거지?

아직도 모르겠다.

대체 내가 뭘 이용한 걸까.


아빠랑 노는 것보다 외할머니랑 노는 게 더 좋다는 아이를 보며 친정에서 생활하는 게 더 나을 거 같아서 나랑 억지로 지내느니 이게 보다 나은 선택이다 싶어 내린 결정이니 그리 알고 있으라고 써있었다.


마지막으로 부동산에 집 보러 온다는 연락이 오면 보여줘야 하니 평소 집을 좀 정돈해주면 좋겠고 이불은 장 안에 있다고 했다.


아내의 외도를 알았을 때, 그리고 가정을 유지하고 싶으면 자유로운 사생활을 인정해달라 했을 때처럼 아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미친듯이 웃음이 나왔고, 눈물도 같이 나왔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미칠 거 같았다.

아니 이미 미쳤을 지도 모르겠다.

이젠 아무것도 모르겠다.


다시 자자.

차라리 다시 자자.

자고 나서 생각하자.

지금 뭘 생각하고 행동하면 안 될 것 같으니 일단 자자.


기껏 자야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커튼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커튼을 치러 소파에서 일어나서 창문으로 이동했다가 그 빛을 맞고 있으니 따듯함이 느껴졌다.

이 빛이 집에서 느껴지는 유일한 온기였다.


다시 잠은 잘 수 없을 것 같지만 지금 아내에게 연락하면 내가 무슨 소리를 할 지 몰라서 잠깐 참기로 했다.


뭘 해야하나 고민하다 집 근처 산에 갈 생각으로 패딩을 꺼내 입었다.


일단 걷자.

산에 가서 걷다 보면 머리가 좀 식지 않을까 했다.

산 입구까지 40분, 올라갔다 내려오는 데 한 시간, 돌아오는 데 또 40분.

이 정도면 생각을 좀 정리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산 입구까지 한참을 걷다가 목적지를 잘못 정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산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도 아내와 자주 왔던 곳이고, 아이가 어느 정도 큰 다음에는 다같이 종종 올라온 곳이다.

지금이라도 다른 데로 발길을 옮길까 하다가 그냥 걷기로 했다.

대신 평소에 가는 등산 코스가 아닌 다른 코스로 올라가야겠다.


산길은 생각보다 가팔랐다.

오르막을 오를수록 온몸이 땀으로 젖었고, 숨이 찼다.

이상하게도 숨이 차니까 생각이 멈췄다.

아내의 얼굴도, 재판도, 집도.

오직 내 숨소리만 들렸다.

이러다 그냥 쓰러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중턱쯤 올랐을 때, 산 아래로 도시가 보였다.

이 안 어딘가 저 멀리 아내와 아이가 있을 텐데, 이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다.

나만 멈춰 있다.

세상은 내 고통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걸음을 멈추면 진짜 끝일 것 같았다.

무너진 건 아내와의 관계이고, 나까지 무너질 순 없었다.

아이를 위해 단단한 아빠가 되어야 했다.

양육권이 아내에게 가더라도, 아빠가 곁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기댐이 필요할 아이에게 아빠는 굳건히 살아 있다는 걸 보여줘야 했다.


언젠가 너도 친구랑, 아니면 홀로 이 산길을 오를 날이 오겠지.

그 때 아빠가 여기 있다는 걸 너는 몰라도 괜찮다.

그 날 아빠는 버티고 있었다.

너는 몰라도 된다.

몰랐으면 좋겠다.


다시 한번 숨을 내쉬었다.

하얀 입김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살아남자.

살아남자.

살아남자.


이 말을 세 번 되뇌이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것이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