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단 침입
다음날 아이와 본가에 가 있는데 아내에게 메시지가 왔다.
[도어락 비밀 번호를 몰라서 집에 들어갈 수가 없어 업체 직원이 와서 출장비 줬고 문 열어줬음. 비밀번호는 예전 거로 변경했어. 또 무단으로 변경하면 관련 비용은 추가로 발생할 거고 누적 되겠지? 그 비용에 대해서는 필히 당신한테 청구할게.]
아내가 집에 들어왔었나 보다.
[나간건 당신인데 왜 집에 들어왔어? 그걸 왜 나한테 청구해?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내가 비밀 번호 바꿨다고 메시지도 보냈었잖아.
그리고 내가 지금 애랑 본가 와있는 거 알잖아? 그럼 상황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고 나한테 비밀번호를 물어보는 게 정상이겠지? 그런데 출장 불러서 무단으로 들어온 데다가 비용을 청구한다?]
여기까지 보내고 화가 나서 바로 전화를 했다. 아내는 전화를 받지 않고 끊어버렸다.
[전화는 왜 끊어? 왜 무단 침입을 했냐고.]
아내는 답장하지 않았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한참을 바라봤다. 차라리 싸움이라면 속이라도 후련했을 텐데, 이건 감정이 아니라 계산 같았다.
마음 한쪽에서 ‘이 사람은 언제부터 나를 이렇게 대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손끝에서 이런 문장이 나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그 날 아이를 데려다 주면서 다시는 무단으로 집에 오지마라고 했지만 아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며칠 뒤 한참 일하고 있는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연속으로 울렸다. 아내였다.
미리보기로 보이는 몇 문장에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일상 속에 섞인 분노는 더 날카롭다. 사무실 공기가 그대로 얼어붙은 듯했다.
[애랑 단둘이 있는 시간동안 엄마가 침대, 냉장고 등 가져가서 아빠는 밥도 나가서 먹고 잠도 바닥에서 잔다고, 아빠 불상하다고 세뇌해놨어?
애가 엄마는 부자고 아빠는 가난하다면서 외로울 거다, 나 못봐서 슬프다고 하더라 하면서 세뇌 당한 애처럼 어제도 잠자기 전까지 울적해 하면서 말하더라.
지금 우리가 왜 떨어져 지내는데? 애 앞에서 싸우는 모습이나 서로 쳐다도 안 보고 대화도 거의 안하고 냉랭한 모습 안보이고 서로 같이 있어 봤자 불쾌하고 남보다 못하니 나와 지내는 건데 왜 애 한테 엄마가 다 뺏어 가서 가난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거지?]
[당신 본가 식구들, 아빠에 대해서도 안 좋게 생각할 건덕지 없이 나도 늘 말조심 하고 우리집 식구 다 그러는데 왜 애 한테 정서적 학대를 일삼는 거야?]
[크리스마스 때 보는 거도 일단 보류하자. 이런 식으로 애 세뇌시키고 상처 주고 아프게 할 거면 이건 신체 학대 아니라고 해도 학대로 보고 법적 조치 할 거야.
울 엄마한테도 냉장고 많아지고 할머니가 부자된거지? 그러면서 말하더라. 원래 엄마가 사준 거야. 우리가 산 게 아니고 당신 집안에서 사준 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서면에도 가져가는 거 인정해놓고 이제와 불편하니 짜증나서 애 한테 보복해서 나까지 열 받게 하려는 심보 진짜 지독하다.]
1월에 있을 전시회 출장 준비로 한참 정신없는데 이런 카톡을 받으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잠시 일을 덮고 나가서 담배를 연속 세 대를 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한 갑을 다 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한숨을 뱉어내도 울분이 가시질 않는다.
나도 아내에게 장문의 카톡을 여러 개 보냈다.
[내가 애를 세뇌한다고? 그러고 싶지도 않고 어떤 상황이든 애가 적응하는 걸 1순위로 생각해. 아빠가 가난하다고 말한 적도 없고, 침대 없는 건 애가 자기 침대 할머니네 있다해서 아빠는 바닥에서 잔다고 했지. 냉장고는 모르겠네.
애랑 본가 갔을 때 엄마가 에어프라이라도 가져 갈래? 하신 거를 내가 냉장고 없어서 냉동식품 둘 데도 없어 한 거를 들은 거 같고.
당신이 우리집에 대해 말 조심하듯 나랑 우리 가족도 처갓집에 대해서는 말 조심하고 있어.]
[당신이 뺏어 갔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애가 그렇게 느끼나 보다. 엄마가 부자 됐다고 말한 적도 없고. 애가 이번에 만나면서 가장 많이 한 말이 뭔 지 알아? 아빠 가지마. 아빠 같이 살자.]
[심보는 당신이 지독하지. 갑자기 애랑 물건 다 빼놓고? 애가 최대한 덜 상처받게 헤어지기 위해 소송 중에 같이 살았는데 그런 것에 대해 당신이 일방적으로 떠나버렸 잖아. 그게 정서적 학대야.]
[애가 걱정된다면 최소한 이번에 만나서 애가 오해하지 않게 당신이랑 내가 함께 설명을 해줘야지. 언제까지 한쪽 한쪽씩 있으면서 애를 심적으로 힘들게 할 거야? 이렇게 당신 마음대로 원하는 날짜에 따라 애 보고 그러는 게 더 애 한테 오해를 쌓게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본인이 상대를 100만큼 찔러도 0.1이라도 자기가 찔린 것 같으면 피해자는 당신이지 항상. 그래서 발작하듯이 뒤도 없이 말하고.
난 애 한테 외롭다 한 적도 없고 보고싶으면 언제든 볼 수 있다고 했어. 법적 조치를 취하고 싶으면 하세요. 나도 할 테니까.]
아내는 내 답장을 기다렸다는 듯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답장을 했다.
[애 한테 아무 말 안 했는데 애가 거짓말이라도 하는 식으로 얘기하지마. 애가 그럴만큼 어리지도 않고. 보고싶으면 언제든지 볼 수 있다고 말해둔 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애가 아빠랑 만나고 나서 아빠를 가엾게 여기는 거, 눈물짓는 거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아무 얘기 안 했다고 볼 수도 없는 일이고. 안 했다 하더라도 난 애가 슬프지 않을 방법을 선택할 거야.]
애가 슬프지 않을 방법이라.. 당신이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왜 외도를 했을까.
나도 바로 답장했다.
[이미 본인 잘못으로 앞으로도 쭉 슬프게만 만들어놓고 뭘 이제와 애 챙기는 척이야? 웃기다 정말. 나도 애가 거짓말한다고 말 안 했어. 그렇게 느꼈나 보지. 못 느낄 만큼 둔한 애도 아니고.]
아내는 메시지를 읽었지만 그 후로 답장이 없다가 다시 무단침입 관련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공동소유인 아파트의 비밀번호를 무단으로 변경하는 건 나의 소유권을 무시한 불법 행위야. 변호사랑 상담했어. 이후에도 비밀번호 바꿀 시 비용과 부동산 매도를 위해 집 청결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청소 용역 발생 비용 모두 청구할거야.
그리고 애는 주말에 당신을 만나고 심리적으로 불안정해지고 나한테 집착도 강해졌어. 크리스마스에는 보지 않는 게 좋을 거 같네.]
무단침입 관련해서 변호사에게 바로 알리고 상담을 했었다.
아내와 공동 명의인 집이 맞지만 집을 나간 상태에서는 거주권을 스스로 이탈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기에 아내가 지금처럼 내가 비밀번호를 바꿨다고 사전 고지를 했음에도 출장업체를 불러 문 따고 들어온 것은 무단 침입으로 고소할 수 있다고 했다.
[변호사랑 상담 제대로 한 것 맞니? 비밀번호를 변경했다고 난 사전에 말했고 그럼에도 말 안하고 출장 불러서 문 딴 건 당신이지?
집 청결 상태 어쩌고.. 그래서 집 그꼴로 만들어 두고 가셨어요? 그리고 애한테 뭐가 나을지 고민해서 바람을 피셨나요?]
아내도 분에 못이겼는지 바로 답장을 했다.
[적당히 해라 니가 생각한 그 바람. 그래서 내가 걔를 만났다 쳐. 얼마나 만났는데? 며칠 친하게 지낸 거 가지고 언제까지 그럴 건데? 곱씸으면서 사건 확대해석하고 상처받은 척 하지마 좀.]
[진지한 사이도 아니었고 서로한테 관심 있었겠거니. 사랑이라도 하는 사이었겠거니 대단한 사이처럼 생각해야 당신히 불쌍해 보이고 동정받는다고 생각해서 이러는거야?]
[그렇게 생각해야 그래도 본인이 남편으로서 남자로서 별로고 매력없고 이미 정내미 떨어져서 와이프한테 걱정도 안되는 대상이라는 사실을 차라리 상처받을 만큼 버림 받았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니?]
아내는 화가 나면 뒤를 생각하지 않고 말을 뱉는 편이다.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랬다. 나는 그 말을 수없이 들으면서도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언제나 ‘이번엔 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고, 그 기대는 매번 같은 방식으로 부서졌다. 지금은 이혼 중이니 저런 말을 뱉는 것에 더 거리낄 게 없겠지.
[나 너네 만나고 있는 거 참았는데, 더 참으려고 했는데. 애 자고 있는 집에 데려온 순간 모든 게 끝났어. 그건 선을 넘었거든.
당신이 지금 쓴 거는 자료로 제출할 것도 아니고 카톡으로 인정하든 말든 상관없어. 적어도 당신 스스로는 진실을 알잖아 그렇지? 그나저나 그 남자랑 찍은 인생네컷은 다 버렸니? 아니면 추억이라 간직하고 있니?]
[당신한테 동정 받고 싶은 생각도 없고 내가 당신한테 그걸 왜 받아? 뭐 그렇게 당신이 우길 수도 있겠는데 나 별로 아니더라. 치유도 잘 받고 있고 당신과의 상황만 아니면 나 참 건강하더라. 고마워 알게 해줘서. 내가 최소한 애 엄마로 대할 때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네.]
메세지를 보내고 나서 손이 떨렸다.
한때는 나를 가장 잘 이해하던 사람이, 이제는 가장 깊은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보다, 사랑했던 사람을 미워해야 하는 일이 훨씬 고통스럽다.
20분 정도 뒤 아내에게서 답장이 왔다.
[크리스마스에 볼 의지가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