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과장의 독서 기록 Book #8
최근 본 미드 <기묘한 이야기>에서 여주인공 엘 (Eleven)은 롤러스케이트로 한 여학생의 이마를 가격한다.
엘이 폭력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그 이전에 여학생은 엘의 죽은 아버지를 조롱했고, 남자친구와의 데이트 현장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등 지속적인 심리적 괴롭힘을 가해왔다.
참고 견디던 엘은 결국 폭발했고, 그 결과 여학생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렀다.
문제는 이 지점이다.
피가 흐르는 장면은 누구나 볼 수 있지만, 그 이전에 쌓여온 심리적 폭력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가해의 무게는 종종 물리적 폭력을 행사한 사람에게만 쏠린다.
보이지 않는 상처는 더 쉽게 무시된다. 물리적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지만 흉터가 남는다.
심리적 상처도 다르지 않다.
다만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심각성이 축소되거나 개인의 예민함으로 치부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물리적 그리고 심리적 폭력 모두 정당화될 수는 없다.
갈등은 대화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식이다.
하지만 대화가 통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바로 나르시시트적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이다.
책 <나에겐 상처받을 이유가 없다>에서 원은수 전문의는 나르시시스트적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의 특징으로 가스라이팅, 이간질, 중상모략, 착취 등을 언급한다.
이들은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공감 능력이 부족하며 주변 사람을 통제하려는 행동을 반복한다.
특히 중요한 특징은 이것이다. 나르들은 죄책감에는 둔감하지만, 수치심에는 매우 예민하다는 점이다.
원은수 전문의는 이를 두고 “내적으로 견고하게 통합된 정체성을 지니지 못해, 외적으로 보이는 이미지가 자존감을 좌우한다”고 설명한다. 즉, 나르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볼 때 만족하는가'가 아니라,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다.
이런 성향의 사람들은 관계 초기부터 필요 이상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공유하거나, 상대에게도 사적인 이야기를 끌어내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친밀함을 위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신뢰와 연민을 빠르게 확보하기 위한 전략인 경우가 많다.
신뢰가 형성되면, 그때부터 조종과 착취가 시작된다.
당하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인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보상은 없고, 설명은 늘어나며, 관계는 점점 소진된다.
그렇게 나르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관계에서 벗어나려 할 때 문제가 새롭게 시작된다.
나르들은 가스라이팅으로 형성된 착취 관계를 유지하며 조종을 계속하기 위해 상대방의 약점을 꺼내 든다.
본인이 수치심에 취약하기 때문에 상대 역시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 상처가 될 만한 정보들을 미리 모아둔 것이다.
그래서 관계 초반의 과도한 친밀함은 호의가 아니라 오히려 경계하라는 신호가 될 수 있다.
만일 직장에서 이런 상사를 만나게 되면, 일은 본인이 하고, 공은 모두 상사에게 올라가는 구조가 반복되기 쉽다. 사소한 실수는 과장되고, 성과는 축소되거나 가로채진다.
이 경우, 개인의 노력으로 관계를 개선하기는 매우 어렵다.
나르들은 중상모략과 비방을 통해 주변에 자신의 조력자들을 만들어 놓기도 하며,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시정하지 않으려 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부서 이동 또는 이직과 같은 선택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한다.
나르의 심리적 공격을 참고 버티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이런 성향을 미리 파악하지 못하고 시간이 흐른 뒤, "어떻게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몰랐을까?"하고 충격을 받는 사람들도 많다. 그만큼 나르들이 주는 심리적 충격은 크고, 분노는 뒤늦게 찾아온다.
그래서 우리는 배워야 한다.
누군가를 진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 곧곧에서 활동하고 있는 나르들로 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알고 보니 내 상사나 배우자가 나르였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르를 상사로 두거나 배우자로 선택하는 오류를 피해야 하는 건 더 중요하기에 우리는 배워야 한다.
책 <나에겐 상처받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보다 우리 주변에 나르들이 많고, 그로 인해 상처받는 이들을 돕기 위해 쓰인 책이다.
세상에는 사람도 직장도 많다.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소진되고 있다면, 그곳을 떠나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자기 보호다.
당신이 불필요한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