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퇴사를 꿈꾸는 마음가짐 3 ]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의 해결책
어쩌면 기자가 아닌 무엇을 했든 같은 결과를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일하기 싫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일이 싫은 수많은 이유가 있지만, 일을 할 때 그리 행복하지 않다. 일의 진정한 의미를 발굴한 삶을 지지하는 책과 인터뷰도 수없이 보았지만, 정작 나는 일의 순수한 기쁨을 경험하지 못했다. 인간은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아직까지 자본주의의 계략같이 느껴진다. 현재 나에게 일이란 최대한 적게 하고 싶은 행위다. 하지만 해야 하니까 그 와중 나에게 작은 의미나 기쁨을 주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그나마 덜 괴롭거나, 적게 하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행위를 택한다.
나처럼 일에 큰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회를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일을 한다. 만약 일을 적게 하고 싶다면, 쓰는 돈을 줄이면 된다. 일을 하기 싫은데, 많은 돈을 쓰고 싶은 사람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절대 함께할 수 없는 두 욕망을 추구하는 사람은 불행해진다. 일은 하기 싫은데 성공하고 싶다, 노력하기 싫은데 사회적 지위를 얻고 싶다, 생각 없이 살고 싶은데 존경받고 싶다 이런 마음들도 마찬가지다.
회사에 다니면서 고민이 깊어졌고, 하루는 해야 할 일을 못 끝내는 순간이 왔다. 기자는 그날 아침에 오늘 쓸 기사를 발제하고, 해당 기사를 그날 마감한다. 루틴은 매일같이 반복되고, 기자들은 어떤 상황이든 어떻게든 마감을 끝낸다. 나도 수없는 마감을 겪으면서, 쓰레기 같은 글을 썼을지언정 마감을 하는 방법을 배웠다. 길바닥이나 지하철, 기차 안에서도 했고, 아프거나 취한 와중에도 했다. 다년간의 훈련과 강박으로 일종의 마감 근육이 생긴 셈인데, 그날은 달랐다.
너무도 평범해서 다음날이면 잊힐 그날이 또렷하게 기억나는 이유는 유일하게 마감을 하지 못한 날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전까지도 데스크가 다음날 마감을 하라던가, 선배가 일단 다른 일을 하라던가 지시를 해 기사를 엎거나 미룬 적은 있지만, 부장에게 대뜸 전화해 “죄송하지만, 오늘 마감을 못하겠다. 내일까지 해도 되겠냐”라고 물은 적은 처음이었다. 취재가 안 되거나, 발제가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그냥 할 수가 없었다. 기사 작성을 위한 모든 재료는 준비됐고, 마감 시간이 다가오는데 한 문장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전혀 새로운 일을 처음 시작한 사람처럼 대책 없이 막막했다. 그날 뭔가 한참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울한 기분이 계속되자 7번의 상담을 받았다. 상담사가 현재 나의 상태를 물었다. 질문을 하나하나 답하며, 나를 알아갔다. 그전까지도 속으로 하던 일이었지만 혼자 할 때와 다른 사람 앞에서 할 때는 달랐다. 스스로의 욕망을 정확하게 확인하고, 모순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과정이었다. 상담사는 나에게 어떤 삶을 원하냐고 물었고, 나는 두서없이 대답했다. 내 얘기를 쭉 듣고, 상담사가 한 줄로 결론을 내렸다. “자유와 안정을 동시에 바라고 계시네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민망해서 웃었다. 회사를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동시에 월급과 같은 안정적인 수입 구조를 갖고 싶기도 했다. 운이 좋게도 두 가지를 모두 누리는 사람도 세상에 존재하지만, 100%의 자유와 100%의 안정은 애초에 양립할 수가 없었다.
책 ‘일의 철학’에서는 중력 문제라는 개념이 나온다. 중력 문제란 해결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문제를 말한다. 책에서는 중력 문제의 예시로 ‘시인으로서 번듯하게 살기’를 제시한다. 대문호가 될 재능이 없다면 이를 과감하게 인정하고, 대신 ‘어떻게 하면 다른 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시인으로서 예술을 계속 즐길 수 있을까’ 혹은 ‘어떻게 하면 일주일에 열 시간만 일해서 버는 돈으로 생활하며 전업 시인과 다름없이 살 수 있을까’ 정도의 고민으로 치환하는 것이 좋다는 지적이다. 나도 ‘정기적 임금 노동을 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살기’라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일에 집착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제일 중요한 가치관을 선택하고, 거기에 맞게 일을 재구성해야 했다. 과감하게 하나를 선택해야 함을 의미했다.
자유를 선택하고, 안정적으로 넉넉한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을 버렸다. 대신 일을 최소한으로 하고 적게 쓰려고 한다. 사람들은 흔히 돈을 적게 쓰는 삶은 궁상맞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딘가 부족하고, 처량할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2배 이상 많은 돈을 쓸 때보다 삶의 질은 수치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올라갔다. 외식을 줄이는 대신 좋은 식재료로 집밥을 해 먹는다. 내 입맛에 맞으면서도 건강하고 깨끗한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 불필요한 소비를 지양하고 꼭 필요한 옷과 물건만 산다. 원하지 않는 관계를 끊어내고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난다. 여행도 요령껏 가능하다. 그러면서도 기분 좋게 부모님께 맛있는 한 끼를 사드릴 수 있다.
월급이 주는 안정은 포기했지만, 놀랍게도 현재의 내 삶은 전보다 더 안정적이다. 단순히 절약하는 태도 때문이 아니라 유연성을 가지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만약 돈이나 전문성이 필요한 어떤 욕망이 생긴다면 일을 더 하면 된다. 그런 욕망이 없다면 이대로 산다.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할 수 있다는 점이 퇴사 후 가장 좋은 점이다. 회사에 있었다면 욕망과는 관계없이 주어진 일을 해내야 한다. 내 마음대로 적게 일하면 나쁜 평가를 받고, 그 이상의 일을 하더라도 똑같은 돈밖에 받지 못한다. 회사에서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학기에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는 과제를 하는 기분을 느끼곤 했다.
게다가 지금보다 더 일을 하기 싫다면, 소비를 더욱 줄일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다. 아직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으로 줄이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앉은자리에서 생각해 봐도 소비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부지런하게 시장에서만 장을 보고, 생활 용품을 아껴 쓰고, 각종 구독 서비스를 끊고, 약속과 외식을 줄이고, 간식과 커피를 줄이면 일을 덜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은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어느 궁극의 미니멀리스트처럼 필요한 것을 파격적으로 줄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차하면 소비를 더 줄일 수 있다거나, 반대로 더 일할 수 있다고 마음먹는 것만으로 새로운 종류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