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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선 Oct 23. 2024

커리어 망치기

[ 영원한 퇴사를 꿈꾸는 마음가짐 4 ] 포기라는 재능

오늘날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안정이란 단순히 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을 하며 쌓아 온 경험인 커리어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나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역할을 한다. 일관되면서도 성공적인 프로젝트로 채워진 커리어는 그 사람의 전문성을 보여준다고 여겨지며 일종의 자산이 된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커리어를 망치는 길을 걷고 있다. 짧게 요약하자면, 기자로서 여러 출입처를 전전했고, 백수 생활을 할 때는 커피 같은 흥미가 가는 것에 기웃거렸고, 이후 프리랜서로서 다양한 분야의 글을 쓰고 디자인 작업을 하다가, 지금은 1년짜리 해외 봉사를 하며 국제개발협력 분야를 슬쩍 경험하고 있다. 계획 없이 퇴사를 할 때 미래의 내가 어떻게 살게 될지 전혀 몰랐던 것처럼, 내년 봉사가 끝난 뒤에 무엇을 할지 현재로서는 감도 오질 않는다. 나는 이 모호한 상태가 불안하다기보다는 자유롭게 느껴진다.


어떤 직업이나 직무든지 선택할 수 있을 것 같은 사회초년생의 시기가 지나고 나면, 나도 모르는 사이 레이스가 시작됐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노선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곱절의 노력과 논리적인 설명이 필요해진다. 동시에 나이가 들수록 일과 관련한 선택을 할 때, 나도 모르게 '커리어'를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된다. 특히 커리어 세계에서 중요한 일관성이라는 가치는 하나의 직무 안에서도 세부 분야를 나눠 사람을 가두곤 한다. 나 역시 기자 생활을 할 때 모든 분야를 커버할 수 있는 제너럴리스트가 아닌 특정한 전문 분야를 가진 스페셜리스트가 되어야 이 판에서 오래도록 삼아남을 수 있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실제로 선배들을 봤을 때도 성실한 무색무취의 사람보다는 한 분야의 오랜 인맥과 깊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좋은 평가를 받곤 했다. 프리랜서 생활은 물론 급기야 돈 벌기와 무관해 보이는 봉사를 하면서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이런 환경에서 기존 직업 활동을 멈추거나 끝내는 결정을 떠올리면, 막연하면서도 거부하기 힘든 두려움이 떠오른다. 직업 활동 유지는 커리어 쌓기의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라고 볼 수 있는데, 대단한 성과를 낼 수는 없을지언정 최소한 같은 일을 오래 하기라도 해야 뒤처지지 않는다. 실제로 한국 사회는 입사일과 퇴사일을 기준으로 몇 년짜리 경력을 쌓았는지를 중요하게 평가하고, 연 단위 숫자를 기반으로 일의 자격이나 보수를 결정한다. 한창 사회생활을 하는 30~40대 중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거나, 장기간의 휴식을 취하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이유다. 비슷한 시기에 레이스를 시작한 동료들이 멀어져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대로 주저앉는 것은 본능적으로도 쉽지 않은 결정이다. 멈춘다는 것이 곧 뒤처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사회에서 한 번 격차가 나기 시작하면 되돌리기 힘들 수 있다는 현실적 고민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사를 과감하게 선택한 배경에는 커리어가 삶의 중요한 가치에서 후순위를 차지한다는 데 있지만, 그 이전에 커리어는 본래 허상이며, 어떤 선택이 좋은 커리어가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믿음이 있었다. 커리어를 우선순위에 둔 삶은 '운 좋으면 연봉 상승'이라는 이점은 있겠지만, 기존의 사고방식을 답습하게 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특정 분야에 대한 구획이나 가치 있는 일에 대한 기준 같은 것을 그대로 수용할 가능성이 커진다. 오히려 미래의 커리어 패스를 계획하는 과정이 역설적으로 과거의 것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방향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어떤 유능함이나 가치가 일반적으로 정답이라고 여겨지는 활동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무수하게 경험하고 목격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얻게 되는 깨달음보다는 사이드 프로젝트와 같은 딴짓, 하다못해 친구와 잡담을 할 때 오히려 생소한 생각들이 새어 나오곤 했다. 주말이나 휴일과 같은 업무 공백기에 중요한 순간들을 마주하는 것을 되새겨보면,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은 일관성 있는 커리어가 아니라 뒤죽박죽 상태 혹은 빈 공간 그 자체로부터 나오는 경험에 가깝다. 꾸준히 지켜본 결과 권태로운 상태를 거치고 나면 급속도로 생산적인 상태로 변모하는 사이클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권태와 생산 사이의 과도기에서 늘 예측할 수 없는 선택을 하곤 하는데, 그 선택이 나의 인생을 힘 있게 끌어가는 원동력 중에 하나다.


퇴사를 하면서 기존의 나와 전혀 연관 없는 일, 그러니까 커리어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일도 과감하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쥐고 있는 무언가를 손에서 기꺼이 놓아야 한다. 다행인 점은 내가 같은 일을 묵묵하게 반복하는 성실함은 없어도, 포기와 버리기에 특출난 재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재능은 다른 재능과 마찬가지로 반복할수록 능해진다. 오랜 시간 준비한 기자라는 직업과 5년 간의 커리어를 없었던 것처럼 버리고 나니, 몸과 마음이 가벼운 상태를 좀 더 잘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애초에 자의로 버릴 수 있는 것은 애초에 중요한 것이 아니기도 하다. 놓으면 사라질 커리어라는 허상 대신, 그만두거나 없애고자 해도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는, 내 몸과 마음 그 자체인 것들을 주목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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