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퇴사를 꿈꾸는 마음가짐 2 ] 돈도 계획도 없지만
“저라면, 퇴사할 것 같아요. 알바를 해도 먹고살 수는 있잖아요.” 사회생활 초반, 한 사업가의 강의를 듣게 된 적이 있다. 소자본으로 창업을 시작하는 방법에 대한 강의였다. 강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기억에 나지 않지만, 강의 말미에 ‘퇴사해도 될까요’ 같은 나의 바보 같은 질문에 대해 들었던 대답만 기억이 난다. 그때는 퇴사하라는 그의 말에 공감이 가질 않았다. 이미 기반이 있으니까 저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거겠지, 남 일이니 쉽게 말할 수 있는 거겠지, 그런 마음도 들었다. 돌아보니 알겠다. 퇴사 자체는 별 일이 아니다. ‘아르바이트해도 먹고살 수 있다’는 말은, 진짜 그럴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퇴사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퇴사가 어려운 이유는 뭘까. 가장 보편적인 이유는 돈일 것이다. 죽지 않고 먹고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그래서 퇴사를 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경제적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이 많다. 돈 벌 궁리 없이 퇴사를 하게 되면, 십중팔구 다시 원 위치로 되돌아오거나 더 큰 문제를 겪게 될 수 있으니까. 돈이 돈을 버는, 혹은 노동력 투입 없이 돈을 버는 시스템을 구축해 ‘파이어 족’같이 이른 은퇴를 하는 사람들이 대표적인 예시다. 그들의 희망 대로 매월 충분한 생활비가 예외 없이 나오는 경제적 자유를 이뤘다면 퇴사는 애초에 큰 고민거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퇴사 후 딱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일생을 바쳐서라도 이루고 싶은 꿈이 있어 퇴사를 하겠다는 사람은 얼마간 방황할 순 있겠지만 이상적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글을 쓰겠다, 영화를 만들겠다 같은 예술적인 꿈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적어도 로스쿨을 가겠다, 노무사 준비를 하겠다는 현실적인 꿈도 박수를 받는다. 명확한 꿈과 목표는 사실상 별다른 계획 없는 퇴사에도 자신과 타인에게 면죄부가 되어 준다. 대부분 사람들은 퇴사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확실한 방향이 없고, 그렇기에 일단 무언가가 그려지기 전까지 현상 유지를 한다. 대부분은 그대로 살다가, 은퇴하기 전까지 큰 변화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사실 회사 밖에서 회사 내부에 있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면, 어쩌면 퇴사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회사 때려치워야지’라는 욕망 자체가 순도 100%가 아닐 수 있다는 얘기다. 어딘가 답답한 마음에, 상사에게 들은 기분 나쁜 말에, 순탄치 않은 동료와의 관계에, 어딘가 불편한 대화 자리에, 그도 아니라면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서, 사무실의 의자가 불편해서, 그냥 누워 있고 싶어서 같은 수많은 요소가 원인이 될 수 있지만, 그 이유가 100%의 마음이 아니란 거다. 그들에게 ‘퇴사해야지’라는 말은 ‘운동해야지’ 같이 의미 없이 스쳐가는 말에 가깝다. 특히 신입 사원의 고비를 넘고 나면, 그런대로 회사와 함께 하는 삶이 여러 현실을 고려했을 때 얼추 자신과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렵게 퇴사를 하더라도 다시 비슷한 공간으로 돌아오게 될 정해진 미래를 일찌감치 받아들인 상태일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퇴사가 어려운 것의 본질은, 선을 넘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선은 모두 다른 모양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퇴사를 한다고 큰일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당장 돈을 벌지 못하게 된다고 하자. 알바를 하고, 그에 맞게 소비 수준을 줄이면 된다. 하고 싶은 일도 모르겠고, 잘하는 일도 없고, 그만두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퇴사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무작정 그만두고 찾아봐도 괜찮다. 사실 살면서 꼭 하고 싶은 일이 없어도 된다.
나에게 퇴사로서 선 넘기란 대학 진학과 회사 입사로 시작돼 은퇴까지 이어질 평탄한 길에서의 이탈 같은 것이었다. 천천히 가기 위한 차선 변경이 아닌 도로 밖으로 완전히 탈출하는 그런 기분. 더 이상의 출근이 없다는 선언은, 다시는 회사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이었고, 이대로 살면 그런대로 보장될 수 있는 안정적인 삶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반골 기질이 있으면서도, 그 기질을 표출할 용기는 미미한 상태로, 오히려 재빠른 눈치로 사회생활을 곧잘 해내는 나에게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타인에게 들리지 않도록 차 안에서 욕을 하는 정도의 소소한 반항에 익숙한 사람이 어떻게 핸들을 과감하게 꺾겠는가. 하지만 선을 넘기에 안전하고 적절한 때는 영영 오지 않는다.
향후 이직을 염두에 둔 퇴사가 아니었다. 무작정 쉬기 위해 퇴사한다고 하니, “더 좋은 곳 가겠지.”, “(좋은 곳) 가서 좀 도와주고.”, “지금 말고 좋은 곳 가면 (밥) 사.” 같은 얘기를 많이 들었다. 좋은 곳이란 돈 많이 주거나 편하거나 영향력 있는 회사, 이직을 전제로 한 말들. 나의 속 마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사람들이 애정 있게 할 수 있는 좋은 말이란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불현듯 떠나서 다른 회사에 버젓이 앉아 있는 선후배들이 꽤 많았다. 모두에게 솔직하게 얘기 하진 못했지만, 회사를 나오면서 속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친구에게 분명히 말했다. “나 다시 회사로 출근하게 되면, 그게 진짜 실패일 것 같아.” 어떻게든 입 밖으로 꺼낸 그 말은 어떤 회사로도 돌아가지 않겠다는 나 자신에게 하는 당부이기도 했다.
당시의 나는 경제적 자유도 없고, 미래 계획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입도 없었고, 해야 하는 일도 없었다. 다만 회사를 나오면서 하나의 질문을 가지고 나왔다. 마음 가는 대로 살고 싶었고, 그렇게 살면 어떨지 궁금했다. 거짓 없는 결과를 알고 싶다면, 그것을 탐구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마음 가는 대로 살아보기, 그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 대안 없는 그 삶은 2년이 넘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객관적으로 치열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관성과 관습에 타협하지 않는 부단한 마음의 물장구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