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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선 Oct 24. 2024

그 무엇도 궁금하지 않은 사람의 치앙마이 한달살기

[ 일하지 않는 나로 살아보기 1 ] 가성비 좋은 인간

퇴사 직후의 나는 모든 체력과 열정이 소진돼 그 무엇도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모든 관계와 책무를 얼마간 저버리고 싶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장소, 태국 치앙마이를 골라 여행을 떠났다. 재화가 한정된 상태에서 값비싼 여행지라는 옵션은 응당 그에 따라오는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준다. 머나먼 유럽을 간다면 부지런히 유명 관광지를 모두 봐야 할 것 같고, 에메랄드빛의 휴양지에서는 ‘이곳에서만 할 수 있는’ 액티비티를 누려야 할 것 같다. 그런 식의 기대를 충족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길 때, 그것을 단호히 거부하기 힘들 때가 있다. 하지만 치앙마이는 맛있는 커피와 식사, 산책만으로 ‘잘 즐겼다’는 만족감이 충족되는 곳이다. 그저 충실히 하루를 살아가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여행지, 어쩌면 내가 원하는 인생과 닮아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치앙마이 한달살기를 떠났다.


그 무엇도 궁금하지 않은 사람의 일상은 6가지 행위로 요약됐다. 먹고 마시고 읽고 쓰고 걷고 뛰었다. 치앙마이에서의 하루는 여행지에서의 일과치고는 퍽 단조로웠다. 알람 없이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그날그날 먹고 싶은 메뉴를 선택해 식사를 해결했다. 길다가 발견한 카페를 가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고 생각을 썼다. 최대한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걸어 다녔다. 치앙마이에서 걸어 다니는 사람은 외국인과 거지밖에 없다는데, 막상 무더운 날씨에는 거리에서 그 둘 조차 볼 수 없었다. 정해진 목적지로 최대한 빠르고 편하게 이동하는 것은 본래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여행지에서의 우연한 발견을 기다리며 두 발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리하여 오래된 도서관이나 사원, 공원 같은 것들을 마주했고, 그것들의 사소한 부분을 찍거나 가만히 관찰했다. 그저 나에게 즐거운 것을 했다.


한달살기의 진정한 매력은 체크리스트로부터의 해방에 있다. 한 달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은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이나 ‘꼭 가봐야 하는 장소’ 같은 것에서 벗어날 자유를 선사했다. 끝끝내 한 달이 다 되어서도 ‘치앙마이에서 반드시 해야 할 목록’을 뒤적이지 않을 걸 보면, 나에겐 그렇게 살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던 건가 싶기도 하다. 충분한 시간은 그 자체로 명분이 되었고, 불안 대신 자유를 선사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나의 욕망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했다. 무엇도 궁금하지 않은 나에게도 좀 더 알고 싶은 것이 있었고, 하고 싶은 일이 없다 해도 원하는 삶의 방향은 분명하게 있었다. 돌아가서 어떤 일을 할지가 아니라, 어떤 하루를 살지 고민했다.


한 친구는 치앙마이에서 무엇이 가장 좋았냐고 물었다. 나는 ‘앙깨우 호수’라고 답했다. 치앙마이 대학 안에 있는 큰 호수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생들은 물론 지역 주민으로 붐비는 곳인데, 이곳을 자주 찾게 된 이유도 시간이 넉넉한 덕분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저녁, 귀에 이어폰을 꽂고 호수를 주변으로 크게 한 바퀴 걷거나 뛰다 보면 한국에 남겨온 것과 헤쳐나가야 할 삶 따위는 저 멀리 사라진다. 잔잔한 해수면에 비친 나무 그림자, 산등성이와 어둑해지는 하늘, 호수변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언제든지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피어올랐다. 호수는 한국에도 있잖아, 친구가 반문했다. 물론 호수는 한국에도 있다. 하지만 어디에나 있는 흔한 장소를 몇 번이고 회귀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으로 바꾸는 방법을 가르쳐 준 호수는 한 곳뿐이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숱하게 답한 장래희망은 희망이라는 아름다운 단어에 가려져 있지만, 결국 돈 벌기로 요약된다. 자기도 모르게 어떻게 돈을 벌지 정하는 게 아이에게 가장 중요한 꿈이 된다. 하지만 이제는 어떤 방식으로 돈을 버는 것보다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은 어른이 되었다. 물론 어른은 장래희망 따위와 상관없이 돈을 벌어야 하는 가혹한 운명이지만, 그전에 삶을 지키고자 생각했다. 치앙마이에서 마음 편했던 시간이 조용한 공간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 읽을 때나 안전하고 푸르른 공간을 산책할 때인 것을 생각하면, 운이 좋게도 나는 순수한 즐거움을 느끼는데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치 않은 가성비 좋은 인간이었다. 치앙마이에서 행복을 준 요소들은 그것들을 마음 편히 즐길 여유가 없었던 것뿐이지, 사실 나의 거주지 근처에도 널려 있었다. 어디서 살든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골몰하면 만들 수 있는 나만의 낙원, 그 낙원을 어디서든 누리자고 마음먹었다.


체크리스트가 사라진 한달살기 여행에서는 비가 와도 즐거웠다. 2박 3일 짧은 여행에서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면,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아쉬운 마음부터 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치앙마이에서 흐린 날은 그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궂은 날을 핑계로 침대에서 좀 더 뒹굴거리다가, 비를 맞으며 산책하고 따뜻한 음식으로 속을 데웠다. 쨍한 날씨에서 1시간을 걷고 마신 차가운 생맥주만큼이나 지붕이 있는 야외 자리에서 경쾌한 빗소리를 들으며 따뜻한 커피를 마실 때도 기쁨이 충만했다. 먹구름이 가득한 날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는 여유는 어쩌면 시간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그런 여유는 돈이나 긍정적인 마인드에서 나올 수도 있지만, 나에겐 넉넉하게 자유로운 시간이 출발점이었다. 꼭 오늘이 아니더라도 내일, 모레 즐기면 된다는 생각이 허용되는 곳, 나에게 치앙마이 한달살기는 앞으로 추구하는 삶의 축소판이었으며, 넉넉하게 자유로운 시간 앞에서 즐기는 참된 행복의 맛을 알려주었다.


치앙마이 한달살기가 끝나가면서 앞으로 펼쳐질 한국에서의 삶이 조금씩 궁금해졌다. 직장인이었던 과거의 나는 연차를 사용해 일에서 해방되는 찰나의 시간에도 불행했다. 당장 쉴 수 있다는 즐거움보다 휴가가 끝나고 업무에 다시 복귀해야 한다는 괴로움이 더 컸다. 아무리 좋은 것을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고, 출근날이 다가올수록 괴로웠다. 불행한 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나의 삶에서는 제법 잘 어울린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뭔가 분명히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 특별할 것 없는 치앙마이 여행은 달랐다. 여행이 끝나는데 새로운 기대가 피어올랐다. 치앙마이에서 반복한 하루를 서울에서도 계속해서 누리고 싶다는 마음,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마음 자체가 그리도 소중한지 그때 알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가능성 자체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도. 시간이 넉넉해 부유한 그 상태를 언제까지 누릴 수 있을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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