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하지 않는 나로 살아보기 2 ] 타협 없는 하루
다음은 회사를 다닐 때 내가 포기한 목록이다. 알람 시계로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아침, 충분한 수면을 취하고 일어나 차분하게 씻고 음악을 들으며 물 한 잔 마시기, 하루 중 어느 때나 가능한 충동적 산책이나 아무것도 들지 않고 떠나는 예정에 없던 긴 산책, 좋아하는 사람만 만나고, 솔직하고 에너지를 가득한 대화를 주고받는 것, 불필요한 방해 없이 마음껏 책 읽고 글 쓰기, 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건강한 식사를 매 끼니 차려 먹기,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거나 운동하거나 취미 생활 하기, 가족과 오랜 시간 함께 지내기, 그 무엇보다 잔잔하고 편안한 마음.
5년간 나는 시끄러운 알람 소리를 들으며 꾸역꾸역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야 했고, 일어나자마자 업무를 위한 메신저를 확인하고, 일과 시간에는 꼼짝없이 묶여 있었어야만 했으며, 일과 시간 외에도 실시간으로 연락을 주고받고, 매일 원치 않은 사람들을 만나야 했고, 그들과 기억에 남지 않을 대화를 하고, 진심에 없는 감정 표현을 건네고, 건강하지 못한 음식을 입에 넣어야 했다. 얼마 없는 휴가도 아까워 부모님과는 가끔 안부를 나누고, 취미 생활마저 퇴근 시간이라는 소중한 자유 시간을 뺏는 개념이 되어 어느 순간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그리하여 내면의 평안을 잃고 스트레스에 시달리곤 했다.
이렇게 요악하면 끔찍하지만, 슬프게도 종종 그랬단 것이다. 이 모든 포기 사항들은 동시 다발적으로, 무차별적으로, 시도 때도 없이, 그렇게 발발했다. 그렇다고 매 순간의 포기가 같은 무게로 다가오진 않았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인 점일까. 누구나 그렇듯 사회생활에 적응하면서 포기에 무뎌지기 마련이고, 나는 내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도 분명히 깨닫지 못했다. 어쩌면 시간이 더 길어졌다면, 내가 회사 생활을 함으로써 어떤 것을 포기했는지 영영 잊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은 어쩔 수 없는 거라며 그 안에서 아등바등 즐거움을 발견하고 기뻐하다, 불현듯 다가오는 우울감에 며칠간 잠식 됐다가 다시 기운을 차렸을 것이다.
퇴사 후 얼마간은 내가 과거에 무엇을 포기했었는지 발견하는 나날들이었다. 이렇게도 살 수 있었지 하고 잊고 있거나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달았다. 예를 들면 퇴사 후 도통 아침에 지하철을 탈 일이 없는데, 여행을 가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서야 하는 날이 있었다. 출근 시간을 조금 피했는데도 양 옆과 앞 뒤에 사람이 가깝게 붙어 있어 숨이 막혔다. 솔직히 말하면 출근 시간 특유의 침체된 분위기와 우울감이 묻어나는 표정에 진력났다. 잠시 이동만 했을 뿐인데 진이 빠지고 여행에 대한 설렘과 기대감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누군들 좋겠냐만은 나는 사람 많은 지하철에 타는 걸 유독 싫어하는데, 그렇게 싫어하는 행위를 그토록 자주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매번 집에서 식사를 하다 보면 흔히 배달을 많이 시켜 먹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횟수로 따지면 두 달에 한 번, 일 년으로 치면 5번 정도다. 집에서는 해 먹지 못하거나 손이 많이 가거나 뒤처리가 어려운 음식이 가끔 당길 때가 있다. 배달을 시키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맛이 없어서다. 배달 음식은 음식으로 경쟁해 고객을 유치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 기억에 남을 만큼 자극적이다. 집에서 내 입 맛에 맞는 음식을 매일 만들어 먹다 보니, 밖에서 파는 음식은 입 맛에 맞지 않게 됐다. 첫 입은 괜찮은데, 먹다 보면 점점 기분이 나쁘고, 먹고 나서는 후회하는 지경에 이른다. 요식업계의 무한 경쟁이 이뤄지는 서울 금싸라기 땅에서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매일 먹었을 때는 몰랐다. 사실은 내 입 맛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고 있었던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그것은 일종의 포기였는데, 나는 그게 일종의 특권인 줄 알았다.
포기했던 평일도 차츰 돌아왔다. 회사 생활을 하면 일주일 중 평일인 5일은 으레 내 것이 아니었다. 산술적으로 8시간 근무 후 16시간의 시간은 내 것이었는데도, 8시간을 성실하게 살고 나면 나머지 16시간은 미리 소진된 상태였다. 일이 끝난 후 저녁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마음 편한 산책이나 차분한 영화 감상은 가끔씩만 가능했다. 일요일이 되면 다음날의 출근을 생각하며 한껏 우울해졌는데, 주말도 온전히 쉬지 못했다는 생각에 불만이 쌓이곤 했다. 평일을 잃은 것도 모자라, 종종 주말마저 업무와 휴식의 경계 그 언저리에서 살곤 했다. 기자에게 가장 중대한 고민은 다음날 뭐 쓸지에 대한 것인데, 그 고민이 명쾌하게 해결된 날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잘못된 곳으로 쓰였던 에너지를 회수하고, 나도 모르게 포기한 것들에 차분히 재분배한다. 처음에는 쉽지 않다. 보통 그것들은 생산성이라는 기준에선 기꺼이 포기해도 괜찮다거나 포기해야만 하는 것으로 평가받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장기가 끝난 인간의 하루 9시간 이상의 숙면 같은 것, 퇴사 후 미라클 모닝을 하며 새로운 프로젝트를 구상하거나 목표를 찾아 나서기보다는 나는 충분히 잤다. 나에게 있어 잠은 포기할 대상이 아니며, 오히려 사회 구성원에게 주어진 기대 같은 것을 저버리면서라도 지키고 싶은 대상에 가깝다. 자는 행위 자체로 기쁨을 느끼기도 하거니와 충분히 잠으로써 남은 하루를 더 충실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질과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동시에 지니는 몇 안 되는 소중한 행위이기도 하다.
포기한 것들을 다시 가까스로 구원해내고 나면, 한 번쯤은 괜찮잖아라는 마음이 사라진다. 그 한 번이 결국 걷잡을 수 없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걸 알아서다. 그렇기에 타협하지 않는다. 내가 소중하게 만들어 낸 하루의 가치를 생각하고, 주도권을 가진다. 물론 회사 다닐 때보다 더 게을러져서 늦게 일어나고, 정크 푸드를 먹고, 살이 찌고, 콘텐츠만 소비하는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다. 나도 어떤 하루들은 그렇게 살았다.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든 가치 있다면 영영 그렇게 사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포기라면 금세 돌아와서 하루를 다시 구원한다. 일종의 선택인지 포기인지 명징하게 구분하고, 나도 모르게 포기한 것들을 고이고이 건져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