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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선 Oct 25. 2024

열흘 동안 모든 소통을 차단하고 배운 사실

[ 일하지 않는 나로 살아보기 3 ] 위빳사나 명상 수련기

‘걱정 말라’는 마지막 메시지를 끝으로 운영진에게 휴대폰을 제출했다. 제출기간은 약 10일. 어떤 일이 있어도 휴대폰은 확인할 수 없고, 그동안 외부와의 연락은 완전히 차단된다. 불필요한 걱정에 시달리지 않도록 부모님과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휴대폰을 정해진 자리에 넣었다. 그리고 방 열쇠를 받아 잠시나마 나의 거처가 될 공간에 들어와서 숨을 골랐다. 나는 위빳사나 명상 코스에 참여하러 왔다. 위빳사나 명상은 인도의 가장 오래된 명상법 중 하나로, 몸 전체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관찰하는 정신적 훈련이다. 수없이 되뇌어도 도통 입에 붙지 않는 위빳사나라는 단어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명상은 오랫동안 진지하게 해보고 싶은 행위였다. 그냥 눈 감고 하면 되지 않나 싶은데, 명상 비스무리한 것을 몇 분이라도 이라도 시도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머릿속에는 ‘이렇게 하는 게 명상 맞나’는 의문이 둥둥 떠다닌다. 게다가 퇴사할 때까지 기다린 현실적 이유가 있었다. 몇 년 전, 유발 하라리의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위빳사나 명상을 처음 알게 됐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현시대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21가지의 제언을 하는데, 그중 마지막 제언은 명상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이 열흘 동안 내 감각을 관찰하면서 나 자신과 인간 일반에 대해 알게 된 것이 그때까지 살면서 배운 것보다 더 많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어떤 이야기, 이론, 신화를 받아들일 필요도 없었다. 실체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기만 하면 됐다. 내가 깨달은 가장 중요한 것은, 내 고통의 가장 깊은 원천은 나 자신의 정신 패턴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문장을 읽고 나도 당장 대단한 것을 체험해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휩싸였다.


위빳사나 명상을 시도해 보기 위해 또 다른 책인 윌리엄 하트의 ‘고엔카의 위빳사나 명상’을 읽게 됐다. 막상 책을 읽다 보니 이 명상법은 집에서 혼자 시도하는 게 아니라 센터 모여 진지하게 수련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북 진안에 담마코리아에서 배울 수 있었고, 처음 수련을 하는 신수련생은 반드시 10일 코스에 참여해야 한다. 10일 코스여도 총 12일의 시간이 필요한데, 당시 직장인으로서 일 년에 15일 정도 주어진 연차 대부분을 명상에 쏟는다는 것은 스스로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결국 퇴사 후에야 그렇게 궁금했던 명상을 시작했다. 대체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막상 센터에서 배운 명상은 아주 단순한 행위였다. 처음 3일은 호흡을 관찰했다. 너무 당연해서 평소에는 격한 운동을 하지 않는 이상 인지할리 없는 호흡. 인위적으로 숨을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고 조심스러운 그 호흡의 드나듦을 관찰해야 했다. 누구나 하고 있다는 숨쉬기 운동만 하면 되는데, 새벽 4시 30분부터 9시까지 식사 및 휴식시간을 제외하고 내리 호흡만 관찰하는 일은 상상 이상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언젠가 봤던 풍경, 그 사람과 나눴던 대화, 함께 먹었던 음식, 부끄러웠던 행동, 잊고 있던 학창 시절의 한 장면까지 많은 기억과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어느새 호흡을 놓치고, 놓쳤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다시 정신을 다 잡아보지만, 생각 속에서 부유하다 종이 쳐서 명상 시간이 끝나는 그런 시간이 끝없이 반복됐다.


무엇보다 꼼짝없이 앉아만 있다 보니 몸 이곳저곳에서 평소와 다른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도 편했던 아빠다리 자세가 이렇게 불편한 자세인지 처음 알게 됐다. 강한 통증이 나의 집중력을 테스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본격적으로 몸의 감각을 관찰하는 위빳사나 명상을 시작하고, 절대 움직이지 않는 단계의 아딧따나까지 시도하게 된 후 아무리 편한 자세든 바꿀 수 없다면 벌을 서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명상 후반부로 갈수록 점차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에 반응하지 않는 방법을 배울 수 있게 됐고, 놀랍게도 몸의 통증이 사라졌다. 짧은 기간에 몸이 적응을 한 것인지, 명상의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는 그 상세한 작동 원리까지 알 수 없지만 마지막 날에는 곧 나갈 수 있다는 생각 덕분인지는 몰라도 마음 편하게 명상을 할 수 있었다.


수련생들은 위빳사나 명상을 통해 아닛짜, 즉 모든 것은 통증이나 감각처럼 결코 영원하지 않고 변한다는 진리를 배운다. 사실 우리는 외부 대상 자체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우리 몸의 감각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고통의 원인은 외부가 아니라 100% 내부에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누군가 내게 선물을 줬는데 내가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 선물을 다시 그 사람에게 돌아간다. 아니면 버려진다. 마찬가지다. 누군가 내게 화를 냈는데, 내가 그것을 받지 않으면 다시 그건 돌아간다. 처음 들었을 때는 말장난 같을 수 있지만, 곱씹을수록 그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게 됐다.


이때 배운 태도는 퇴사 후 삶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어느 날 비눗물이 뭍은 고무장갑을 끼고 컵을 옮기다가 그만 놓쳐버려, 찻잔 손잡이가 세 동강이 났다. 퇴사 후 떠난 치앙마이 한 달 살기를 마치고 사온 유일한 기념품인 찻잔이. 손으로 만든 자연스러운 무늬, 마음이 편안해지는 따듯한 색감, 손에 쥐었을 때 안정감이 드는 무게와 질감, 찻잔과 어울리는 소서, 무엇보다 부엌에 있던 다른 흔한 컵과는 의미부터가 다른 물건이었다. 하지만 컵이 깨진 후 처음 드는 생각은, ‘다행이다’였다. 몸체가 아닌 손잡이만 깨졌으니까 계속 쓸 수 있지 않을까? 손잡이가 없는 찻잔도 많으니까. 여전히 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이렇게 소중한 것이 깨졌는데,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고 마음이 잔잔했다. 나 자신도 신기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설거지를 이어갔다. 예전 같았으면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물건이 망가졌다는 사실에 하루종일 괴롭고 짜증 났을 텐데 말이다.


사실 본래 나는 화가 많은 사람에 가까웠다. 특히 회사를 다니게 된 이후로 친구들에게 “너 화가 더 많아졌어”라고 직접적인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직업적 특성도 있겠지만, 내 마음을 돌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외부 상황에 여지없이 공격받고 마는 취약한 마음. 작은 바람에도 움직이는 가벼운 바람개비 마냥 나는 이리저리 휘둘렸다.


10일간의 명상 수련으로 완전히 새 사람이 되지 못했지만, 스트레스 상황을 마주했을 때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과거에는 반응 자체에 대해 선택권이 있는지 몰랐다. 있더라도 본래 나처럼 불만과 화가 많은 사람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안다. 회사를 떠난 지금 내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갈지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감정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손잡이가 세 동강이 나든, 컵이 와장창 깨져서 다시는 쓸 수 없게 되든, 혹은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파괴돼 원망할 수 있는 상대가 생기든, 하루에도 몇 번씩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지만, 이제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오로지 내 선택임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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