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선 Oct 26. 2024

돈 없이 잘 노는 법

[ 일하지 않는 나로 살아보기 5 ] 퇴사자의 소비 생활

소비를 빼놓고 퇴사자의 생활을 얘기할 수는 없다. 나에게 돈과 노동은 즉시 연결되고, 무분별하게 돈을 쓴다면 마음 가는 대로 살겠다는 다짐과 상관없이 그에 맞는 노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소비 생활은 해당 소비가 주는 혜택과 일하지 않을 자유를 저울질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소비가 우리 삶의 동기가 된 세상에서, 오히려 나에게 소비는 내 삶의 동기를 저해할 잠재적 위험 요소에 가깝다. 본질을 훼손할 만큼 집착하지 않되 착실하게 관리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퇴사 후 약 반년 넘게 사실상 소득이 거의 없었지만, 수입에 비례해 소비를 크게 줄이지는 않았다. 회사를 다니면서 얼마간 모아둔 돈이 있기도 했고, 몇 년 간 미니멀라이프를 추구해 왔고, 필요한 것 위주로 신중하게 물건을 사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 퇴사 시점에 맞춰 구매 욕구를 크게 억제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퇴사 후에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소비가 줄어든 항목이 몇 있다. 가장 대표적 항목은 외식비다. 수치로 따지자면, 퇴사 후 외식의 금액은 기존 외식비의 50% 정도 줄었다. 회사를 다닐 때는 밖에 있는 시간이 많고 피곤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외부 음식을 먹곤 했다. 게다가 연차가 쌓여 선배가 되다 보니 후배에게 밥을 사주거나, 밥을 먹고 나서 먹는 커피나 간식 값 등도 쌓이면 꽤 큰 금액이 됐다. 친구들 대부분이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씀씀이가 커졌고, 1끼당 단가도 크게 올라갔다. 카드값이 많이 나오는 날이면 대부분 입으로 들어간 게 컸다. 


하지만 퇴사 후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밖에서 사 먹는 대신 자연스럽게 집밥을 해서 먹을 때가 많았고, 집밥의 만족도는 외식과는 비교할 수 없이 높았다. 잠깐 나의 요리 지론을 설명하자면, 좋아하는 식재료로 만든 요리는 무조건 맛있다는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요리라는 것이 결국 식재료의 조합인데, 선호하는 식재료를 사용하면 적어도 나에게는 만족스러운 요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밖에서 사 먹는 음식의 원재료 비용은 대부분 30% 미만이고, 이외에는 인건비나 임대료가 포함되어 있다. 결국 최상급 품질의 식재료를 사더라도 집밥이 외식비보다는 저렴하다는 결과가 나온다. 오히려 외식비를 펑펑 쓸 때보다 풍족하게 제철 음식을 먹으면서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외식에 포함되는 술 값도 크게 줄었다. 술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었다. 성인이 되자마자 대학교에서 만난 친구들과 학교 앞은 물론 당시에는 덜 알려졌던 을지로와 종로 구석구석의 노포까지 찾아다니면서 마셨다. 언론사 채용을 준비하는 학내 언론고시반에 있을 때도 매주 글을 쓴 뒤에 늦게까지 술을 마셨고, 기자가 되고 나서도 취재원 약속뿐만 아니라 일부러 자리를 만들어 마셨다. 이제와 남몰래 고백하자면, 사실 회식도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다. 술자리를 좋아한다기보다 술을 마시는 행위 자체가 즐거움을 줬다. 아무도 권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마시고, 1잔 먹을 바에는 취할 때까지 끝장을 보는 타입으로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때의 나는 알콜 중독의 위험한 경계에 있었다. 


퇴사 후에 이렇게 술을 마시지 않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왜냐면 이전까지 술을 마시는 것이 일종의 취미 생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퇴사 후에도 제철 식재료로 구성된 맛있는 안주와 술의 조합은 내 삶에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퇴사 후 술을 예전만큼 마시지 않게 됐다. 몇 달이 지나고 깨달았다. 나는 순수한 즐거움이 아닌 스트레스 때문에 술을 마신 거였구나. 그게 사람들이 말하는 ‘시발비용’(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면 쓰지 않았을 돈)이었구나. 마감 후 밀려오는 고단함과 허탈감, 그렇다고 생산적인 것을 하고 싶지도 않은 피로함, 내일에 대한 압박감, 약간의 우울감 같은 것을 간편하고 일시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술이었단 걸, 남들 다 아는 얘기를 나 혼자 뒤늦게 깨달았다.


차려입고, 아니 그래도 멀쩡하게 다녀야 하는 날이 줄어 드니 옷도 예전에 비해 적게 구매한다. 특히 재킷, 셔츠, 슬랙스 같은 업무상 만난 상대방의 눈에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무시당하지 않을 만한 그럴듯한 옷에 숨고 싶어 구비했던 옷들은 일절 사지 않는다. 기자 생활을 할 때는 아무리 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출입처에서는 내가 회사의 얼굴이기 때문에 예의상 깔끔하게 입고 다니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제 집 앞 마트나 카페를 갈 때, 친구와 약속이 있어 번화가로 놀러 나갈 때, 멀리 여행을 갈 때의 차림새의 변화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대부분 입었을 때 몸과 마음이 편한 운동복이나 거슬리는 부분이 없는 편한 옷들 위주다. 누군가는 차려입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하지만, 나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으며 땀을 흘리거나 더러워져도 손쉽게 세탁할 수 있는 옷을 입었을 때 최대치의 평안을 누릴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선크림에 눈썹을 그리는 것 외에 별다른 화장을 하지 않은 지도 꽤 오래되었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 만남을 위한 의류비를 비롯해 색조 화장품이나 미용실 방문 등 치장을 위한 비용은 거의 들지 않는다.


하지만 퇴사 후에 늘어날 수밖에 없는 항목이 있는데 바로 경험에 관한 항목이다. 퇴사 후에 하루종일 방에 누워만 있고 싶은 사람은 없다. 퇴사를 하게 된 이유와 그것을 위해 포기한 것을 생각하다 보면, 무엇이든 열렬하게 경험해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경험은 곧 돈이다. 특히 가장 가치 있게 생각되는 경험 중 하나는 여행이고, 그중 해외여행에 사용되는 비용은 어떤 여행지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천정부지로 높아질 수 있다. 사람들은 퇴사자에게 ‘시간도 많은데 여행 갈 수 있어 부럽다’ 혹은 ‘이번 기회에 여행 가면 되겠네’ 같은 손쉽게 얘기를 한다. 향후 정기적인 임금 노동에 종사하고 싶지 않은 나 같은 퇴사자라면, 다음 달 들어올 월급이 없으니 신중하게 해외여행을 선택해야 한다. 물론 내가 치앙마이 한달살기 전체 비용으로 150만 원 정도를 쓴 것을 생각하면, 현 거주지 생활비와 비슷하거나 낮은 여행지를 고르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해외여행의 즐거움과 일하지 않을 자유를 비교하면, 나에겐 언제나 후자가 더 매력적이다. 직장인들이 겪는 여행의 즐거움과 백수가 겪는 여행의 즐거움은 그 무게부터 다르다. 나는 매일 펼쳐지는 즐거운 일상을 벗어나서 여행을 시작하면 오히려 더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다.


큰 돈을 쓰지 않고 할 수 있는 즐거운 경험이 있다면, 일하지 않을 자유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하는 편이다. 원하는 관심사를 기반으로 정부 지원이 있는 프로젝트나 강의, 모임을 찾아보면 무료로 다양한 경험이 가능하다. 줄곧 도시에서 살아온 나는 시골 살이에 막연한 관심이 있어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주관하는 ‘시골언니 프로젝트’에 2년 연속 참여한 적이 있다. 일주일 정도 선택한 지역에 거주하면서 지역 거주자인 ‘시골 언니’와 함께 지낼 수 있는 프로그램인데, 퍼머컬처(지속가능한 농업) 같은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으면서도 숙박비와 식비 지원이 포함되는데도 참여비가 5만 원도 안 됐다. 이외에도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에서 그림책 작가와 함께하는 그림책 만들기 수업에 참여했고, 서울인쇄센터에서 책 읽고 책 만들기 수업을 듣고,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과 가제본까지 경험했다. 모두 해당 센터 예산으로 집행되는 전액 무료 수업이었는데, 비싼 돈을 주고 민간 업체에서 듣는 수업보다 오히려 체계적이고, 만난 사람들의 분위기나 강의 퀄리티가 훌륭했다. 플라워 박스 만들기, 폼룰러 스트레칭 방법 배우기 등 지역 청년들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원데이 클래스도 참여했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평일에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직장인이라면 참여하기 어렵지만, 시간이 많은 사람은 비교적 수월하게 참여할 수 있다. 경험을 하는 데 있어 시간은 돈과 비슷한 가치를 갖는다. 자유로운 시간으로 저렴한 옵션을 택해 돈을 아끼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예를 들어 수요일 오전처럼 수요가 적어 저렴한 시간대의 비행기를 타거나, 금요일 밤 대신 남들 출근하는 월요일 아침에 영화를 보는 식이다. 상상력을 발휘하면 돈이 들지 않지만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경험도 무한히 발굴할 수 있다. 채광이 좋은 도서관 찾아 책 읽기, 남들이 모르는 조용한 산책 코스 탐색하기, 도심 속 출사, 도시락 싸서 공원에 누워 있기, 정기적으로 미술관과 박물관 관람하기,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