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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선 Oct 25. 2024

덥고 더럽고 불쾌할지라도

[ 일하지 않는 나로 살아보기 4 ] 문제를 감내할 준비

아, 이게 내가 좋아하는 여행이었지. 일주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동생이 먼저 한국으로 돌아간 후, 말 한마디 없는 곳에서 노트북으로 글을 쓰다 깨달았다. 동생과 함께하는 여행에서 느낀 행복은 오롯이 내 취향이 아니었다는 것을. 동생과 방콕의 관광객이 붐비는 맛집에서 맛있는 음식들을 잔뜩 먹고, 해가 저물어가는 황홀한 광경을 감상하고, 5성급 호텔에서 미소 섞인 서비스를 받으며 햇살 아래서 수영을 하고 푸짐한 조식을 먹었는데 말이다. 분명 그런 행위들도 나에게 즐거움을 줬지만, 오랫동안 애착을 가진 옷을 잠시 넣어두고 새 옷을 입은 것처럼 편안하고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그런 행복은 갑자기 끝나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같이 온다.


동생이 떠난 후 나는 택시는커녕 지하철도 한 번 타지 않았다. 대신 귀에 이어폰을 꽂고 하염없이 걸었다. 그러다 우연히 들어간 로컬 식당에서 현지인 틈에 섞여 간단한 한 그릇짜리 음식을 즐기고, 태국어로 진행돼 알아듣지 못하는 요가 클래스를 수강하고, 차오프라야 강이 보이는 카페에 하루종일 앉아 있었다. 바람 한점 불지 않는 무더위의 날씨여도, 음식이 예상보다 덜 맛있어도, 공간이 조금 더러워도, 불친절한 사람을 만나도, 나는 순도 100%의 만족감을 느꼈다. 내가 선택한 기준에 따라 움직였고, 그 기준에 따라 나답게 행동하는 것에 가치를 뒀다. 그렇게 행동하기만 해도 안정감과 즐거움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행복을 느낀다고 나답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당장 만족스럽다면 큰 문제는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이 반복되면 우연히 행복해질 확률보다 불행해질 확률이 높아진다. 새싹처럼 자라던 삶에 대한 불만은 어느새 거대한 군락을 이뤄 취약해진 마음을 헤집어 놓을지도 모른다. 어딘가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순간의 편안함과 친숙함에 취해 결단의 순간을 미뤄버린다. 우리는 이 사실을 간과한 채 종종 나다움을 버린다. 기한이 정해진 여행과 달리 우리의 일상은 끝이 없이 흐른다. 웬만큼 마음먹지 않으면 그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다.


회사 생활은 누군가와 함께 여행하는 것과 비슷하다. 선택의 기준이 내가 아닌 우리가 된다. 타인과 함께 여행할 때 나의 취향을 지켜내는 것은 힘들다. 주변 사람 생각하지 않고 취향을 지키는 것은 곧잘 이기적인 행동으로 평가받는다. 진정한 나다움을 지킬 수 있는 동행은 타인이 세운 기준을 무너뜨리지 않는 이상 불가능에 가깝다. 함께하면서 나의 특별한 모서리는 갈리고 갈려 누구와도 잘 지낼 수 있으나 본래의 형태는 전혀 알아볼 수 없는 둥근 모습으로 바뀐다.


둥글어진 사람들은 사회에서 통용되는 기준을 그대로 수용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사회에서 연봉이 좋은 직장의 기준이 되는데, 이러한 기준이 내 인생에 그대로 적용되곤 한다. 그 기준을 적용할 때, 운 좋게 높은 연봉을 받는다면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아니 행복하다고 착각한다. 사회가 부유해질수록 생산성에 높은 가치가 부여된다. 그런 사회에서 가치 있지만 생산적이지 않은 일을 하기엔 큰 용기가 따른다. 하지만 본질로 돌아가 기준을 다시 세우기 시작하면, 사회가 제시하는 기준이 나의 행동을 결정하는 척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선을 넘은 후에는 관습적인 경로로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다.


나는 소중히 여길 가치와 거부할 가치를 스스로 결정하기로 했다.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따라가다 보면 문제에 직면할 수도 있다. 돈을 벌지 못해 원치 않는 노동을 하면서 회사 밖은 지옥이라는 말이 사실이었구나, 그냥 회사에 있을 걸이라고 말하게 될 수도 있다. 해소되지 않는 불안함이 불현듯 찾아와 내 마음을 휘저어놓을 수도 있다. 자연스럽게 함께 하는 일상에서 멀리 떨어져 혼자 지내며 외로움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태국 여행에서 그랬던 것처럼 불쾌, 불안, 외로움 같은 부정적 감정들은 여행의 한 요소일 뿐이다.


퇴사를 하면서 불안하지 않았던 이유는 나에게 어떤 문제가 닥쳐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거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자신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를 감내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에 가까웠다. 만약 버튼 한 번으로 어떤 부작용도 없이 평생 무제한으로 즐거울 수 있다면, 그 버튼을 누를까. 철학자 로버트 노직은 연결되기만 하면 꿈꾸는 것을 아주 손쉽게 경험할 수 있는 ‘경험 기계’에 대한 사고 실험을 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도 그 경험 기계에 연결되지 않고 싶어 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나 역시 주체적으로 나답게 살고 싶지 가만히 앉아 쾌락만 좇는 삶을 선택하고 싶지 않다. 나 혼자 하는 여행은 덥고, 더럽고, 불쾌할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선택한 상황이고, 나는 그 선택에 책임을 지기만 하면 된다.


진정한 행복은 부정적 감정을 수용하고 현재의 내 모습을 진심으로 긍정하는 데서 온다. 책 ‘행복의 지도’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어쩌면 행복은 이런 건지도 모른다. 어딘가 다른 곳에서 지금과는 다른 일을 하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 것.” 다른 모습이 되어 살아가야 할 것 같은 기분, 겪어본 자들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회사를 다녔던 나는 자주 다른 삶을 상상했다. 직장에 다니면서 퇴사한 나를 꿈꾸는 기분, A라는 일을 하면서 B라는 일을 그려보는 기분, 오늘을 살면서 언제 올지 모르는 미래의 하루를 적어보는 기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현재에 불만을 가진 채 다른 삶을 꿈꾸면서 살고 있지 않나.


지금의 나는 그저 현실에 산다. 냉장고 안의 세계를 확인하고 다음 끼니를 고민하면서. 비로소 지금처럼 살아가도 만족스럽다는 기분이 든다. 그 기분은 마음 가는 대로 살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자동으로 따라오는 혜택 같은 거다. 결과나 평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애초에 진정한 행복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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