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동아리를 통해 배운 세상살이
연극에 너무 빠져 연극과 관련해서라면 시간이 허락하는 한 어디든 발 벗고 찾아 나서고 직접 경험하려고 했다.
신입생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본 연극만 수십 편이고, 연출 준비를 하면서 혜화 예술가의 집에서 대본들에 둘러싸여 온종일 보낸 적도 있었고, 극단 워크숍이나 실제 극단, 뮤지컬, 연기를 준비하는 친구들을 만나 지방에서 서울로 왕복하면서 몸 사용법 레슨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실제 공연을 하는 연출가님 의 1분 자기소개 프로젝트로 기획됐던 현대무용 레슨 쫑파티 날 있던 일이다.
"우리 OO이가 국내에서 진짜 제일 잘해"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본과 4학년 국시 공부를 한창 해야 할 때 이제 연극과 진짜 끝이겠구나 싶어 공부보다 연극에 더 빠져 연극에 도움 될만한 현대무용 레슨을 서울로 주에 두 번씩 왕복으로 다니면서 받을 때 이야기다.
연출가님이 주도하여 진행한 레슨이었는데 2-3달간의 연습을 끝내고 1분의 자기 영상을 갖게 된 후 마지막 쫑파티를 기획해 주셨다. 레슨을 같이 받았던 친구들 중 나랑 동갑인 뮤지컬을 준비하는 친구 한 명, 연기 준비를 하면서 액션스쿨 등 기본기를 익히고 있는 친구 한 명과 한께 강사님들과 쫑파티 자리를 갖게 됐다. 사람 만나는 것을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내가 앞으로 과연 평생 이런 전혀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밀접하게 만날 일이 있을까 싶어 무리를 해서라도 오고 싶었던 자리였다.
연출가님의 카페 겸 연습실에서 저녁을 먹고 와인에 반주를 하는데 연출가님께서 이야기하시다가 갑자기 강사님에게 장기자랑을 시키는 것이다.
"우리 OO이가 국내에서 이거 진짜 잘해, 춤 선이 진짜 예뻐, 한번 보여줘 봐."
이런 이야기를 하실 때 바로 강사님께서 음악 틀어주세요. 하고 무용을, 아니 한 편의 작품을 보여주셨다. 이때 나온 음악은 아직도 들을 때마다 그때의 감동이 밀려온다.
-Jeremy zucker의 scared 한 번씩 들어보길..
공연을 매번 해오던 사람이어서 익숙하게 바로 할 수 있었지만 분명 그런 상황이 아니었고, 다 같이 이야기하고 쫑파티를 하는 자리였는데 갑자기 강사님을 시작으로 다들 하나씩 보여주기 시작했다. 뮤지컬을 준비하던 친구도 일어나 뮤지컬을 보여주고, 연기 준비하던 친구도 독백 연기를 보여줬다.
나도.. 이에 질 수 없다는 생각에 종강모임 때 했던 나의 첫 대사(본과 4학년 종강모임이 있는 술자리에서 신입생 연극을 재현하는 연례행사가 있다)를 선보였다. 워낙 조용히 레슨만 받다 갑자기 다른 모습을 보여 다들 신기해하고 놀라며 반가워하셨는데 이렇게 다른 사람들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내 할 일을 하는 것을 연극동아리에선 무대매너라고 한다.
연극학교 첫 수업. 연극 총론에 관해 수업을 할 때 무대매너라고 처음 들었을 때 내가 아는 무대매너는 가수들이 무대 위에서 공연하다 팬서비스처럼 관중들에게 손 한번 뻗어주고, 셀카 찍어주는 등의 행동이었다. 하지만 연극동아리에서 무대매너는 살짝 달랐다.
무대매너는 연극 연습 중이나 공연 중에, 배우로서 지켜야 할 무대 위에서의 예절을 의미한다.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다.
1. 무대 위에서 무대 밑에 반응하지 말 것.
2. 소품이 아닌 (귀걸이 반지 시계 핸드폰 등) 전부 무대 밑에 놓기.
3. 무대 위에 올라가고 내려갈 때는 오른쪽 옆으로만 올라간다.
4. 무대 위에서는 연출의 말에 항시 집중하고 잡담하지 않는다.
5. 무대 위에서는 긴장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6. 자신감을 가져라.
7. 발성 도중이나 연기 도중에 끊지 않는다.
8. 무대 위에서 웃지 않는다. (긴장을 유지) 웃음 참는 모습이라도 보여줘야 함.
9. 발성 필수.
10. 자신을 버리자. 배우의 기본.
11. 바른 자세 (짝다리 x)
12. 티 내지 말기. 최선을 다하기.
이 기준들에 대해서 지금 선배들과 다시 이야기를 해보면 꼰대 같다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분명 있을 수 있고, MZ세대들이 이해 못하는 부분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서 처음 배운 저 원리 원칙을 지키면서 세상을 넓혀갔기 때문에 내가 파악한 대로의 이 원칙들이 갖는 힘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원칙 1. 무대 밑에 반응하지 않기.
무대에서 연기를 하다 보면 의도적으로 ‘대거리’라는 것으로 관객을 참여시켜 연극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연극은 기본적으로 무대 위에서 연기하고 있는 그 배역에 푹 빠져서 연기하는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배역을 연기함과 동시에 또 거기에 푹 빠지기 위해선 몰입의 단계가 필요하다.
지하 동아리방의 무대 위에서 연기 연습을 하고 있으면 가끔 선배가 와서 그 장면을 지도해준다. 그럴 때 내가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고 있다면 무대 아래의 선배들의 문소리나 선배들이 무대매너를 어기게 하려는 온갖 장난에 반응하지 않고 내 할 일에 집중해서 일을 수행해내야 한다.
내가 맡은 배역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설정할수록 신경 쓰고 집중해야 할 일이 많아진다. 이 과정이 바로 연극 시작 1주 차에 하는 과정이다. 집중을 위해 내가 맡게 된 배역에 대해 준비를 하나씩 하는 것이다. 주어진 대본에 나와있지 않은 이 사람을 연기할 때 필요한 모든 부분에 대해 옷차림, 외모, 습관, 성장배경, 하나씩 조금씩 목표를 설정을 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심리학자 칙센트 미하이는 ‘몰입의 즐거움’에서 몰입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몰입의 특징은 첫 번째, 시간 개념이 왜곡된다 그리고 두 번째, 자아에 대한 의식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지하 동아리 방에 있다 보니 시간 개념이 없어지기 쉬웠다. 해가 뜨는지 밤이 됐는지 그저 배꼽시계에 의지하는 수밖에. 그리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연기를 하다 보면 자아에 대한 의식이 사라지면서 타인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연극을 시작한 이후로는 자기의 이름이 아닌 각자의 배역 이름으로 부르게 된다.
이러한 몰입의 특징을 바탕으로 무대 위에 온전히 몰입해 무대 밖을 신경 쓰지 않는 무대매너의 1원칙은 인생에 있어서도 중요한 1원칙이지 않을까 싶다.
즉, 다시 말하면 무대매너는 무대 밑에 반응하지 않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우리 동아리에서 말하는 또 다른 무대매너가 있다. 바로 무대매너(선배들 웃기기) 테스트. 그래서 어떻게 보면 지금 한다고 하면 굉장히 구시대적인 문화라고 할 수 있지만 , 선배들과 술자리가 있다 보면 틈만 나면 무대매너를 시켰다고 한다. 무대매너 테스트를 해보겠다고 하면서 술집에 사람이 많은 곳에서 시키면 어떻게 보면 민폐이기도 하면서.. 무대 아래 관객들(술집 안 사람들, 선배들)에 반응을 하거나, 무대매너를 지키지 못하면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나와 내 아래 학번 후배들까지 잠깐 경험해봤던 문화라 그아래 학번 후배들은 아마 경험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런 걸 왜 하나 싶은 생각도 드는데, 한편으로는 어디서든 연극에 제일 필요한 재미요소를 갖추고, 부끄러움을 없애려고 짓궂게 시키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것을 연극을 하는 집단의 사람들이, 그 연출가님께서 강사님께 시키고 또 다들 스스럼없이 한 것이다.
무대 매너는 연기의 가장 기본이 된다. 연극 중엔 관객 참여형처럼 일부로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게 아니라 공연의 주인공이 어느 순간 무대 위의 배우로 극의 몰입을 깨면서 웃음을 자아내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웃기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공연 자체로 관객을 웃기고 울리고 감동받게 하려는 우리는 무대매너를 항상 지켜야 한다.
<진짜 매력은 반전에서 나온다. 몰입에서 나오는 반전 매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