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편지는 영국에서 시작되어...

나를 만든 동아리

by 참치

세상은 점점 빨라지고, 디지털화되며 최첨단이 되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난 종이와 펜을 더 좋아한다. 이전에 손으로 삐뚤빼뚤한 글씨로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편지를 써서 군인 아저씨들한테 가던 편지도 이젠 그냥 인터넷 편지가 다 대신하게 됐다. 직접 쓴 편지를 좋아해서 훈련소에 들어간 동기들에게 편지를 써주려고 했는데 인터넷 편지로 쓰라고 해서 인터넷 편지로 날마다 편지를 써줬다. 4주간의 훈련소를 끝내고 나와 다들 하나같이 힘이 많이 됐다며 고마워했다.

훈련소에서 내게 날아온 편지들... 고무신을 신은 기분이 이런 건가.

예전엔 다 연필과 노트를 가지고 다니며 공부를 하던 모습에서 요즘은 확실히 그 모습이 달라졌다. 실습생들도 수많은 전공 서적을 다 들고 다니지 않고 아이패드 하나 들고 다니며 거기에 펜으로 필기를 하고 공부하는 패턴도 일일이 종이와 펜으로 직접 쓰면서 하는 사람들보다 눈으로 읽으면서 하는 동기들도 많아진 것 같다. 난 그중에서도 공부를 할 땐 꼭 책으로 공부를 해야 하고, 전자책이 아니라 흰 종이에 까만 글씨를 직접 눈으로 읽고 써야 했다.


직접 펜으로 쓴 글은 누군가에게 정성을 들인 느낌이라 그 의미가 더 큰 것 같다. 디지털 매체로 Ctrl+c, Ctrl+v만 하면 간편하고 빠르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지만 내가 누구에게나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을 하게 되지만, 내가 직접 그것을 글로 쓴 순간 그 행위는 나만의 필체로 전달하는 세상에 유일한 말이 된다.


어떤 선물을 할 때 항상 편지나 짤막하게라도 글을 써서 주려고 한다. 최근에 크리스마스 선물, 전문의 시험 응원 선물 등에도 글과 편지를 써서 같이 드렸다. 연극동아리 지도교수님께도 편지를 써서 드렸더니 요즘 이렇게 편지를 써서 주는 사람이 있냐고 교수님께서도 답 편지를 써주셨다.


처음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되는 습관이 언제부터 들게 된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하지만 인사하는 것처럼 자주 보고 하다 보니 이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하게 된 습관 중 하나이다. 그래도 그 흔적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연극동아리에 처음 들어와 쓰게 된 편지이다.


다른 동아리들은 대게 롤링페이퍼에 다 같이 한 마디씩 써서 대자보를 훈련소로 전달하지만 연극동아리에서는 개개인이 편지지에 글을 써서 훈련소에 간 선배들에게 편지를 써서 안부를 물었다. 훈련소에 간 선배라면.. 최소 나와는 6-7년 아니면 10년 차이가 나는 선배들 일터… 이름도 편지를 쓰라고 들었을 때 처음 듣고 얼굴조차 모르는 남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다. 선배들이 하라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난 무슨 말을 적는지도 모르고 그냥 무작정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써 내려갔다. 연극동아리는 왜 들어왔는지, 얼른 보고 싶다, 선배 때는 어땠는지, 요즘 관심거리나 걱정거리 등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그런 편지를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을 것 같다. 실은 생각을 글로 쓰게 되면서 생각을 검토하게 되고, 쓴 글을 다시 보고 읽으면서 그냥 말로 뱉는 것보다 한결 다듬어진 편지가 나오는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 손으로 쓰는 게 더 익숙해져서인지 말을 하는 게 항상 어려웠다. 말을 하면 그 끝을 내서 완결된 문장으로 말하질 못했고 항상 끝을 흐렸다. 그러다 보니 글이 더 편했다. 예전에 문자를 할 때도 50자 내로 안 쓰면 MMS로 넘어가니까 하고 싶은 말을 줄이고 줄여서 꼭 50자 내로 완결시켜 보내려 했고 말보다 카톡보다 글로 쓰는 게 좋았다.


카톡이나 문자로 그 어느 때보다 글을 쓰는 횟수는 많아졌다. 하지만 그런 글들은 예전에 말하는 글이 아니라 그냥 대화하는 것과 같다. 지금 쓰는 글들은 대부분 “비언어적 표현이 빠진 말”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맞지 않을까.


이렇게 손편지를 주고받기 어려운 때에 가끔 받는 손편지가 주는 울림이 대단하다고 느낀다. “이 편지는 영국에서 시작되어……”로 시작되는 행운의 편지도 인터넷 매체에서 ctrl+c, ctrl+v로 그 의미만 변질되지 않았다면 정말 행운을 가져다주지 않았을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남 1녀 중 장남, 누나형이 생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