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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약사 Apr 10. 2022

혹시 스스로가 잉여인간처럼 느껴진다면

우리 삶에도 쉼표가 필요하다

가끔 아무런 의욕이 없을 때가 있다. 매일 아침마다 습관처럼 쓰는 플래너조차 펼치기 싫은 날. 책 읽기도 글쓰기도 귀찮고,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 이따금 찾아온다.


이런 상태는 짧으면 하루정도로 끝나기도 하지만 꽤 오래갈 때도 있다. 그렇게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불청객처럼 주기적으로 나에게 질척거린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뭐, 말하자면 이런 상태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상태.




이런 날은 계획이라는 틀 속에 나를 가두지 않고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시간을 보낸다. 잉여롭게 빈둥거리며 생산적인 일도, 의미 있는 일도 전혀 하지 않는다. 평소의 나라면 납득할 수 없는 패턴이지만, 경험으로 이것이 가장 현명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처음 이런 상태가 찾아왔을 때는 그래도 억지로 뭔가를 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리 제대로 되는 일도 없고 기운만 더 빠졌다. 그 결과 괜한 자괴감까지 더해져 더욱더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그 상태는 더 오래 지속되었다.


그때의 경험 이후, 억지로 뭔가를 하려고 하는 대신 그냥 '그런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전원만 켜면 항상 똑같이 작동하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니까, 가끔은 이런 날도 있을 수 있다는 걸 받아들였다.


하지만 또 기계가 아닌 사람인지라 막상 하루가 끝나 갈 때쯤이면 생각이 많아진다. 스스로를 돌아보며 너무 '잉여인간'처럼 하루를 소비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할 때도 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자책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게 갈팡질팡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나는, 어느 날 책 속에서 명쾌한 해답을 찾았다.


'무위'는 단순히 휴가나 탐닉, 나쁜 것이 아니다. 비타민D가 우리 몸에 그런 것처럼 무위는 우리의 뇌에 꼭 필요하다. 비타민D가 부족하면 구루병에 걸려 신체가 변형되는 것처럼 무위가 부족하면 정신적인 고통이 초래된다. 무위가 주는 공간과 고요함은 일상에서 잠시 물러나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연결고리를 우연히 찾아 여름날의 번갯불처럼 번쩍 하고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릴 수도 있다.

팀 페리스 <타이탄의 도구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 내가 잉여인간처럼 보낸 시간들이 바로 무위의 시간이었다.


비타민이 부족하면 결핍증이 생기듯, 무위가 부족하면 정신적인 고통이 초래된다는 문장을 읽고 무릎을 쳤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상태는 뇌가 나에게 보내는 신호였던 것이다. 그것은 잊을만하면 찾아오는 불청객이 아니라 무위가 필요하다는 뇌의 외침이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속담이 있다. 매일의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며 하나하나의 빛나는 구슬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잠시 멈춰서 삶의 큰 그림을 바라보며 구슬을 꿰기 위해 생각하는 시간도 반드시 필요하다. 무위의 시간은 그 기회를 마련해준다.

 



어쩌면 인생이란 내 앞에 놓인 원고지의 수많은 빈칸을 채워 넣는 일인 것 같다. 오랜 시간 나는 그 원고지를 한 칸 한 칸 정성껏 채워 넣어야 안심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일종의 의무감으로 힘겹게 채우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빈칸으로 남는 날이 있어도 자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 읽기 좋은 문장이 되려면 띄어쓰기와 쉼표가 필요하듯,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


열심히 살다 보면 방전되는 날도 있다.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다. 그럴 때는 죄책감 따위 가지지 말고 푹 쉬자. 인생은 장기전이므로 지치지 않고 오래가는 것이 중요하다. 충분히 충전해야 다시 열심히 살아갈 에너지도 생긴다.


그리고 책에서 말하듯 '무위'로 보낸 그 시간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다. 일상에서 잠시 물러나 내 삶의 방향을 바라보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불현듯 번쩍 하고 영감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 글도 잉여인간처럼 보내던 최근 며칠 동안 떠오른 생각으로 쓰게 되었다.


쉴 틈 없이 음표만 가득 찬 음악이 아름답지 않듯, 우리 삶도 빽빽하게 일정을 채워 바쁘게 사는 것이 정답은 아니다. 그러니 가끔 스스로가 잉여인간처럼 느껴지더라도 자책하지 말자. 괜찮다.


우리 삶에도 쉼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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