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타인’에서 가족이 된다는 것
주말에 영화를 봤다. <완벽한 타인>. 날로 화려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넘쳐나는 가운데, 상업영화임에도 제한된 공간에서의 연출이 조금은 신선했다. 공간 제약이 있었음에도 시나리오의 극적인 리듬감 때문인지, 전혀 지루하지는 않았다. 배우들의 열연도 훌륭했고 꿈, 현실을 구분 짓는 인셉션 오마주까지 인상적이었다.
아! 물론, 영화를 평론하려거나, 스포 할 생각으로 글을 적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굉장히 색다른 포인트로 다가온 장면이 있었는데 바로, 영화 중간에 잠깐 비추는 노부부의 모습이었다. 옥상에서 함께 달을 보며,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담요를 덮어준다. 그 씬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꽤나 오랫동안 내 뇌리에 박혀있었다.
이상하게 노부부가 함께 있는 모습은 내게 늘 큰 울림을 준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길거리에서 노부부가 손 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볼 때면 늘 맘 한구석이 찡하다. 젊은 청춘남녀의 뜨거운 사랑보다도 노부부의 모습에서 뭔가 더 애틋한 감정이 느껴진다고 할까나? 어쩌면, J와 나이 들어서까지 저렇게 손잡으며, 알콩달콩 살고 싶다는 심연의 바램일지도 모르겠지만.
영화 탓일까? 평소에도 많은 대화를 하는 J와 나는 영화를 보고 나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영화 이야기에서부터, 장면 장면 디테일, 노부부 이야기, 결혼에 대한 이야기, 결국은 이런저런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까지.
정말 결혼 전이라 잘해주는 걸까?
술 데이트를 자주 하진 않지만, 맛있는 닭볶음탕에 깔끔한 청하 한 잔을 마시니 이보다 행복할 수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일주일 내내있는 보상데이 아닌가! 치킨은 살 안 찌고, 나만 살찐다는데 아무렴 어때! 술 마시는 중,
J에게 전화가 왔다. 통화 도중, 나를 바꿔 줬는데 할머니였다.
“아.. 할머니 안녕하세요.”
“어이구, 우리 색시 목소리 듣고 싶어서 내가 바꿔 달라 했어~. 목소리 들으니 너무 좋으네. 우리 색시.”
“저두요. 할머니 빨리 뵙고 싶어요. 조만간 찾아뵐게요. 건강하세요!.”
할머니가 내 목소리를 듣고 싶다 해서 바꿔줬다고 했다.
“담에 할머니 만나면, 손 꼭 잡아드려도 돼?”
J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J에게 자주 할머니 손 잡아드리고, 할머니 댁 갈 때는 꼭 맛있는 먹거리를 선물해가라고 말했다. J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 모습이 꼭 말 잘 듣는 댕댕이 같아 귀여웠다.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J는 부모님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부모님은 자기가 궁금하고, 물론 가끔씩 연락도 하고 싶으실 거야. 그래도 혹시라도 자기가 불편할까봐 연락을 안 하시는 거지, 늘 너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응원하고, 마음에 새기고 있다고 말씀하셨어. 그러니깐 연락 없다고 서운해 하지 말고, 우리가 행복하게 사이좋게 지내면 된답니다.”
서운한 적 없었는데... 날 그렇게까지 생각해주신다니, 코끝이 찡했다. 난 J부모님이 좋다. 어쩌면, 좋다는 감정보다 존경심이 든다는 게 맞을 수 있다. 예비 시댁어른이지만, 그 무시무시한 시월드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시어머니는 놀러 갈 때 마다 늘 밥을 차려주신다. 이따금씩 보내는 J의 집 밥 사진에 내가 입맛 다시는 걸 아셨던 걸까?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밥 속에 어머님의 사랑이 느껴진다. 또, 편하게 있으라며, 수면 바지도 내어주신다. 본인들 신경 쓰지 말고, 우리만 편안하게 잘 지내면 된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이런 얘기에 결혼한 친구는 아직 결혼하기 전이라 그렇다며 웃었다. 네가 아직 환상에 젖어 있다고, 결혼하면 안 그런다고. 절대 잘해주지 않는다고. 괜히 시월드겠냐며. 난 우리 시댁 어른들을 보면,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
곧, 떠난다. 사랑했던 우리 동네
기분이 좋아서일까. 은은하게 달이 비치는 거리를 걷고 싶었다. 오랜 기간 살았던 성북구를 이제 곧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도 있어서인지 우리는 처음 만난 대학로에서부터 성북천을 거쳐, 성신여대 로데오까지 꽤나 긴 거리를 걸었다. 자주 갔던 공연장 쿱쿱한 지하실 냄새가, 최애 홍차가게의 끝내주게 고소한 스콘과 홍차의 향기가, 그리고 동네 구석구석 친구들과의 추억이. 울적할 때 이따금씩 들으러 나왔던 성북천의 졸졸 흐르는 물가 소리가, 소담소담 작은 불빛들이 예쁜 술집과 밥집에서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동안 혼자 많이도 걸었구나.' 구석구석 눈여겨보았던, 애정 했던 공간들이 내 시야에 들어오다 벗어났다. 조금은 찬바람 탓인지, 달달한 술기운에 오른 볼이 식어가고 있었다.
물론, 앞으로도 우리는 더 많은 대화를 나눌 것이고, 완벽한 타인에서 점차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스며들겠지만 최대한 많은 길을 J와 함께하고 싶다. 지긋이 나이든 노부부가 돼서도.
에디터. H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