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예비부부의 버킷리스트
필자는 천성적으로 밝고, 웃음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년 초까지만 해도 삶에 대한 욕구가 그리 많지 않았다. 사실, 나는 몇 년간 많이 피로해있었다. 더 나아가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은 나를 지치게 했고, 사람들을 만나 에너지를 발산하는 시간 외에는 무기력하게 퍼져있는 때가 많았다. 또, 그즈음 읽었던 <피로사회>란 책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는데 능력, 자기 주도, 성과 같은 긍정의 패러다임이 오히려 피로한 인간상을 만들어낸다고 밝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하루가 멀다하고 보이는 과로사 기사에 ‘어쩌다 이리 피로사회가 됐을까?’ 생각하면서도 정작 해답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랬던 내가 지금은 오래 살기를 희망한다. 평생의 배우자를 만나면서 오래 살고 싶어졌다. 그와 더불어 하고 싶은 것도 도전해야 할 일도 많아졌다. 예전의 활력 있는 내 모습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J는 가끔씩 압박감을 느끼는 내게 ‘꼭 그럴 필요는 없어’라며 말하곤 했는데, 그 말은 쪼여만 있던 내 몸과 마음에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단순한 위로 이상의 힘이 있었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라캉의 말처럼, 어쩌면 나는 누군가에게 좋아 보이는 삶을 쫓고 있던 것 아닐까란 생각을 하게 됐다. 마음의 여유를 되찾으며, 오히려 많은 것들을 보게 되었다.
버킷 100개를 적을 수 있을까?
그러다 우연히 지인의 소개로 ‘버킷 100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 직업도 나이도 다른 40여 명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함께 2019년 버킷리스트 100가지를 적고, 경험을 공유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워크숍이었다. 버킷 100개를 적는 것이 가능할까? 평생 이룰 버킷이 아니라, 2019년에 이루고 싶은 버킷리스트라고? 나의 버킷 100은 의구심에서부터 출발되었다. 물론, 하루에 100개를 적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기에 참여자들은 30개 정도를 미리 생각해서 갔다.
왜 100개의 버킷리스트인가?
한 주최자는 20~40개의 버킷리스트는 표면적인 욕망에 충실하지만, 100개 정도의 버킷을 생각하다 보면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있는 욕망을 끌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무의식이 의식화되는 순간 상당한 심리치료효과가 있다며. 아~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심연에 잠들어 있던 버킷리스트가 나도 궁금했기에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았다. 당장 해야 할 일, 떠오르는 일 등 20개까지는 순탄하게 쭉쭉 적어 내려갔지만, 30개가 넘어가자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적혀 있는 것을 토대로 카테고리(가족, 건강, 회사, 글쓰기, 배움, 도전 등)를 옆에 적어보았더니 한결 수월하게 지니고 있던 세부 계획들이 생각났다. 워크숍 당일에는 참여자들과 대화하는 시간들이 많아서 100개를 다 쓰진 못했지만, 3일에 거쳐 버킷리스트를 완성했다. 내 무의식에 잠들어 있던 계획과 꿈들이 생생하게 드러났다.
결혼준비 버킷리스트를 정해보는 건 어떨까?
20대 때는 아주 예쁜 웨딩드레스를 입는 꿈을 꾸 곤 했다. 30대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만약, 결혼하지 않는대도 언젠가 웨딩드레스는 꼭 입어보고 말리라 생각했다. 웨딩드레스는 여자라면 한 번쯤 꿈꾸는 로망이며, 판타지 아니던가! 필자는 실제 결혼 준비를 하며, 드레스 샵 '클라우디아'를 통해 그 오랜 로망을 이뤘다. 모든 것에는 연이 있듯이, 드레스에도 연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연히도 첫 투어 샵에서, 첫번째로 본 웨딩드레스가 본식드레스가 되고 말았다.
그 외에도 ‘진부하지 않은, 낭만적인 웨딩촬영하기’, ‘정말 특별한 청첩장 만들기’, ‘채플홀에서 결혼하기’, ‘예랑이 근사한 슈트 선물하기’ 등 결혼에 대한 로망를 이뤄가고 있다. 올해는 결혼을 앞두고 적은 버킷리스트라 그런지 많은 부분에서 남편과 함께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새 출발, 부부라는 이름으로>
- 주 2일은 함께 운동하기
- 함께 패러글라이딩, 번지점프 등 액티비티 즐기기
- 부부 템플스테이 다녀오기
- 가급적 집 밥 해 먹기(TV 노노. 대화하기)
- 여름휴가 계획하기
- 건강검진 함께 받기
- 함께 주기적으로 봉사하기
Private한 버킷을 포함해, 우리가 올해 해야 할 일들이 상당히 많았다. 나는 ‘버킷 100’프로젝트를 J에게 들려주고, 그의 버킷을 적어달라고 했다. 새삼 나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궁금하기도 했다.
- 함께 계절마다 여행 가기
- 1번 이상 해외여행 가기
- 스카이다이빙, 번지점프 등 금지
-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운전 연수시켜주기(과연?)
- 한강 가서 푸드 트럭 가보기
- 야구장 놀러 가기, 같이 낚시 가기 등등등
얼핏 평범해 보이는 J의 버킷리스트였지만, 우리의 빠른 결혼 결심과 준비로, 연애기간이 짧았던 걸 감안하면 무엇보다 소소한 데이트를 많이 하고팠던 게 분명했다. 그는 평소 하고 싶었던 데이트 종류를 나열했는데, 칸 채우려는 목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치? ^^)
서로의 버킷리스트에 대해 이야기하며, 몰랐던 부분들도 많이 알게 됨은 물론, 한 발짝 더 다가가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패러글라이딩, 번지점프, 스카이다이빙 등의 액티비티를 계획한 나와 이를 무조건 반대하는 J와의 마찰도 있었지만, 그저 나를 아끼는 마음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도 너무 하고 싶으면? 그때 가서 고민해봐야겠다. 그 외에도 ‘아프면 무조건 병원 데려가기’, ‘사랑한다는 말, 안 하는 날 없기’, ‘싸워도 무조건 그날 풀기’ 등이 있었는데, 읽는 내내 마음이 훈훈해졌다. 이는 누군가의 아내로, 누군가의 남편으로 살게 되겠지만, 따뜻한 귀속이 될 것 같은 리스트들이었다.
지금 결혼을 앞두고 있다면, 혹은 결혼을 했어도 좋다. 혹은 사랑하는 친구와 연인과 버킷리스트를 적어보고 서로 공유하는 진귀한 경험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누군가 함께 적는 것만으로도 동기부여는 물론, 향후 실행에 원동력이 될 것이다. 나는 오늘도 예비 남편과 버킷리스트 실행 ing 중이다.
에디터. HJ